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칭의론은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 (3)

새벽지기1 2016. 12. 26. 15:39


2. 개혁주의 칭의론은 칭의와 성화를 2단계로 분리하는가?


김세윤 교수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전파되는 구원파적인 메시지가 전통적인 칭의론 자체가 안고 있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칭의와 성화를 구조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교리는 결국 성화의 열매 없이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구원파적인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이 대다수 한국 목사들이 가르치는 왜곡된 칭의론, 성화와 분리된 칭의론, 의로운 삶을 낳기는커녕 도리어 방해하는 칭의론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의 구원의 서정의 틀의 한계입니다.” 『칭의와 성화』, 81.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복음이 구원파적인 메시지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지적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런 잘못된 칭의론이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라고 진단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칭의론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같은 책, 79-81.


이번 세미나에서 본인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있기에 부득불 김 교수의 그런 비판이 과연 타당한지를 살펴볼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칭의와 성화』 라는 책에서 김 교수가 계속 지적하는 전통적인 칭의론의 문제는 칭의와 성화가 2단계 식으로 분리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런 가르침에 따르면, 결국 성화의 열매가 없이도 칭의로만 구원받는다는 구원파와 유사한 논리적인 귀결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것이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교리가 안고 있는 한계라고 지적했다. “‘칭의’를 믿는 자 된 순간부터 현재를 거쳐 최후의 심판 때까지의 구원의 전 과정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론에 의거하여 믿는 자 된 순간에만 적용하고, 그 후에 성화가 있는 것으로 논하면, 칭의의 현재적인 과정(전통적인 신학이 말하는 ‘성화’의 과정)이 등한시됩니다. 그러면 윤리(의로운 삶)가 없는 칭의론이 되고 맙니다.” 같은 책, 190.

김 교수가 지적한 대로 많은 이들이 구원의 서정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에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여 받고, 성화의 의미와 가치는 기껏해야 죽은 후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필자도 그런 설교를 들으며 교회생활을 했다. 그런 가르침에 의하면, 칭의론이 성화의 열매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이 보장되는 방종의 라이선스로 오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 교리를 피상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지 결단코 그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아니다. 


구원의 서정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를 따른 것이다.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논리적으로 구별한 것이며, 이 모든 국면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엮어져 있으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전통교리의 기본 전제이다. 이 교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사역의 다각적인 면을 신학적으로 조명함으로써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지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적인 틀을 제공한 것이다.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는 개혁신학자들은 칼빈과 함께 모두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구원 서정의 교리 자체가 칭의와 성화를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구원의 서정이 자주 이런 식으로 곡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리 자체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