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구도자의 마음” (요한복음 20:24-29)

새벽지기1 2017. 1. 22. 16:33

 

1.

 

최근에 <도마복음서>(the Gospel of Thomas)라는 책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TV에서 <도마복음서>에 대해 강의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도마가 쓴 복음서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은 누군가가 써 놓고는 도마의 이름을 달아 놓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이 책을 몰래 숨겨 왔던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은 초대 교회에서 믿을만한 책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밀려난 책입니다.

 

실제 도마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도마라는 사람이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다는 정보만을 전해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도마에 얽힌 일화가 세 개 나오는데, 비록 간단한 일화들이지만, 쌍둥이 형제 중 하나였던 도마가 어떤 기질의 사람이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일화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 지방으로 가려고 하자,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고 말합니다. 도마는 예수께서 로마 정부를 대항하여 폭동을 거사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14장에 보면 도마의 또 다른 면이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2-4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다들 어리둥절하여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도마는 불쑥 나서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5절)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 24-29절의 이야기가 도마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당신을 보이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를 만난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25절)라고 대답합니다.

 

그로부터 여드레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께서 도마의 말을 어떻게 들으셨는지,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27절)고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손을 뻗어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보지도 않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때까지 예수님에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도마가 처음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세 가지의 일화를 종합해 보면, 도마의 기질과 성질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직선적이고 단순하며 급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마음에 있는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감싸 않고 있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문이 생기면 단서가 발견될 때까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문을 퉁명스럽게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결론이 마음에 집히면 좀 더 점검하고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합니다. 그에게는 아주 쉽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뭔가 의로운 일이라고 생각되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칠 결의가 그에게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의연히 칼을 빼어들 열정이 그에게 있습니다.

 

2.

 

우리 중에는 도마와 같은 기질과 성질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마음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품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더 깊이 따져 보고, 더 살피고, 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마음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내뱉는 사람들 말입니다. 반면, 도마와는 전혀 다른 기질과 성질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좀처럼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신의 의중은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의중을 살피는 사람들 말입니다.

 

어떤 기질의 사람이든 혹은 어떤 성질의 사람이든, 도마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 혹은 자신의 믿지 못함에 대해 정직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동료 제자들에게 한 말은 유심히 살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비참하게 죽어 장사지낸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어, 그래?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는 걸? 나도 어서 주님을 보았으면 좋겠네!”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도마가 동료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지 못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저나 여러분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에게 특별한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마음에 일어난 의문에 대한 도마의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 아니 믿지 못함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믿지 않는 것이 자랑이 되었습니다. 몇몇 도발적인 저자들의 무신론 변증서(books for atheism)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고, 각종 미디어들에서 전통적인 종교적 믿음을 조롱하고 있는 이 시대에,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처럼 되어 버렸고, 때로는 미개함의 증거처럼 취급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예속당한 증거이며, 무엇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자유롭다는 증거처럼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마치 자랑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반면, 교회의 전통적인 분위기 안에서 자란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슨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불신앙(unbelief)과 의문(doubt)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회의하는 용기>(God in the Dark)라는 책에서 불신앙과 의문을 선명하게 구분해 줍니다. ‘불신앙’은 ‘믿지 않기로 선택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그러나 ‘의문’은 ‘믿으려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의문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그분은 우리가 의문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의문을 통과하여 참된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지 못하는 것, 믿어지지 않는 것은 자랑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영적 교만의 증거이며,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오해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믿음의 과정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도마처럼, 있는 그대로 자신의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3.

 

둘째, 도마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의문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의문을 표현한 말투를 보면 교만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냥 믿지 못하겠다고만 말해도 충분한데,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 보겠다느니, 손을 창자국에 찔러 보겠다느니 하는 말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표현은 그의 교만한 마음에서 나왔다기보다는 투박한 말버릇에서 온 것일 수 있습니다. 도마가 자신의 의문에 대해 겸손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가령, 도마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네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자네들, 제 정신이야? 제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도대체 무엇에 홀린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려!” 마치,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열 명의 동료들은 제 정신이 아니고, 자신만이 제 정신인 듯, 그들의 믿음을 비판하고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만, 믿어지지 않는 자신의 입장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내게 믿어지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믿는다고 하여 그 믿음을 부정하거나 비판하거나 비웃는 것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나의 이성과 판단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태도가 나옵니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교만하다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입장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무례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이 나에게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선선히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지만, 내게 믿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겸손은 참된 믿음에 이르게 하지만, 교만은 불신앙에 머물러 있게 만듭니다.

 

도마는 이런 점에서 진정한 구도자(truthful seeker)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의 기질과 성질 때문에 직선적이고 투박한 언행을 드러냈지만, 그의 마음은 구도자의 특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구도심은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도심과 다른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도를 닦습니다. 기독교는 도를 닦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자신에게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참다운 구원을 찾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참된 믿음을 향해 끊임 없이 나아갑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도심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해 주며, 그들의 믿음에도 이유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믿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좋아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흉내내기를 거부합니다. 믿어지는 것과 믿어지지 않는 것을 정직하게 구분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선선히 인정하면서 그 단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열망합니다.

 

그리스도인 구도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진리의 실체를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좁은 두뇌로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함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믿음의 대상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묻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알아갈수록 더 알고 싶고, 경험할수록 더 신비롭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마음, 이 구도심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믿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믿는 바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권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 3:15).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해. 전도 책자를 달달 외워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믿는지, 무엇을 믿는지, 어떻게 믿었는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요령 있게 설명할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구도적인 마음으로 참된 믿음을 정직하게 추구해 온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자신이 왜 믿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믿으라니까 믿고, 믿고 나서도 아무 의문 없이 그냥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해 줄 말이 없습니다.

 

4.

 

얼마 전, 저는 도마와 참 비슷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하는 모습이 너무도 도마와 닮았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분의 기질과 성질도 도마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이십니다. 그분은 매사가 아주 분명합니다. 긴 것은 기고 아닌 것은 아닙니다. 속 마음과 입으로 뱉은 말에 간격이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지 못합니다.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느낀 대로 행동합니다.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종종 오해를 사는 일도 있습니다.

 

그분은 원래 예수님을 모르고 자랐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오면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따지면 교회와 관계를 가지게 된 역사가 24년입니다. 우리 교회에 나온 것만 해도18년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분은 그 많은 세월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설교를 들었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저 형식이었습니다. 연주하는 것을 즐겼기에 때때로 찬양을 연주하기도 했지만, 그저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많은 세월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그분이 얻은 믿음이란 다만 뭔가, 누군가 초월적인 존재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었습니다.

 

지난 5월, 그 교우가 영성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이제는 그 뭔가, 그 누군가를 찾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에게도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남들이 있다고 하는 뭔가를, 남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대상을 자신도 찾았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한 편으로는 그 뭔가를, 그 누군가를 만났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혹시나 그 뭔가, 그 누군가에 의해 사로잡혀 인생이 영 틀어지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을 품고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둘째 날 아침, 개인 면담을 하는 시간에 제가 그 교우와 마주 앉았습니다. 저와 그분이 나눈 대화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제가 묻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진심으로 불러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2천년 전에 죽은 유대 청년 나사렛 예수에게 ‘주님!’이라고 불러 본 적이 있습니까? 진심으로 그분 앞에 무릎 꿇어 본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까?”
“정말, 그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뭔가, 누군가가 있음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분이 저를 지금까지 지켜 오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누구인지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날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자매께서는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지도 못하셨습니다. 지금의 그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으니 됐습니다. 이제 앞으로 한 가지 기도만 반복하십시오. ‘하나님, 제 마음을 만져 주옵소서.’ 자나 깨나, 앉아 있으나 걸어 다니거나, 연주할 때나 설겆이 할 때나, 마음을 다해 이 기도를 드리면서 마음을 열고 그분을 찾으십시오. 저도 자매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머지 않아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5.

 

오랫 동안 교회에 다녔고 이런 저런 일로 교회 봉사를 해 온 사람이 목사 앞에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이토록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큰 믿음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적이 없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교우는 도마처럼 투박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도움을 구했습니다.

 

저는 그 교우가 언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교우나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시간이 더 빨랐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 날 저녁의 일이었습니다. 둘째 날 밤, 영성기도회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한 동안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기도가 깊어지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저도 맨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참 시간이 지났을 때, 저는 뒤편에 앉아 있던 그 교우가 울며 기도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문득, 하나님의 때가 이 때인지도 모르겠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기도회가 끝날 무렵, 저는 그 교우를 불러내 앞에 앉게 했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그 교우는 대답했습니다. “예, 제가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실 수 있겠습니까?” 그 교우는 대답했습니다. “예, 이제는 부를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참석자 모두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그 교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그 날을 지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교우는 어릴 적부터 홀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우는 것을 필사적으로 피해 왔습니다. 잠시라도 울었다가는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울지 않고 강하게 버텨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함께 기도하는 중에, 가슴 저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억누르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서 토해 내고 보니, 그것이 눈물, 콧물이 되어 통곡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마음 놓고 통곡하며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퍼내고, 생전 처음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얼마 전, 그분이 수양회에 참석했던 분들 앞에서 간증을 하면서 이런 고백으로 듣는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지금 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마치 제 안에 누군가가 들어 와 있는 느낌이라 할까요?” 바울 사도가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라는!

 

6.

 

2부 예배에 나오며 한 달에 한 번씩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이경신 교우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는 그분의 체험이 성령께서 주신 것인지, 아니면 영화 <밀양>에 나오는 신애의 경우처럼, 단순한 감정적인 변화였는지를 분별하느라, 지금까지 이 ‘사고’(?)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마음에 평안이 생겼다든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성경 말씀이 눈과 마음에 들어온다든가 하는 성령 체험의 증거들이 발견되었기에,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체험으로 인해 그분이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출발선에 선 것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아기를 잘 키워 가십시오.” 그 체험으로 인해 그분에게는 속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거듭 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그 갓난 아기인 속 사람을 키워 가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 묵상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영적 교제를 통해, 헌신과 봉사를 통해 그 속 사람을 키워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체험이 머지 않아 한 순간의 착각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교우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유는 오늘 요한복음에서 읽은 도마의 이야기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유별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2천년 전의 도마나, 오늘의 우리나, 지금 내 마음에 믿어지는 것과 믿어지지 않는 것을 정직하게 분별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거부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며, 더 온전히 믿기를, 더 깊이 이해하기를, 더 강하게 사로잡히기를, 그리고 더 충만히 은혜 입기를 겸손히 갈망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알맞는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체험 후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 체험으로써 도마는 다만 믿음의 길에서 아주 중요한 도약을 했을 뿐입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어느 지점에서도 “다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진정한 구도자의 마음을 빌립보서 3장 12절부터 15절에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 중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 그 거룩한 성령의 손에 사로잡히는 것을 열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분의 손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더 충만히 사로잡히기 위한 열망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까? 마치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그렇게 하듯이 앞을 향해 몸을 내밀면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려는 간절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도마에게 그러하셨듯, 이경신 교우에게 그렇게 하셨듯, 그리고 구름 떼같은 많은 증인들에게 그렇게 하셨듯, 우리에게도 그런 은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글피도 진실한 구도자의 마음을 품고 살아 가십시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교회에 드나든 세월의 분량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낯선 창조주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를 믿음이 있습니까? 낯선 그 유대 청년에게 ‘주님!’이라고 부를 믿음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은 꼭 수양회에 가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면서 진실로 주님을 영접할 때에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 마음 속으로 “주님, 제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제 마음에 오셔서 저의 주님이 되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 주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실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똑 같은 방법으로, 누구에게나 똑 같은 느낌으로 오지는 않습니다만, 누구에게나 똑 같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령의 거룩한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그렇게 하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