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잡혀야 산다" (요한복음 21:18-25)

새벽지기1 2017. 2. 13. 13:05


1.

 

제가 자신에게 가장 아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악기를 하나도 다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타를 조금 치는데, 기껏해야 코드 20개 정도를 가지고 치는 것이니, 실은 기타를 다룬다고 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피아노 앞에서 마음껏 손을 놀리며 연주하는 분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대학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마음껏 연주할만한 악기가 하나쯤 있었을 텐데, 저는 그 때 "악기를 새로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 저의 아쉬움이 동생에게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막내 동생이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였습니다. 저는 그 동생에게,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레슨비를 대 줄 테니, 뭐든 악기를 하나 배워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에게는 아무런 의지가 없었습니다. 하기 싫다는 겁니다. 저는, "너, 나중에 후회할 거다"라면서 타이르고 강권했지만, 끝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동생이 대학교에 진학한 후, 언젠가 제 앞에서 "아, 나도 악기를 하나쯤 연주할 수 있었으면…"하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보며,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할 때는 안 하겠다더니, 이제서 그런 말을 하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니, 형님,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 싶었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배우게 했어야지요.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듣습니까?" 저는 ‘어쩌면 이럴 수 있나?’ 싶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 지금 다리몽둥이 부러지고 싶냐?’

 

다행히 그 동생은 저처럼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대학 때부터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지금 그 동생은 ‘클라리넷 부는 엔지니어’로 불리며,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입니다. 뚜렷한 취미를 하나 가지고 때때로 그것에 전념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나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나 참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제 동생이 제게 한 말을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다리몽둥이 부러뜨려서라도 배우게 했었어야지요.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듣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린 아이에게는 분별력이 없으므로 그의 뜻을 모두 받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달라고 보채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의 안내와 손길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간섭과 강제와 압력이 너무 커서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로 인해 아이들이 어릴 때 상처를 입습니다. 부모들은 이 문제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놓아두어서도 안 됩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방치해 두면, 결과는 뻔합니다.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푹신한 카우치에 앉아 하루 종일 게임에 빠져 영혼과 정신과 육신을 모두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른들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분할 분별력과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력이 있습니까? 어른들에게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결정하여 나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경우를 질문하기에 앞서, 나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과연 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책임질만한 능력이 내게 있습니까? 나는 내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고 있으며, 그 목적과 의미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는 대로 행할 수 있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어른이 되면 누구나 그런 능력을 얻게 됩니까?


한국에서는 영화의 관람 등급을 매길 때 미국과 다른 표현을 씁니다. 미국 영화의 R(Restricted) 등급에 해당하는 것을 한국에서는 ‘성인용’이라고 부릅니다. 인터넷에서 매우 질이 좋지 않은 영상물을 보려면 소위 ‘성인 인증’이라는 것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TV Guide를 보면, 케이블 TV에서 방영되는 음란물을 소개하면서 Mature Adult only라는 문구를 써 놓았습니다. 저는 이 표현들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과연 이 같은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성인’인가? 그들이 과연 mature adult인가? 오히려 나이는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영상을 찾는 것 아닙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mature한 것이 아니라 immature한 것 아닙니까?

 

인간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해 나갈 수 있으며,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이고 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고, 그렇게 하여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은 과연 옳습니까? 지난 3백 년 동안의 인류의 투쟁은 인간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얻고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고, 그 투쟁과 희생의 결과로 인해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만, 과연 인간은 지금 제 스스로 서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과거보다 더 행복해졌으며 더 큰 의미와 보람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과연 인간성에 대한 이 무한대의 낙관주의는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입니까?

 

3.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진정으로 성인이 되고 mature adult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진실로 독립성과 자주성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어 그의 사랑을 회복시켜 주신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떼를 먹이라고 부탁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얼른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말씀의 뜻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교회 전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즈음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달려 순교 당했습니다. 따라서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복음을 위해 당할 여러 가지의 박해를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의 죽음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베드로의 삶의 방식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앞으로의 인생이 자신의 뜻과 의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뜻과 의지로 인해 결정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말씀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첫 번째의 그 따름은 가야바의 법정에서 참혹하게 실패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두 번째로 불러내십니다. 심하게 깨어졌다가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된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분별력과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 갑니다. 그 전까지 베드로는 제 스스로 인생의 길을 개척해 나갔지만, 이제는 주님을 앞세우고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주님께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끌려 다니는 것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손을 통해 나를 이끄시고 밀어내시며 깨뜨리시고 빚으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묶어서 내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어진다면 순순히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때로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 자신이 하찮게 취급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손에 이끌릴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부름을 받고는 이렇게 살아가는 일에 성공합니다. 첫 번째 부름을 받고 나섰을 때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름을 받고 나섰을 때는 그 어떤 환난과 박해도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끌려 다니기도 하고, 투옥되기도 했으며, 도피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손길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죽음도 그의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그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자신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4.

 

예수님은 돌아기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당시로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믿었던 자기 자신에 철저하게 절망하고 나서 그는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자신의 생각이 진리인 것처럼, 자신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처럼, 자신의 의지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고 뒤 따라간다는 말은 자기 인생의 주인 됨을 포기하고 주님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셔 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나를 참되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을 찾는 것입니다. 내 의지를 믿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점점 작아져 ‘제로’(0)가 되고, 주님은 점점 커져서 100이 되는 지경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이 영성 생활의 목표입니다.


영성 생활을 통해서 경험하는 놀라운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면, 내가 없는 인생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나는 제로가 되고 주님이 100이 되면, 나는 껍데기가 되고 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마음 가득 주님을 모시고 산 영적 거인들의 글을 보더라도 그렇고, 아주 초보적인 저 자신의 경험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상하게도, 나 자신을 부인하고 그 자리에 주님이 자리 잡는 자리가 커질수록, 나는 진짜 내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주님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내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충동과 감정으로만 살다 보면, 자신이 껍데기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거짓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그 자아를 부정하면 나 자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그것에 집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참 자아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참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우리의 참 자아는 점점 성장하게 되고, "진실로 내가 내가 되었도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영성의 신비입니다.

 

현대인들이 막연히 공유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무한정의 낙관주의가 얼마나 성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요? 인간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요 환상입니다. 단지 어린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mature adult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실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 근본적인 성격에서 ‘피조물’(created beings)이기 때문입니다. ‘지어진 존재’는 그 존재를 ‘지으신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의 손에 내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행복과 성공의 길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인생을 맡기고 나서 그가 완전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 이후에도 실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의탁하고 난 다음, 수많은 고초와 박해와 손해와 아픔을 당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해야 했고,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님께 인생을 맡기고 나서 잘 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면서 진실로 행복했고, 그렇게 죽어서 영원에 이르렀습니다.

 

5.

 

오늘 본문에 흥미로운 대목이 또 하나 나옵니다. 이 대화를 나눌 때, 예수님과 베드로는 해변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 요한이 저 뒤에서 따라 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베드로는 갑자기 요한의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자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였지만, 예수님과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제자는 요한이었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고난과 박해와 순교로 이어질 것이라면, 요한도 마찬가지인지, 베드로에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혹시나, 특별히 아끼는 제자이니, 예수님이 요한에게는 자신의 것과 다른 특별한 미래를 준비해 두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종의 경쟁심이 보이지 않습니까? 혹시나 요한이 자기보다 더 좋은 미래를 얻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심사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 심정을 예수님이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3절을 보니, 이 말씀이 와전되어 제자 요한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을 거라는 헛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베드로에게는 일찍 순교 당하는 몫이 주어지고 요한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는 몫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에 신경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의 미래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고난과 박해와 손해와 순교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그것이 베드로의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용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 때 베드로가 가장 행복할 것이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을 외진 곳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믿는 사람들을 지도하며 조용히 살다가 여생을 마치도록 인도하신다면, 그것이 요한의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용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 때 요한이 가장 행복할 것이고, 요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은사와 소명과 운명에 대해 관심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나는 내 소명에 충실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이끌어 주시는 길에는 더 좋고 더 나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손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는 목사로 인도해 주시든, 누구는 선교사로 인도해 주시며, 또 어떤 사람은 직업인으로 살며 평신도 사역자로 일하게 해 주시든, 그것에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불러주신 그 길에서 어떻게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누구는 부자로 만드시고, 누구는 가난하게 만드셨다고 하여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는 신유의 은사를 주고, 누구에게는 섬김의 은사를 주셨다고 하여,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른 몫을 주시며, 다른 부름을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은 몫이 무엇인지를 따져 묻고, 내 몫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을 불신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진실로 신실한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은사와 소명과 운명에 감사하고,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소명과 운명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 잡혀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6.

 

"잡혀야 산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생명의 복음의 결론입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에 잡히는 것, 그것이 진실로 사는 길입니다. 이 결론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을 찾아 오셨다. 그분과 일대일로 대면하라.
2.그분이 당신에게 주신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취하라.
3.자신에게서 희망을 찾지 말고 주님께 당신의 인생을 맡기라.
4.그분에게 사로잡혀 그의 뒤를 따르는 제자로 매일을 살라.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이용도 목사님의 기도시를 한 편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에 부흥사로 혹은 기독교 교육가로 뜨거운 삶을 살다가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일기에 남긴 기도시 한 편에서 이용도 목사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공’에 비유하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주님이 놀리시는 대로 노는 공입니다.
나는 공을 봅니다.
줄을 매단 공.
아이가 줄을 당기면 오고, 늦추어 보내면 가는 그 공을 봅니다.
그 공은 나요, 그 주인은 주님이었습니다.

주여, 사랑의 줄로 나를 매시옵소서.
그리고 맘대로 주께서 놀리시옵소서.
나의 운동은
그것이 나의 운동이 아니라,
주의 팔이 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팔을 움츠려 끈을 당기시면
나는 주의 앞으로 따라 들어올 것이요,
팔을 펴서 끈을 풀으시면
나는 또 굴러 나갈 것입니다.

주의 팔이 움직이는 대로 들고 나고 구르고 노는 공입니다.
눈도 귀도 입도 팔다리도 다 없는,
그저 둥근 공입니다.
나의 눈도 버리고, 귀도 잘라 버리고, 수족도 버리고,
전체가 구르기 쉽게만 되어지게 하소서.
내가 그것들을 갖고 있으면
구르기에 거리낄 것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보는 것 대신 보아 주시고,
나대신 들어 주시고,
내가 움직이는 대신 주께서 움직이실 것이니,
내 귀와 눈과 입과 코와 손과 발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곧 주의 눈이 내 눈이요,
주의 귀가 내 귀입니다.
내 눈은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를 통해서만 보고,
주를 통해서만 듣고,
주를 통해서만 걷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