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appy birthday to us! 와싱톤한인교회의 57회 생일을 감사하며 또한 축하합니다. 지난 57년 동안 우리 교회를 눈동자처럼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또한 눈물겨운 헌신을 바쳐 오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57년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 ‘길잡이가 되는 교회’로서 자리매김 해 온 역사의 흐름 속에 제가 서 있다고 생각하면, 거룩한 전율을 느낍니다. 이제는 흑백 사진 속에 그 모습을 남기고 사라진, 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을 기억합니다. 57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뿌린 땀과 눈물과 기도를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께서 이루어 오신 생명의 기적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하여 오늘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서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눈물겨운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또한 그 영예로운 역사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우리 교회에는 40년 혹은 50년 이상 교회를 지키고 있는 분들이 여럿입니다. 이민 교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일입니다. 보통 이민교회에서는 10년 동안 교회를 지켰다고 하면 "와!" 라고 감탄할 수준입니다. 실은, 한 교회가 10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성장해 가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10년 정도 다닌 분들은 비교적 새 교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교회는 새로 오는 교우들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오래 다닌 분들의 ‘저력’과 새로 오신 분들의 ‘활력’이 합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칫, 전통과 역사만을 자랑하다 보면 썩은 고목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다 보면, 불안할 수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뿌리를 땅 속 깊이 그리고 널리 내리고, 위로는 새로운 가지를 끊임없이 내 뻗어 생명력을 발산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까지도 그렇게 해 왔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름답고 귀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날로 새로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에 보면 흥미로워 보이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와 여섯 명의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수고했지만 날이 샐 때까지 아무 것도 못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배의 오른 쪽에 그물을 내려 보라고 말씀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 가득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1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잡힌 물고기가 ‘큰 고기’였다는 사실, 그 물고기의 수가 백쉰세 마리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고기가 그물 안에 담겨 있었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세 가지 사실이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 백쉰세 마리가 마치 생선 시장에서 하나하나 골라 뽑은 것처럼 굵직한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그물을 내린 곳은 양어장이 아닙니다. 디베랴 호수 즉 갈릴리 호수입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 호수에 그물을 내리면 온갖 종류와 모양과 크기의 물고기들이 잡힙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려 작은 물고기는 다시 호수에 던져 넣고 큰 고기만 그릇에 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같이 팔뚝만한 물고기들만이 들어찼습니다. 일평생 어부로 일해도 이런 이변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잡힌 물고기의 수가 백쉰세 마리였다고 적어 놓은 것도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왜 저자는 굳이 그 수를 적어 놓았을까?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잡힌 물고기 수가 백쉰세 마리였으니까 그렇게 적었겠지요!" 그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백쉰셋이라는 수가 정확하게 전해지고 복음서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한복음을 보면, 저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에만 장소나 시간 혹은 숫자를 밝힙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백쉰셋이라는 수에는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 숨겨진 의미가 무엇일까? 지난 2천년 동안 성서학자들이 이 비밀을 풀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 ‘시몬 요나’(바요나 시몬)의 스펠링을 수로 환산하면 153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로마자 알파벳처럼 수 값을 가지고 있는데, 시몬에 해당하는 알파벳의 수 값을 합치면 118이고, 요나에 해당하는 알파벳의 수 값을 합치면 35라는 겁니다. 118 더하기 35는 153입니다.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문제는 별다른 의미나 교훈을 찾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53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것도 신기해 보입니다만, 그 의미도 알 수 없고, 이렇게 복잡한 산수를 의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을 의도했다 한들, 그것을 깨달아 알만한 수학 천재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있었겠습니까?
3.
이것과는 달리, 신빙성 있어 보이는 제안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가장 탁월한 성서학자 중 하나였던 오리겐(Origen)이 제안한 것인데, 예수님 당시 알려져 있던 물고기의 종류가 모두 백쉰세 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다면, 백쉰셋이라는 수는 ‘모든 종류를 포함함’ 혹은 ‘온전함’(completeness) 혹은 ‘충만함’(fullness)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해석이 제일 사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백쉰세 마리를 담고 있는 그물은 마땅히 담아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교회 혹은 마땅히 담아야 할 것을 모두 담고 있는 인생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명령하시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하기 전까지 그들의 그물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 개인의 인생도 빈 그물이었고, 그들의 공동체도 빈 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 속에 오시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들의 그물은 이 세상의 모든 물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때,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 갈 때, 필요한 모든 것으로 그 인생이 채워질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일오삼 볼펜’을 아시는지요? 한국 문구 산업의 개척자인 모나미 볼펜 말입니다. 하얀 몸통에 검은 펜 끝, 단순하지만 결코 질리지 않는 그 볼펜 말입니다. 이 볼펜에는 예외 없이 153이라는 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왜 153이라는 수를 여기에 새겨 놓았는지, 추측도 많고, 가설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과 오와 삼을 더하면 아홉 즉 화투판에서 큰돈을 딸 수 있는 갑오 자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가설은 모나미 볼펜의 최초 가격 15원과 출시된 첫 해 1963년의 3자를 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데 있습니다. 모나미 기업의 회장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그분이 요한복음 21장 11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업에 임하면 마치 제자들이 백쉰세 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성공하리라는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유사한 믿음으로 인해 153을 기업의 이름으로 삼은 경우도 많습니다. 한국에도 많고, 미국에도 많습니다. 기업의 이름에 이 수를 넣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업에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탓할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망할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혹시나 이 수가 부적처럼 사용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있습니다. 가게의 이름에 ‘일오삼’을 써 놓았다고 해서 뭔가 행운이 따라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백쉰셋의 교훈은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상생활 안으로 모셔 들이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만났지만, 그 만남은 그들의 일상생활에 아직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영적인 체험으로만 마음에 간직하고, 갈릴리 호수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고기를 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고생하고 얻은 것은 빈 그물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밤새 수고하고 났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찾아오십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 현장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4.
부활하신 주님, 그분은 예배하는 곳에만 임하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리에서만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 공부하는 곳에만 나타나시는 분도, 부흥회나 수양회에만 나타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땀 흘려 일하는 자리에도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는 그곳에도, 고층 건물을 짓는 공사장에도,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무실에도 오고 싶어 하십니다. 대통령 선거를 논의하는 대책 회의실에도, 내가 일하는 주방에도 오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일하는 세탁소에도, 델리 가게에도, 자동차 정비소에도 오기를 바라십니다.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그분의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그물을 가득 차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작은 가게의 주인인 내 삶을 팔뚝만한 물고기들로 가득 채워주시기 위해서, 사업가로서의 내 삶을 큰 물고기로 가득 채워 주고 싶으셔서, 변호사로서의 내 삶의 그물을 가득 채워 주고 싶으셔서, 비록 큰 기업의 말단 사원이지만 내 삶의 그물을 찢어질듯 가득 채워주고 싶어서 그러십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기도의 골방에서만 찾지 말고,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분은 내 삶의 그물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이것이 백쉰셋의 교훈입니다.
이 말을 곡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의 사업에 끌어 들이면, 주님께서 우리의 은행 계좌를 가득 채워 주실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식 투기에 예수님을 끌어 들이면 새로 사는 주식마다 값이 치솟고 파는 주식마다 팔자마자 곤두박질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끌어 들이자마자 옆 가게로 가던 손님들이 우리 가게로 몰려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의 가정에, 직장에, 일상생활에 끌어 들이면, 그로 인해 만사형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직업 현장에 모셔 들이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물질적인 성공이 주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바가 아니요, 우리가 추구할 바도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의 일상생활에 함께 하실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목격하는 순간, 잡았던 고기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거부가 되기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의 인생의 그물을 가득 채워주실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물질의 충만을 기대하지 않고, 의미의 충만, 보람의 충만, 기쁨의 충만을 기대했습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베드로는 그 이후로 죽음을 당할 때까지 물질적으로 궁핍하게 살았으나, 그의 인생은 그 무엇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그물은 어떻습니까? 혹시 물질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물질로 가득 채운 줄 알았는데, 이번 경제 위기로 인해 그물코가 갑자기 늘어나서, 잡았다고 생각했던 물질이 술술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밤 새워 수고하고 힘 써 보았으나, 빈 그물만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래 가지고야 앞으로의 생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아닙니까? 모든 것이 휘청거리고 흔들리는 이 시기에 과연 무엇을 잡아야 안전할지,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5.
부활하신 주님을 삶의 현장에 모셔 들이십시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처럼, 사업은 자기 마음대로 해 가면서 "주님, 제 사업을 축복해주옵소서"라고 비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을 삶의 현장에 모셔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늘 주님과 영적으로 사귐을 나누면서, 매사를 결정하고 행할 때마다 주님과 상의하며 그분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것이 그분을 삶의 현장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리라는 곳에 그물을 내리고, 그분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그물에 의미가, 보람이, 그리고 기쁨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의 그물이 가득 차게 되면, 물질에 대해서는 자족하는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사업을 하시는 교우에게 "요즈음 어떠신가요?"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예, 편안합니다."라고 답하십니다. 그래서 "참 다행입니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 말씀이, "저도 어렵지요. 매출이 많이 줄어서 적자가 심해요. 하지만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편하니, 다 괜찮아 보인다는 거지요"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 그 마음이면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 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전 세계적인 공황(global depression)이 올지 모른다는 경고 앞에서 얼마나 흔들리십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게 느껴지는 요즈음 아닙니까?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모셔 들이는 것, 그래서 늘 대화하며 사귀는 것, 매사를 결정하며 행할 때 그분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흔들리는 우리의 터전을 바로 잡는 일이며, 앞으로의 위기를 위해 준비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경제적인 위기를 영적인 기회로 반전시키는 힘입니다.
이 진리는 교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령 충만, 진리 충만,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우리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또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뜻을 묻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물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교회의 모든 영역에 주인이 되시면, 교회에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이 가득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을 논의하고 결정할 때, 부활하신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생각에만 의존하면 빈 그물을 건져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그물 가득 무엇인가를 잡아 올렸다 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쓸 모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부족함 없이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지식의 한계, 경험의 한계,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없다면, 그 교회는 별 희망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인적 자원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없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재들이 교회 요소요소에 들어가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재들이 합하여 만들어 내는 결과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크십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영역에 부활의 주님이 주인 되게 하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인간적으로 계산하고 예측하고 기대한 것에 비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볼 것입니다.
6.
다시 한 번, 57주년의 생일을 자축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앞으로도 더욱 와싱톤한인교회를 잡으셔서 주님의 큰 역사를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 속한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우리 교회를 통해 끊임없는 영적 성장을 이루시고, 그로 인해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생명의 역사가 줄기차게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의미 깊은 날에 백쉰셋의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각자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여, 그분과 함께 사귀며,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우리의 삶의 그물이 기쁨과 의미와 보람으로 가득 차오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더욱 주님을 섬기며 순종함으로 인간의 계산과 예측을 넘어서는 놀라운 이적을 목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절망과 낙심과 회의가 가득하던 베드로와 여섯 제자의 마음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은 백쉰셋의 이적이 부활의 주님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일터에 오시는 주님,
우리의 교회에 오시는 주님,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
우리와 함께 의논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 일상에 주님을 모셔 들여
우리의 그물이 차고 넘치게 하소서.
주님을 저희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순종하여
우리 교회의 그물이 차고 넘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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