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그날이 오면>

새벽지기1 2017. 1. 4. 07:23


설교집 <그날이 오면> 머리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살아야 할 목사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치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현실이 놓여 있습니다. 한 개인인 목사의 인식과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하나이고, 우주론적 지평에서 존재론적으로 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가 지고가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설교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설교자는 이런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설교자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자에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화하는 것으로 설교의 책임을 감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청중에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서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더 나아가서 목회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설교의 특징은 적용이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강단에 예화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텍스트는 변죽을 울리는 차원에 머물러 버리고 청중들의 종교적 반응이 설교행위를 총체적으로 지배합니다. 오늘의 대중 설교자들과 그들을 흉내 내고 있는 수많은 젊은 설교자들의 설교가 한결같이 이런 방식입니다.


저는 이제 한국교회의 설교가 근본적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소위 패러다임 쉬프트를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청중으로부터 성서텍스트로의 회심입니다. 청중을 성서텍스트와 만나게 하는 게 중요한데, 어떻게 성서텍스트에만 집중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서텍스트가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 자연히 청중과의 만남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의 영적 촉수는 청중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청중들의 흥미를 끌 수 없다는 걱정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청중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으로 감동된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느냐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예언자들의 신탁(神託)과 동일한 경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끄럽지만 위와 같은 자세로 샘터교회에서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저의 설교를 여기 묶어냅니다.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행한 52편의 설교인데,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 첫 주일부터 그 끝인 창조절 열셋째 주일까지입니다. 52편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데도 모두 묶은 이유는 교회력을 살리고 싶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일공동예배에서 교회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교회력을 무시하고 있다는 건 설교자 자신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영성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편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교회력을 벗어나 설교자 구미에 맞는 성서본문에 치우치는 것 역시 영적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닐는지요. 제가 도움을 받은 교회력의 성구집은 김종렬 목사님이 엮으신 <예배와 강단>입니다. 이 <예배와 강단>은 현재 세계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회 등 영어권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개정판 공동 성구집>을 따른다고 합니다. 매 설교 앞에 올린 성서본문은 <공동번역 개정판>이고, 설교 내용 중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 등은 주로 <표준새번역>을 참조했습니다.
교정을 꼼꼼하게 봐 주신 홍종석 님께 감사드립니다. 전남정 님은 편집 계획으로부터 출판에 이르는 전반적인 일들을 도맡아 수고해주셨습니다. 저의 설교를 매주일 직접 들었던 샘터교회 교우들이야말로 이 설교모음집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그 이외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모두에게 두루 감사드립니다.
이 책이 설교 사역의 외로운 길에 나서서 고투하고 있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작은 등불의 역할이나마 감당했으면 합니다. 성령이여, 저희를 도우소서!

2008년 6월 10일
환성산 아래 동네 하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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