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길, 또는 지평?
신학의 자리인 하나님의 존재, 또는 그의 계시와 인간 인식의 변증법적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 작용의 힘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힘을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그렇게 명확하게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이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도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체로, 인간을 객체로 설정하고, 또는 그 반대로 설정한 채 그 사이에 성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주객도식(Subjekt-Objekt-Schema)에 머물러 있는 입장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을 객체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를 엄밀하게 대치시킴으로써 객체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근대이후에는 더 이상 이런 주객도식의 구도는 설득력을 잃었다.
더구나 이런 사물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해야 하는 신학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객체가 아니고 단지 인간의 주관적 의식 안에서만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런 식의 실존주의적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학으로 끌어내릴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주객도식보다 훨씬 문제가 많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신론과 계시론에 연관된 많은 문제들을 더 이상 다룰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주관과 객관 의식이나 그런 개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하나님이 신학의 주제이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여전히 신학의 중심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인식 작용은 곧 인간의 사유능력에 달려 있다. 그 사유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점은 또 다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이런 인간의 사유 활동이 없다면 신학은 무의미하다. 사람에 따라서 신학은 인간의 이성 작용이라 할 사유보다는 성서가 강조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철학은 당연히 이성의 사유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인간의 영적인 활동이라 할 신앙이라고 말이다. 교리사적인 점에서 볼 때 이성과 믿음의 관계는 교부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제기된 문제이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믿음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람도 없으며, 그렇다고 이성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람은 없다. 일단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될 것 같다. 기독교의 복음이 믿을 만하다는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 신학자들은 이성적으로 사유해야만 한다. 다른 논리는 접어두고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사유활동을 부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인간의 사유 능력이 곧 인간적 특징을 드러낸다는 말은 일단 옳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일단’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고고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호모 에렉투스’가 인간 종의 특성에서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첫 특성이 뇌의 발달로 인한 사유능력에 있는 것 같지만 이 뇌의 발달 자체가 직립 보행의 결과로 얻어졌다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호모 에렉투스는 2백만년 전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 조상으로부터 최초로 분리되어 ‘직립 보행’을 성취한 인류 조상을 일컫는 용어이다.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조상이 살던 아프리카의 지리적 변화로 인해 초원 지역에서 진화를 거듭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에 직립으로 보행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뇌의 양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보행에서 자유롭게 된 팔과 손이 도구를 생산해낼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또한 직립으로 인해서 성대가 발달했다는 것도 역시 인간의 언어발달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런 고고학적 해명에 따라서 인간의 사유 능력이 추후적인 특성이라는 점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사유의 능력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인간 특성임에 틀림없다. 현재 인간은 이 사유의 능력을 통해서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그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단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 또는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에 머무는 인간의 심리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존재론적 깊이를 담지하고 있는 영적인 힘이다. 그래서 사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의 범주만이 아니라 선험적인(apriori) 세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런 사유의 특성을 가리켜 ‘사유의 길’, 또는 ‘사유의 지평’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사유는 길을 간다. 사유는 지평을 연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서 진리의 길을 가며, 진리의 지평으로 개입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유는 인간이 가야 할 길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이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새로운 세계와 그 지평에 도달하게 한다. ‘사유의 길’을 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길’이라는 메타포이다. (강의안 <신학입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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