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설교의 절망과 희망>

새벽지기1 2017. 1. 4. 07:22


설교비평집 <설교의 절망과 희망> 머리글

헬라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푸스는 신의 노여움을 받아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고 올라가는 징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힘들여 바위를 정상까지 끌어올린 그 순간에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다시 바위와 씨름해야 할 시지푸스의 운명에서 까뮈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았다.


필자의 생각에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목사의 운명도 시지푸스의 그것과 같다. 말씀의 심연으로 몰입되는 황홀한 경험도 주어지지만, 동시에 한 발작 잘못 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내몰리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목사는 다시 말씀을 붙들고 끝없는 순례의 길을 가야하니, 그의 실존을 어찌 부조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씀 앞에서의 아득함과 청중 앞에서의 막막함은 아는 사람만이 알리라.


우리 설교자를 절대 고독으로, 거꾸로 절대 자유로 몰아가는 설교는 도대체 뭔가?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 사건을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할 설교자의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우리가 짊어지기에는 설교라는 짐이 너무 무겁지 않은가? 진리의 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당장 질식하고 말지 않겠는가?


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월간지 <기독교사상>의 지면을 통해서 설교비평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썼다. 각각의 설교자들에게 서로 다른 평가를 내렸지만, 거기서 필자가 전하려고 한 것은 바로 위의 질문들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같은 시대에 설교자로 부름 받은 말씀의 동지들과 함께 바로 이런 화두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는 말이다. 거기서 필자가 얻은 대답은 설교가 곧 설교자들에게 절망이며, 동시에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절망을 경험한 사람만이 새로운 세계로부터 비추는 희망의 빛에 눈을 돌릴 것이며, 이 희망에서만 절망이 더 이상 우리 설교자의 영혼에 상처를 내지 못하리라.  


앞서 나온 설교비평 1권과 2권에는 각각 열네 분씩의 설교자가 다루어졌고, 여기 3권으로 묶여 나오는 이 책에는 열 한분이 다루어졌다. 2007년 2월부터 12월까지 <기독교 사상>에 쓴 것이다. 부록으로 필자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 실렸다는 게 특징이다. 반론을 주신 분들은 김영봉, 민영진, 박영선, 송기득, 조헌정, 이렇게 다섯 분이시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반론들이 있었지만, 직접 설교비평의 대상이 되셨던 분들의 글 중에서 <기독교 사상>에 게재된 것만 추렸다. 물론 이 글들이 모두 본격적인 반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글이 쓰인 동기도 조금씩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독자들께서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서 옥고를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위의 다섯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제 필자는 혼자 떠난 긴 여행을 끝낸 기분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시행착오로 인해서 아쉽지만, 솔직하게는 홀가분하다. 그 여행에서 만났던 많은 분들이 내 기억에 여전히 생생하다. 추억은 모두 아름답다 하는데, 모든 만남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 여행을 잘 마칠 수 있도록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도와준 분들도 많다.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겠지만, 두루두루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08년 부활절에
환성산 아랫동네 하양에서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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