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칭의론은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 (4)

새벽지기1 2016. 12. 28. 06:53


3. 칭의와 성화는 연합되었으면서도 구별된다.


김 교수는 전통적인 칭의론에 대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적인 대안을 찾는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선후 관계로 설정함으로 구원파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대응책으로 칭의와 성화를 다시 하나로 묶는 해석학적인 틀을 제시하였다. 곧 칭의와 성화는 동일한 특성과 의미를 띠며 이미(already)와 아직도(not-yet)의 종말론적인 구조 속에서 같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의 현재적인 단계이며, 칭의의 완성은 성화의 열매에 따라 심판 받는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같은 책, 78-80.
“바울은 이와 같이 칭의의 언어와 성화의 언어를 동의어로 쓰며 구원의 세 단계(과거, 현재, 미래)의 전 과정에 공희 적용됩니다. 칭의 다음에 성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같은 실재를 말하는 다른 그림언어들(metaphors)입니다.” 같은 책, 180.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 교수의 이런 주장은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종교개혁의 구원론과 어떤 면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구조에서도 칼빈이 강조했듯이 칭의와 성화는 한순간도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합되어 신자의 삶 전 과정에 병행된다. 칼빈의 가르침에 의하면, 처음 그리스도와 연합했을 때(구원의 과거) 신자는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동시에 받으며, 계속 칭의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화(회개)의 열매를 맺으며(구원의 현재), 마지막에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심판대 앞에 서며 그의 부실한 성화의 열매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구원의 미래).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전 과정(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함께 진행된다. 이런 면에서 김 교수의 견해와 개혁 구원론의 입장은 일치한다.


그럼에도 두 입장이 갈라서는 지점은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는가 아니면 구별하는가의 문제이다. 김 교수는 “바울의 ‘성화’ 언어의 사용법들은 칭의의 사용법과 일치하며”, 둘 다 신약 구원론의 세 측면, 즉 이미 구원받았음, 구원받고 있음, 마지막 구원받을 것의 삼층 구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180
곧 “성화의 과거는 칭의의 과거, 즉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기/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와 같고, 성화의 현재는 칭의의 현재, 즉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며 살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칭의의 현재를 의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규정하듯이(갈5:22-23, 빌1:1), 마찬가지로 성화의 현재도 의의 열매 맺는 삶으로 규정합니다(롬6:19, 22); 살전3:12-13<사랑의 증가>; 4:3-8). 앞서 인용한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는 성화에 관한 데살로니가전서 3:13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바울이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는 칭의를 말할 때 쓰는 문장 형식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롬 5:8-10; 8:32-34; 고전 1:6-9, 빌 1:10, 11; 2:15).” 같은 책, 180.

김 교수는 구원의 과거적 단계는 칭의이고 구원의 현재적인 단계는 성화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구원론은 바울의 관점과 언어 사용법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지적이다. 김 교수의 주장은 칭의와 성화를 2단계로 분리하는 통상적인 오류가 교정되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구원의 과거는 칭의이며 그 현재적인 면은 성화라는 도식은 바울의 가르침뿐 아니라 칼빈의 관점과도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가 연합하여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병행된다는 칼빈의 입장에서도 구원의 과거는 칭의 뿐만이 아니라 성화도 포함한다. 칼빈은 바울의 논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또한 성화는 현재 진행형이며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성화의 전 과정에 칭의가 병행되기에 구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칭의와 성화로 구성되어있다.


김 교수의 그런 지적이 타당함에도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칭의와 성화를 일방적으로 동일시한 나머지 그 둘을 구별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신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 교수도 칭의와 성화의 개념적인 차이를 인정했다. 칭의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가 제거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법정적인 뉘앙스를 더 강하게 나타내는 반면”, 성화는 죄의 오염과 지배에서 자유하여 하나님께 성별되는 “제의적 뉘앙스가 더 강하게 나타내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같은 책, 181.


그래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는 유대주의자들에 맛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칭의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였다고 했다. 그에 반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는 헬라인들의 우상숭배와 음행 등의 더러운 행위에 대응하여 구원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 하나님께 성별되는 성화의 언어를 자주 사용하여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의 언어가 많이 사용된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에도 칭의가 다분히 암시되어있으며, 칭의의 범주가 주로 등장하는 로마서에서도 성화의 언어가 틈틈이 삽입되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롬6:19-22절에는 칭의의 언어(불법, 의의 열매)와 성화의 언어(부정, 거룩함의 열매)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두 언어가 죄의 “불법성에 초점을 맞추는가, 아니면 그것의 부정성에 초점을 맞추는가에만 차이를 갖는 동의어들이라”고 하였다. 같은 책, 186.


김 교수는 칭의와 성화가 특성상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계속 인정하면서도 그 구별성을 논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칼빈처럼 칭의와 성화의 연합된 구조 뿐 아니라 구별된 특성도 조화롭게 이해하는 것이 구원은혜의 다양한 측면을 더 부요하고 풍성하게 드러내는 성경적인 관점을 더 잘 포착한 것이라고 본다. 성경은 구원을 구속, 새 창조, 중생, 연합, 칭의, 성화 등 다양한 개념과 범주로 묘사한다. 그 중에서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법정적인 면과 갱신적인 측면의 절묘한 짝을 이루는 이란성 쌍둥이 개념으로 등장한다. 김 교수가 지적했듯이 성경에서 칭의와 성화의 언어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병행되어 사용되며(롬5:1-5, 8:1-2, 29-30, 고전1:30, 6:11, 딛3:5),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항상 법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의로움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예도 존재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칭의를 논함에 있어 의롭다는 용어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예가 지배적이다(롬 3:20,24,26,28; 4:2, 5; 5:1,9,18; 6:7; 8:30,33; 고전 6:11; 갈 2:16,17; 3:8,11,24; 딛 3:7).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한 의와 의롭다 하심을 뜻하는 디크 계열의 헬라어(δικαιοω, δικαιοσ, δικαιοσυνη, δικαιωμα)는 강한 법정적인 뉘앙스를 띠었다. 구약에서도 의롭게 하다(히츠디크)는 동사가 히필형(또는 피엘형)으로 사용되어 재판에서 의롭다고 판결한다는 뜻을 전달한다(출 23:7, 신 25:1, 왕상8:32, 역하6:23, 욥 27:5, 잠 17:25, 사5:23, 렘3:11). 비슷한 맥락에서 바울도 의롭게 하다(δικαιοω)는 단어를 의롭다고 인정하다 혹은 간주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대다수의 성경학자들도 그 동사를 법적인 선언을 뜻한다고 본다. 인간의 불의함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하나님의 의의 출현을 서술한 로마서 1:16-3:26의 문맥에서 이 단어의 사법적이고 법정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자신 안에 의가 전혀 없는 자들을 값없이 의롭다고 한다(롬3:22-25). 여기서 의롭다는 단어는 의롭다고 인정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로마서 4장에 ‘여기다(λογι?ζομαι)’라는 동사가 의(δικαιοσυνη)와 함께 자주 사용되어(4:3, 5, 6, 9, 11, 22) 이런 법정적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부각한다. 따라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은 불의한 자를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개혁신학에서는 칭의는 죄책과 그에 대한 정죄와 진노가 제거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법적인 선언인 동시에 신분적인 변화로 정의한다. 반면에 성화는 죄의 오염과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성별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칼빈과 개혁주의 입장은 칭의와 성화가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전 과정에서 긴밀하게 연합하여 병행된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동일성과 함께 그 초점과 특성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의미적인 구별성을 강조한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으로서 우리의 체험에서는 비록 동시적이며 구별되지 않지만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는 연결성을 – 는 구별성을 뜻한다.

구원의 과거적 측면: 칭의 ± 성화(결정적 성화)
구원의 현재적 측면: 칭의 ± 성화(점진적 성화)
구원의 미래적 측면: 칭의 ± 성화(최종적 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