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요한복음 20:24-29; 사도행전 17:10-12)

새벽지기1 2017. 1. 31. 12:36

  

1.

 

2002년 여름, 저는 미국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수양회 KOSTA 집회에 세미나를 인도하기 위해 참석했습니다. 그 때, 오래 전에 제가 가르쳤던 제자를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조장을 맡고 있던 그 제자는 제게, 어느 날이든 좋으니 자신이 속해 있는 조에 와서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셋째 날인가, 저녁 집회를 마치고 기숙사 라운지에서 그 조에 속한 청년들과 둘러앉았습니다.

 

서먹한 분위기가 조금씩 벗겨지면서 마음속에 품어 두었던 질문이 하나씩 기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꽤 조심스럽게, 별로 특별하지 않은 질문을 꺼내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심각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꼭 정답을 주겠다는 집착 없이,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고, 그들처럼 질문하고 고민하고 탐색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질문을 대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했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가능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밤이 깊어졌습니다.

 

"내일 일정에 지장이 있을 수 있으니, 오늘은 이만 하고 흩어집시다."라고 조장이 말하자,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서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그 중 한 청년이 소파에 눌러 앉은 채, 뚜렷한 표적도 없는 넋두리를 털어놓습니다. 그 표정이 하도 심각했고 또한 그가 한 말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그 말을 거의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교회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거죠? 왜 다른 목사님들도 목사님처럼 못하실까요? 저는 오늘 오래된 답답함이 다 풀린 느낌이에요!"

 

그 청년의 말뿐 아니라 그의 인상도 그 때 제게 뚜렷하게 새겨졌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가끔 그의 말이 제 뇌리에서 메아리 쳤고, 그 청년의 인상이 기억이 났습니다. 저 자신도 억압적이고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한국 교회의 영적 분위기에 대해 안타까이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는 믿음이 성장하지도, 성숙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저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2.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약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교우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는데, 우리 교회 교우가 아닌 어느 여자 분이 아이를 안고 반가이 인사를 합니다. 그 당장에 저는 그분이 2002년 코스타에서 만났던 그 자매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매는 학위를 마치고 이 지역에 직장을 잡아 이사를 했고, 그 날 우연히 우리 교회를 찾았다가 3년 전의 만남을 기억하고 제게 반갑게 인사를 한 것입니다. 그 때로부터 그 자매는 우리 교회를 나오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장수은 자매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영상으로 그분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장수은 자매 이야기)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녔는데, 제가 자라면서 다닌 교회는 질문과 탐구보다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편이었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곤 했지만. 늘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친구들이 제 신앙에 도전을 해올 때,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아니 저 자신 또한 납득할 수 있는 말로 대답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 제게 어떤 도전을 해올 때마다 저는 무척 흔들렸습니다. 하나님과 제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이런 것들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믿음을 길러가는 분위기가 교회에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제 자신이 보기에도 미지근한 믿음 생활을 지속해 오다가, 대학원 시절에 KOSTA 라는, 주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기독교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큰 수양회에 참가했습니다. 이 수양회는, 참가자들 중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소그룹으로 묶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세미나와 설교를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소그룹 모임을 갖게 됩니다. 제가 속한 소그룹에 저와 비슷한, 비교적 젊은 아줌마들이 예닐곱 명 모여 있었습니다. 나이는 서로 비슷했지만 참으로 성격도 다르고 걸어온 배경도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또 한 분은 신학교를 다니셨고 우리 그룹의 조장으로서 팀 멤버들을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 분이 은사 목사님이라면서 한 젊은 목사님을 초빙하여 우리 그룹에서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찬성했는데, 사실 저는 별로 기대감이 없었습니다. 저의 지난 경험에 따르면 제가 의심이 나고 어려워하는 문제들을 시원하게 풀어주거나, 그렇게는 못하더라고 진지하게 들어주기라도 하는 목사님을 만나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말을 하거나 어려운 질문을 하면 이것을 도전이라 생각하시고 방어적으로 대처하기 급급해 하는 분위기에서 자라왔습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을 만나더라도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기는 싫어서 아예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 질문이 생겨도 무조건 믿자고 생각한지 오래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믿음이 제대로 자랄 리 없었습니다.

 

우리 그룹은 저녁을 먹고 그 젊은 목사님을 맞이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저녁, 자세히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 것은 그 모임이 밤늦게까지, 아마도 새벽 2시 넘어 까지 진행이 되었고, 질문하고 답하는 것이 너무나 흥미진진했습니다. 밤이 너무 깊어져 어쩔 수 없이 모임이 파하게 되자, 저는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한 일 주일, 그 목사님을 붙들어 놓고 대화 모임을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당시 뉴저지에서 목회를 하신다는 그 목사님은 우리들의 여러 가지 질문들을 진지하게 들으시고 차분차분히 그리고 너무도 시원스럽게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대답이 시원했던 이유는 정답을 말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믿음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와 똑 같이 고민하며 의문을 가지고 힘겹게 씨름한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하고도 겸손히 우리가 던지는 질문들을 다 들어주시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믿음이 없다" 하고 책망할 소지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사실 제가 갖고 있었던 의심과 고민들은 믿지 않겠다는 나쁜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더 잘 믿고 싶은데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 대화로 인해 저는 마치 오래된 체증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유의 직설적인 말로, 이런 제 기분을 말씀드렸습니다. "왜 다른 목사님들도 목사님처럼 못하실까요? 저는 오늘 오래된 답답함이 다 풀린 느낌이에요!"

 

그 해 KOSTA는 여러 이유로 참으로 독특한 경험으로 제게 남아 있었고, 그 날 저녁 목사님과 이야기 나눈 경험이 특별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그런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는 교회에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저는 이곳 워싱턴 지방으로 직장을 잡아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며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즈음에 한 친구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자신의 부모님이 이 근처에 사시는데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부모님을 방문하러 왔으니,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에서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만나자고 한 교회가 워싱턴 감리교회였는데, 저는 와싱톤한인교회로 잘못 알아듣고 우리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 날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는 만나지 못했는데, 대신 다른 분을 만났습니다.

 

유아 예배 실에서 남편과 아이와 앉아서 예배드리는데 설교 시간이 되어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는 저도 모르게 남편에게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자기야! 나 저 목사님 아는데! 내가 KOSTA에서 만난 그 목사님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김영봉 목사님이 우리 교회로 오신지 6개월 정도 되신 때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와싱톤한인교회에 등록하게 된 사연입니다.

 

3.

 

말씀을 부탁하고 보니, 저에 대한 선전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싶어서 공개하기를 조금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공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겠다 싶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기꺼이 응해 주신 장수은 자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그동안 믿어 오시면서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성경 말씀에 대해 혹은 기독교의 여러 교리에 대해 의문이 생길 때, 여러분은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교회 안에서 그런 의문을 털어 놓았을 때, 다른 교우들로부터 혹은 목회자로부터 어떤 반응을 받으셨습니까? 참으로 불행한 것은 그런 의문들을 아무 두려움 없이 묻고 토론한 수 있는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는 무조건, 의문 없이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는 헛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의문을 제기하고 토를 다는 것은 시험에 빠진 것이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는 미신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득세하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비판 없이, 아무 의문 없이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알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좋은 두뇌를 십분 활용하며 생활하다가는 교회에만 들어오면 두뇌의 회전을 멈추어 버립니다. 믿음의 영역 밖에서는 이성을 사용하다가도 믿음의 문턱 앞에 서면 이성을 내려놓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의문을 거두고는 눈 질끈 감고 "아멘!"을 외칩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아무 데서나 아멘을 외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 시간에 "아멘"이라는 반응이 꽤 드문 편입니다. 예배마다 약간씩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교회는 참 냉랭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분들이 적습니다. 교우들 중에는 이 분위기가 고쳐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이 외치는 "아멘"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둘 중 어느 한 편이 옳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마다 달라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즉석에서 "아멘!"으로 응답해야 직성이 풀리고,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 수긍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설교를 듣고 한 참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예배 시간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집에 가서 그 날의 설교를 되새기면서 혼자서 "아멘"하고 응답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설교 중에 말끝마다 아멘을 외치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좀 있습니다. 언젠가 아멘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단에 서서 첫 마디를 마쳤는데, 온 교우가 일제히 "아멘!"하고 합창을 하는데,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내가 지금 사이비 종교 집회에 와 있나?’라는 생각에 말문을 잇기 어려웠습니다. 한 시간 내내 말끝마다 터져 나오는 아멘 소리와 싸우느라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맹신자들을 키우는 일입니다. 진실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납득이 되어 마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아멘입니다. 저 자신도 아멘을 많이,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때로 마음에서 진심으로 동감이 될 때는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아멘!"하고 응답하는 것은 좋은 신앙의 습관입니다.

 

4.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떠받치는 네 가지 기둥이 있다고 했습니다. 중심에 하나의 기둥이 서 있고, 그 둘레로 세 개의 기둥이 서 있습니다. 중심에 서 있는 기둥은 성경입니다. 나머지 세 개의 기둥은 성경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인데, 첫째는 경험이고, 둘째는 전통이며, 셋째는 이성입니다. 이성이 믿음을 받쳐주는 기둥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이성을 믿음의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매우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이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성을 경시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성을 의식적으로 도외시하지 않는다면, 이성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믿음의 기초를 닦고 진보시키는 데 있어 얼마나 유익한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면서 이성을 믿음의 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발언입니다.

 

하지만 웨슬리 목사님은 이성에 대해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을 절대 진리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한 군데 더 인용합니다. "이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성 자체가 하도록 놔두십시오.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성을 활용하십시오. 그러나 이성은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전달하는 데는 전혀 무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성은 참된 미덕이나 행복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오직 보다 높은 근원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만 미덕과 행복을 구하고 받으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이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진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이 계시된 진리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진리가 우리의 이성보다 큽니다. 우리의 이성이 그것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아주 유용한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여 질문하고 탐구하고 대답해 나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이 알며 더 돈독하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한 구도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질문하고 또 질문합니다. 그냥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연구하며 좋은 책들을 통해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모여 연구하고 묻고 대답하고 토론하며 기도합니다. 속회가 그런 일을 하자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이 알고 더 돈독히 실천하게 됩니다. 그렇게 믿어 갈 때,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바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이성은 아주 유용한 도구입니다.

 

5.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과 함께 사도행전 17장을 읽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베뢰아라는 도시로 갔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베뢰아는 그리스 반도에 있던 도시였는데,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비교적 진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도시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베뢰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기꺼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11).

 

여기에 몇 가지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꺼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진리에 대해 활짝 열려 있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라는 말입니다. 무턱대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일단 받아들인 다음, 그것이 사실인지 어떤지를 확인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셋째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이 만일 진실이라면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성경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열심히 기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이성을 통해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은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이 많이 생겼다." 그렇게, 성경말씀을 두고 기도하며 질문하고 탐구하고 토론한 결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과 탐구는 그들을 견고한 믿음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렇게 믿었기에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왜 믿는지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12절 후반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또 지체가 높은 그리스 여자들과 남자들 가운데서도 믿게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리스 사람들도 유대인들의 연구와 토론에 함께 참여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믿게 되었다는 뜻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후자가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질문과 질문, 연구와 연구, 토론과 토론을 거쳐서 진리를 확인하고 믿게 된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베뢰아의 그리스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믿게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저는 도마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진실한 구도자의 마음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더 온전히 믿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품고, 지금 현재 믿어지는 것과 믿어지지 않는 것을 정직하게 분별하고, 믿어지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기 위해 질문하고 연구하며 기도하고 씨름하는 구도자의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같은 구도적인 마음으로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면, 나 자신이 견고한 믿음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의 믿음을 설명해 줄 수도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의 유대인들에게도 그 같은 구도자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진리를 배우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뭔가 집히는 것이 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해 힘썼고,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 그들의 인생을 그 진리에 걸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발견한 구원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민첩했고 또한 능했습니다.

 

6.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의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믿는다고 믿었지만 별다른 영적 성장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수 없이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었지만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여전히 부실한 이유, 우리의 믿음이 감정의 변화에 따라 널을 뛰듯 하는 이유, 수 십 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서도 이단 교설을 듣고 쉽게 흔들리는 이유, 이미 받은 은혜가 많건만 더 큰 은혜를 찾아 이리 저러 휩쓸려 다니는 이유, 우리의 믿음이 교회 안에서는 뜨거워 보이지만 교회 밖 삶의 현장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 믿음이 좋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입도 뻥긋 하지 못하는 이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도전 앞에서 믿음의 기초까지 무참히 흔들리는 이유?이 모든 이유들이 우리에게 구도심이 부족하다는 원인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 의문 없이 무조건 믿는 믿음, 아무 비판 없이 맹종하는 믿음, 그 어떤 말에도 우선 "아멘!" 부터 하고 보는 믿음, 시간과 노력을 드려 말씀을 읽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믿음, 그저 눈 감고 부르짖으며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한 순간에 천지가 개벽하기만을 기대하는 믿음, 이성을 억압하고 감정에만 사로잡혀 살아가려는 믿음?바로 그런 믿음의 경향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이토록 부실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할 능력이 없으며, 교회로부터 거룩한 진리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든든한 기초 위에 세위기 위해, 우리의 믿음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설득력 있는 믿음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교회가 진리의 전당이 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이 세상의 빛으로 또한 소금으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구도심의 회복이 가장 절실하다 싶습니다. 그래서 베뢰아의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그 진지한 구도의 영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정신으로는 부단히 질문하고 탐구하며, 육신으로는 부지런히 섬기고 헌신하는 삶을 통해 우리 모두가 진실하고 온전한 믿음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진리의 주님,

주님에게 있었던 진리의 영을

저희에게 주소서.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경험하기를,

복음의 진리를 더 온전히 이해하기를,

주님의 가르침을 더 참되게 알기를,

간절히 열망하게 하시고

또한 그렇게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