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종교는 동일한 산 정상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과 같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하는 말들 중 하나입니다. 얼른 들으면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이 귀에 들리는 것만큼이나 진실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제 판단에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고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종교는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물론, 여기서 사이비 종교(cults)라든가 사교(evil religions)는 제외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제외한다면, 소위 고등 종교들(enduring religions)은 산 정상에 이르는 길, 즉 구원받는 길을 찾으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현재 상태가 불행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 일치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종교는 나름대로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불행을 치료하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그에 대한 해법과 그 해법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성격에 있어서 종교는 서로 다릅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개의 봉우리를 가진 거대한 산을 상상해 보십시다. 그 산 아래에 여러 개의 길이 나 있습니다. 어떤 길은 동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에 이르게 하고, 어떤 길은 서쪽으로 난 중턱 봉우리에 이르게 하며, 어떤 길은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르게 합니다. 산 속에 난 길이 모두 위를 향하기는 하지만, 그 길의 종착지는 각기 다릅니다. 이처럼 모든 종교들은 현재 당하고 있는 불행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불행에 대한 진단과 그것에 대한 해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가져다주는 구원도 다릅니다.
가령, 불교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성제(four holy truths)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苦, suffering) ‘집’(集, obsession) ‘멸’(滅, destruction) ‘도’(道, way or truth)라는 네 한자 단어로 요약되는 것이 불교의 진리입니다. 인간은 ‘고’ 즉 불행에 빠져 있으며, 그 원인은 ‘집’ 즉 집착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멸’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방법 즉 ‘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얻는 구원을 열반(nirvana, blessed state of being)이라고 부릅니다. 유교에서는 ‘극기복례’(克己復禮, denying one’s self and being tuned with the grand principle)를 가르칩니다. 유교는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욕심에 물든 자아가 자연 원리(harmonious order)와 인륜(moral order)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불행을 극복하려면 이기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자연 원리와 인륜에 맞게 살아가도록 계몽해야 합니다. 그것이 유교가 말하는 구원입니다.
2.
인간이 현재 불행한 상태에 있으며 구원이 필요하다고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동일합니다. 기독교에서도 불교처럼 집착을 문제로 여깁니다. 기독교에서도 유교처럼 이기적인 자아를 문제의 핵심으로 생각하고, 자연 질서와 인륜에서 벗어나는 것을 문제로 여깁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우연히 혹은 자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지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근본 문제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어진 존재인 인간은 마땅히 창조한 존재인 신에게 의존하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음으로 인해 문제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왜곡된 관계, 어그러진 관계를 가리켜 ‘죄’라고 부릅니다. 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죄라는 말을 두 가지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영어식으로 설명하면 정관사를 붙이고 대문자를 사용하고 단수로 써서 the Sin이라고 해야 할 죄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죄’입니다. 둘째는, 복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영어식으로 하자면 the sins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범했다"라고 말할 때에는 두 번째 종류의 죄를 가리킵니다. 거짓말, 미움, 살인, 절도, 음란 같은 것을 가리켜 말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단수 대문자로 the Sin이라고 말할 때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가 범한 죄들이 아니라 그 죄들을 범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릇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과 분리된 상태, 그분에게 등을 돌린 상태, 그분을 무시하는 상태, 그분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 상태에 사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리 수양을 하고 교양을 쌓아도 죄들을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긴, 설사 죄들을 범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등지고 사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Father’s Day가 한 주일 남았습니다만, 불효 중에 가장 큰 불효가 무엇입니까? 용돈 안 드리는 것입니까? 생일을 챙겨 드리지 않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것도 불효에 속합니다만, 가장 큰 불효는 자식이 그 마음에서 부모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등지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 패역한 마음에서 모든 불효의 행동이 나오지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마음 상태가 이미 불효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들을 범하기 전에라도, 마음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등지고 살아간다면, 그 상태 자체가 이미 죄입니다.
바로 이 죄가 인간이 당하는 온갖 불행의 원천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짓는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짓는 ‘죄들’ 때문에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미움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절도 때문에, 음란 때문에, 사기 때문에, 살인 때문에 우리 인류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불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이 ‘죄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치료하려고 힘씁니다. 반면, 기독교는 그 모든 죄들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왜곡된 관계 즉 근원적인 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그 관계를 고치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여러 개의 봉우리를 가진 거대한 산의 이미지를 다시 기억해 봅시다. 불교가 제시하는 구원은 열반이고, 유교가 제시하는 구원은 자연 질서와 인륜에 순응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둘이 같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봉우리입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봉우리입니다. 등산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선택을,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팻말을 주의 깊게 보고, 어느 봉우리로 오르는 길인지를 잘 알아보고, 정말 가야 할 봉우리가 어디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3.
잊고 살았던 하나님, 외면하고 살았던 그분, 마음속에서 그 음성을 들었지만 끊임없이 거부했던 그 하나님, 그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셔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상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며, 생령으로서의 우리의 존재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으며,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거역하며 살아온 것이 가장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찢어지고 몸이 떨리는 깨달음으로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만지실 때 이런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오호라, 내가 죽게 되었도다! 내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으며 구원의 길을 찾을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받아들여지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겉 사람은 그대로 있지만, 속사람이 새로 지어집니다. 거듭 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죄를 치료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내 삶을 다스려 가실 때, 나의 ‘죄들’이 점차로 해결되어 갑니다. 그 죄들은 내 존재가 하나님과 분리된 근원적인 죄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며,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근원적인 죄가 치료되었으므로, 거기서 파생했던 ‘죄들’이 점차 줄어져갑니다. 성령의 다스림이 점점 더 강해지고, 그 다스림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져 갈 때, 죄의 유혹은 점점 그 힘을 잃고, 죄들은 하나씩 자취를 감춥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한, 죄의 유혹은 언제나 있을 것이며, 그 유혹은 때로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다스림이 내 안에 살아있고 그 통치력이 강할 때, 우리는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죄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힘겨웠던 죄들과의 씨름이 점점 수월해져 갈 것입니다. 하긴, 그럴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영적 교만이 더 큰 죄의 유혹을 끌어 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교묘한 죄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교만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입니다. 이것만 조심한다면,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회수가 점점 높아질 것입니다.
4.
최근에 크레이그 그로쉘(Craig Groeschel)이 쓴 <목사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라이프 교회’(Live Church.tv)라는 창조적인 방식의 초대형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원제목 <Confessions of a Pastor>에서 보듯, 이 책은 목사로서 차마 내놓기 어려운 내면의 번민과 갈등과 유혹을 진솔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같은 목사로서 저는 그의 고백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고, 자신의 부끄러운 허점들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의 고백 중 하나를 소개하렵니다.
그는 청소년기에 술과 마약과 도박과 섹스에 마음을 팔고 살다가 열아홉 살에 성령의 만지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 났습니다. 그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 전에 탐닉했던 많은 죄들을 해결 받았는데, 그 이후에도 성적인 유혹만큼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이 죄에 걸려 있다고 생각하고는 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려 가지의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아내에게 순결을 지킬 수 있도록 나름대로 생활 원칙을 정했습니다. 가령, 절대로 혼자서 여행하지 않는다는 것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포르노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가까운 친구 몇 사람과 언약을 맺어 서로의 컴퓨터를 정기적으로 검사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적 유혹으로부터 자유한, 신선한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느 집회에서 열정적인 설교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느 공항에서 탑승 시간을 기다리던 중, 볼 일이 있어서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변기에 앉았는데, 저쪽 바닥, 손을 뻗치면 닿을 곳에 과거에 즐겨 보았던 음란 잡지가 있는 겁니다. 순간, 그의 심장은 고속 철도의 기관처럼 심하게 쿵쾅거렸습니다. 마약에 취한 듯 한 그 익숙한 흥분감이 느껴졌습니다. 집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은밀한 공간에 그는 혼자였고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그로쉘 목사는, "아,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을 가져온 그 가련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자. 아무도 유혹받지 못하게 내가 갖다 버리자"라고 생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와 정 반대로 그는 잠시 동안의 번민 끝에 결국 떨리는 손을 뻗어 그 잡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다행이, 그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 책을 펼쳐 보지는 않았지만,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 책, 정신적으로도 불결하고 위생적으로도 불결한 그 책을 집어 들었다는 것에 그로쉘 목사는 심히 민망하고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아주 큰 성장의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다른 경우에 비슷한 상황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도 혼자였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음란 잡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갈등 없이 그것을 집어 휴지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서 죄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휴지통에 집어 던질 때의 그 승리감과 기쁨은 그 잡지를 펼쳐 보면서 즐기는 은밀하고 부정한 쾌락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이, 성령의 만지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후에도, 그리고 매일 기도의 깊은 얼숨을 쉼으로써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 살아가더라도, 죄의 유혹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때로 속절없이 죄의 유혹 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 갈수록 자연히 없어지는 죄들도 있지만, 그로셀 목사가 한 것처럼 자신을 죄들의 유혹으로부터 지키도록 방책을 세우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고 더 많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내 가정이 그만큼 행복해지고, 내 교회가 그만큼 행복해지고, 내 나라가 그만큼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 성령의 만지심을 받고 그 다스림을 받아 변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로 변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가정의 평화가 시작되고, 직장에 평화가 흘러넘치고, 교회가 그 사람으로 인해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사회가 달라지고 나라가 달라집니다.
5.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우리는 모든 인간고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까? 성령의 만지심을 받아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던 삶,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삶,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던 삶을 청산했습니까? 근원적인 죄, 영어로 the Sin을 치료 받았습니까? 마치 대지로부터 뿌리 뽑혔던 나무가 다시 대지에 심겨지듯, 혹은 물을 떠났던 물고기가 다시 물속에 던져지듯,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살던 우리는 과연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담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만일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점령하기까지,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여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간절히 사모하시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종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형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통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셔야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매일, 매 순간 깊은 얼숨을 쉬는 일에 부지런하십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그 다스림이 점점 더 강해지도록, 그리고 그 다스림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도록, 매일 성령과 사귀어 사십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를 오염시키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죄들의 유혹에 대처하십시다.
이 죄들은 참 교묘합니다. 얼른 볼 때는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 같고, 나를 더 행복하게 할 것 같습니다. 그것에 탐닉하고 있는 동안에 그 죄들은 우리를 속여 우리가 진실로 행복한 것처럼 속입니다. 그러나 그 죄들은 결국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황량해지고 파멸에 이르게 되며,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심한 상처를 입게 되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더욱 지옥으로 변해갑니다. 한 인간의 불행도, 한 가정의 불행도, 한 사회의 불행도, 한 국가의 불행도 결국 따져 보면 죄와 죄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 하나가 성령의 만지심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분의 다스림을 통해 변화되어 간다면, 그것은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가정의 문제요, 내 교회의 문제이며, 내 나라의 문제이고, 마침내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 일에 더욱 마음을 다하십시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내 존재의 모든 것이 변화하도록 그리하여 죄들로부터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더욱 성령을 사모하십시다. 예배로써, 말씀 묵상으로써, 기도로써, 성찬을 나눔으로써, 영적 교제를 나눔으로써, 봉사와 사랑의 일에 참여함으로써, 선교와 전도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깊은 얼숨을 줄기차게 쉬십시다.
6.
동시에, 우리가 진실로 성령의 만지심과 다스림을 통해 죄를 해결 받고 죄들로부터 해방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불행에 대한 참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해결책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 줄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치료 받았다면, 그 치료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서 그들도 치료받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이 구원의 길을 전하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 20:23). 부활하신 주님께서 뿜어내시는 얼숨을 받아 마셔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나서 제자들이 굳게 잠근 문을 열고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했듯이, 우리가 성령을 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으로 나아가 아직 죄와 죄들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길을 전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유명한 책 제목을 패러디 하여 표현하자면, 우리는 ‘치료받은 치료자’로서 이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그만큼 죄의 문제가 치료됩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그만큼 죄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거나 더 심해집니다. 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인류의 불행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거나 더 심해집니다. 이 세상에 죄가 판을 치고 그로 인해 인간의 불행이 더 심해지는 것은 복음을 미리 받고 성령을 아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선교와 전도에 게을리 함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죄가 더 번성하고 그로 인해 이 세상은 더욱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만지심과 다스리심을 받아 죄와 죄들의 문제를 해결 받은 우리를, 주님은 이 세상으로 보내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변화하도록 이끌고 싶어 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와 죄들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인간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복된 곳으로 만들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바로 이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전도는 바로 이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 절박하고도 거룩한 명령, 우리를 향한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이 뜨거운 기대 앞에서, 성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성령의 사람이 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
저희가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성령의 다스림을 구하는 데 게을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지만
여전히 죄들 속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저희 삶 속에 성령의 증거가 없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처럼 믿어 보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령을 더욱 사모하게 하시고
그 거룩한 다스림을 더욱 사모하게 하소서.
성령의 증거가 저희 삶 속에서 나타나고,
그 증거를 가지고 나아가
겸손히 그러나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그리하여 치료받은 치료자로서 일하도록,
오, 주님,
저희를 이끄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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