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71년에 태어나 1610년, 만 38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화가가 있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인데, 그의 고향 이름 카라바조(Caravaggio)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아주 사실적이고 극명하게 명암을 대조시키는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한데, 전성기에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요청을 받아 많은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성화들은 등장 인물들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화가들의 성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님이나 믿음의 위인들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그린 성화 중 ‘도마의 불신’(The Incredulity of St. Thomas)이 있습니다. 오늘까지 3주 동안 묵상하고 있는 도마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다음에 보시는 것이 그 그림입니다.
한 번 보고 나면 잊혀지지 않을만한 명화입니다. 옆구리에 난 상처에 검지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은 도마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도마와 다른 두 제자가 예수님의 상처를 향해 던지고 있는 강렬한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도마가 입은 남루한 옷과 예수님의 상처에 찔러 넣은 손의 손톱에 낀 검은 때가 눈길을 끕니다. 상처에 찔러 넣은 손가락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있는 예수님의 손과, 옆으로 떨구고 있는 예수님의 시무룩한 표정 또한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화폭 전체에 드리워진 어두운 분위기 또한 인상적입니다. 과연 이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눈빛은 어느 새 도마와 다른 두 제자가 예수님의 상처를 응시하게 만든 호기심보다 더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2.
이 그림과 관계하여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24-29의 내용과 이 그림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본문을 보면, 도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할 것처럼 큰 소리를 쳤지만,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서자 도마는 그렇게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27절)고 초청하셨으나, 도마는 그 순간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카라바조는 도마가 마치 검시관(medical examiner)처럼 예수님의 몸을 검사하는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카라바조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요한복음의 본문을 오해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위대한 화가들은 자신이 그리려는 대상을 깊이 연구하고 나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슬쩍 보고 붓을 휘갈겨 그린 그림이라면 명작으로 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카라바조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다는 것이 더 사실이 가까울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의도가 더 분명해 보입니다.
도마의 표정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검사하고 있는 도마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으십니까?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도마뿐 아니라 다른 두 제자의 표정도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보입니까? 제게는 놀라움이 보입니다. 호기심도 보입니다. 맨 뒤에 있는 제자의 표정에서는 민망함 혹은 징그러워하는 느낌까지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적(miracle)을 목도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의 표정은 도대체 볼 수가 없습니다. 도마의 표정만을 보면 그 사실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과연, 도마가 그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상처에서 빼낸 후에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하고 고백했을 것 같습니까? 화폭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를 볼 때 도대체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제 생각에는, 손가락을 빼낸 후에 도마가 고개를 갸우뚱 저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거, 참, 알 수가 없네. 창 자국이 맞기는 맞는데! 죽은 사람들로부터 부활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으니 부정할 도리는 없지! 거 참, 신기한 일도 있는 걸!" 아무리 그림을 보고 있어도, "오, 주님,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이제야 제가 알겠습니다. 이제야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3.
저의 이 감상이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다면, 이 그림은 실제 도마를 그린 것이 아니라 도마를 소재로 하여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림 전체를 통하여 카라바조는 ‘불신을 극복해 가는 도마’를 그렸다기보다는 ‘불신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듣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닐가 싶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설사,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만져 본다 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
자신의 불신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느끼실 지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 느낌이 예수님의 표정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표정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느끼십니까? 실망과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마치 "내 상처를 만지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구나! 무엇을 더해야 네가 믿겠니?"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카라바조의 도마는 그 눈길을 피합니다. 그는 믿기 위해서 상처 자국을 만지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상처를 매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의 카라바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천재적인 재능이 아까울 정도로 불운하고 방탕스럽고 또한 비극적인 삶을 산 ‘광기의 화가’였습니다. 나폴리, 시칠리, 로마 등에서 활동하면서 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괴퍅한 기질로 인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는지 어떤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굴곡 많은 그의 삶의 여정과 그의 행동을 보건대, 믿음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우발적으로 한사람을 살해한 이후, 교황청의 수배를 피해 그의 인생 후반기를 도피자로 전전했습니다. 도피하는 중에도 끊임없는 불화와 싸움으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피하다가 비참하게 객사했습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재능과 영감으로 많은 성화를 남겼지만, 정작 그 자신은 참다운 믿음에 이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카라바조의 성화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믿음이 돈독한 사람으로서 성화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전해 주려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회의와 질문과 불신을 화폭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성화들에서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거룩한 성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보였고, 성화 안에 담긴 의문과 회의의 분위기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4.
카라바조는 비록 위대한 예술품들을 남겼지만, 그 자신은 불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 그림의 도마의 겉모습처럼 남루한 인생을 살다가 찡그린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을지 모릅니다. 그의 불신은 그림에 반영되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불신으로 인해 영원한 어둠에 처해졌을지 모릅니다. (제가 여기서 "처해졌을지 모릅니다."라고 말한 이유는 한 사람의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시각으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그랬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성화를 그리면서 성서의 이야기들을 연구하고 씨름하기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저는 이 그림을 두고 묵상하면서 "카라바조의 도마가 왜 믿음에 이르지 못했을까?"를 질문했습니다. 두 가지의 이유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그림 속에 있는 도마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하는 것에 온 마음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육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믿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저 유명한 믿음의 정의,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11:1)를 생각해 보십시다. 믿음은 아직 손에 쥐어지지 않은 것을 바라는 것이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져보고 육안으로 확인하여 믿으려 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림 속에 있는 도마가 예수님의 몸에 있는 상처에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상처에서 눈을 떼고 예수님의 눈을 쳐다보았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그는 그분의 눈동자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마음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아이디안 하트(Aidian Hart)라는 현대 성상 작가(painter of sacred icons)가 그린 <도마의 의심>(Incredulity of Thomas)이라는 작품을 보면, 도마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상처에 손을 대고 있지만 눈으로는 예수님을 쳐다봅니다.
실제의 도마는 아이디안의 성화에 그려진 것에 더 가까왔을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그분의 상처를 주목하는 대신 그분의 얼굴을 마주했고, 그분의 눈동자를 응시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분의 상처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눈과 눈을 마주 보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눈빛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광채를 마음으로 느꼈을 때, 도마는 자기도 모르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저는 카라바조의 도마를 생각하면서, 아니 비운의 화가 카라바조를 생각하면서 제 기도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것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이 보게 한다.
믿음은 마음으로 볼 때 생긴다.
그러므로 카라바조여,
상처에 붙들려 있는 눈을 떼어라.
상처가 아니라 그분의 얼굴을 보라.
그분의 눈을 마주하라.
그리고 마음으로 보라.
그분의 눈동자에서
영원을 보라!
그러면 믿게 되리라.
그분 앞에 무릎 꿇고 말하게 되리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5.
예수님은 당신에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도마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9절). 이 말씀은 실은 도마에게 준 말씀이 아니라 장차 이 이야기를 읽게 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 믿으려 하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여기서 ‘보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서 믿으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런 태도로는 진정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고쳐 쓰면 이런 뜻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 믿으려 하느냐? 그래가지고는 참되게 믿을 수 없다."
참된 믿음은 마음으로 볼 때 생깁니다. 마음으로 깨달을 때 생깁니다. 육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다 해도 마음으로 보지 못하면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 있는 도마가 그러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눈은 멀어 있는데,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조사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나에 대해 마음으로 깨달아 알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실은 ‘마음으로 본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누구도 그분을 육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 즉 마음으로 깨달아 알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믿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과 같이 읽은 마가복음 8:11-13은 이런 맥락에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즉,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표징을 보여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믿겠소."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고 합니다. 이 탄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육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확인하기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천지가 두 쪽 나는 기적을 보여 주어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마음의 눈이 닫혀 있는 한, 아무 표징도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징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그가 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그의 행적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그분을 마음으로 만난다면, 그분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볼만한 표징이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표징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멀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그들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믿지 못하겠다. 는 마음은 많은 경우 ‘믿지 않겠다. 는 마음에서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서 "믿고 싶은데 이 의문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얼른 보면 그런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 속이는 일입니다. 많은 경우, 그들이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그 깊은 무의식까지 파고 들어가 보면, 믿지 않으려는 마음의 결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변화될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믿을 경우, 이제까지 즐기던 것들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더 분명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믿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저는 지난 두 주일 동안 도마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진지한 구도적인 마음으로 질문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에 이르도록 돕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질문이 진지한 구도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질문은 자기의 명석함을 드러내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어떤 질문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 깊은 고집을 위장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런 질문에 속으면 온전한 믿음에 이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불신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불신을 조장하게 됩니다. 의문의 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 못 대처하게 되면, 의문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필요한 것은 의문이 아니라 참된 믿음에 대한 열망입니다. 지금의 나만으로는 안 된다는 자각, 육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자각, 내 인생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각, 뭔가 나 아닌 다른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는 진정한 해결책이 없다는 자각, 그 존재에게 맞닥뜨려 내 인생의 진로가 거꾸로 뒤집히더라도 그것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자각, 그리고 이 모든 자각에서 나오는 거룩한 열망, 그 어떤 변화와 희생이 있더라도 참되고 영원한 존재를 만나야 하겠다는 열망, 바로 이 열망이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아무리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아무리 많은 시간 토론을 해도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참된 구도자는 이 열망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씀을 읽습니다. 무릎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대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눈을 응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구도자는 이 열망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분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구도자는 이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기도를 통해 영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구합니다. 그것이 그분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참된 구도자는 이 열망을 가지고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에 참여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곧 주님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참된 구도자는 이 열망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형제자매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곧 주님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참된 구도자도 때로 의문을 만납니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육안으로 증거를 찾고, 손가락으로 증거를 헤집어 보기도 합니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하고 연구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믿음에 이를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아이디안 하트의 성상에 나오는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대고 눈으로 주님을 응시한 것처럼, 참된 구도자는 의문하고 질문하며 토론하고 추구하는 동시에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말씀 묵상으로, 기도로, 예배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로 주님의 눈동자를 응시합니다. 그럴 때, 그 눈동자 속에서 영원의 언덕을 발견하게 되고, "당신은 진실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고백만이 우리를 주님이 계신 영원의 언덕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열망하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이 마음을 주소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에게 사로잡히고
주님을 위해 사용되고 싶어 하는
그 간절한 열망을 주소서.
그 열망으로 진리를 보게 하시고
그 열망으로 주님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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