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돈목사

칭의론은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 (5)

새벽지기1 2016. 12. 29. 07:00


4. 칭의는 성화에 근거하지 않는다. 

 
칼빈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칭의론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가 바로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통합해버린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여 혼동하므로 불러온 문제는 구원을 교회의 예식에 종속시킨 제도적인 구원론, 연옥설, 면죄부뿐만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심각하게 위태롭게 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된 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드려지고 인정받는다면 누가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가 있겠는가.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큼 의롭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 땅위에서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의롭고 거룩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게 될 뿐이다. 우리가 더 거룩해질수록, 하나님의 빛에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 자신의 부패함을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의식이다.


따라서 칼빈이 강조한 오직 믿음(sola fide)은 믿기 전 우리의 의로움 뿐 아니라 믿은 후 우리의 의로움까지 배제한다. 이 칭의의 선물은 믿은 후 우리가 은혜로 이룬 성화의 열매에 조금도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안의 모든 의로움(성화를 포함한)을 배제하고 오직 우리 밖의 의로움에 초점을 맞춘다. 믿음은 오직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붙잡는 손이다. 칭의의 선물이 타자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영 단번(once and for all)에 주어진 순전한 선물이기에 우리의 의로움(성화)에 따라 변개되거나 회수되지 않는다. 우리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칭의가 하나님의 법적인 판결이며 관계회복이라는 의미라면, 우리가 제대로 의롭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한 번 내리신 의롭다는 판결을 취소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인 우리를 내치고, 신부로 맞은 우리를 버리시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신학적인 귀결이다.  


김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칭의는 법정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김 교수가 전통적인 칭의론이 근래까지 칭의의 관계적인 의미를 무시해왔다고 했는데, 칼빈은 칭의론을 다루는 서두에서부터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하나님이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Institutes, 3.11.1. 칭의 복음의 요점은 바로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화목하게 한다는 단어는 의심의 여지없이 바로 ‘의롭게 한다’라는 의미인 것이다”고 했다. 같은 책, 3.11.4.


개혁신학자들이 칭의론을 다룸에 있어 주안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이다. 많은 개혁신학자들은 칭의의 적극적인 면으로 양자됨과 영생의 권리까지 포함시켰다. 참고: 안토니 후크마, 류호준 역, 『개혁주의 구원론』(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303.
칭의가 의미하는 관계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기쁨의 대상인 의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변한 것이다. 하나님께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탕자처럼 하늘 아버지의 거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나아갈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로움으로 획득한 권리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얻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칭의의 선물은 하나님이 자신을 내어주심, 즉 자기증여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선물로 내어주셨다. 아들과 함께 성령을 선물로 보내셨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져 삼위하나님과 교제와 화평을 누리게 하셨다. 비록 신자가 연약하여 죄에 빠지고 영적으로 침체했을 때도 이 선물은 변함없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럴 때일수록 신자에게 이 선물, 즉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는 은혜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신자는 연약하여 자주 쓰러진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루라도 회개가 필요 없는 날을 맞이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성화는 사실 실패를 통한 성숙의 과정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변화된다. 칼빈처럼 칭의를 성화에 의해 변개될 수 없는 선물로 이해할 때 칭의는 성화 과정에서 자주 넘어지는 연약한 신자들이 계속 재기할 수 있는 영적 회복의 견고한 바탕을 제공한다. 값없이 주어진 칭의의 선물을 누림에서 감사와 확신과 자유와 담대함을 갖게 되며 이것이 참된 경건의 원동력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여 혼합하면 칭의뿐 아니라 성화도 위태로워진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그렇게 되면 칭의가 우리 밖의 의로움에 근거해서 영 단번에 주어진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이라는 특성이 흐려지며 이 선물을 누림에서 오는 감사와 확신, 자유와 담대함이 사라지게 된다. 대신에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큼 자신이 실제 의롭게 되고 거룩해졌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서 오는 불안감과 칭의의 은혜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얻어내려는 헛된 수고와 칭의의 은혜와 자신의 경건을 교환하려고 율법주의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경건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부각시킴으로 확신과 감사와 자유를 앗아가는 불안한 성화의 기반을 허물고 진정한 성화가 진행될 수 있는 견고한 은혜의 반석을 새로 깐 것이다.


요약하면, 칼빈의 공헌은 칭의의 선물적인 특성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고 칭의를 성화에 근거시키지 않으면서도 성화를 구원의 구성요소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따르면, 성화 없는 구원은 없다. 그러나 성화는 칭의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다. 성화는 칭의의 공로적인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지만 칭의의 필연적인 열매이다. 성화가 칭의를 확립하지는 못하지만 칭의가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