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우리를 점점 진실하게 하고, 투명하게 하며, 선하고 의롭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주일 예배에서 내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혹은 유흥장에서 거짓과 위선과 탐욕과 악행을 일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공적 예배’(public worship)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드리는 ‘삶의 예배’(worship of daily living)로 연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공적 예배가 진정으로 살아있다면, 그 예배에서 받은 은혜는 삶의 예배로 흘러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에만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에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공적 예배’입니다. ‘삶의 예배’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전 10:31)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Practicing the Presence of God)을 쓴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부엌에서 계란을 부칠 때나 수사들의 옷을 다림질 할 때도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이어지지 않는 ‘공적 예배’는 우상 숭배일 가능성이 큽니다. 소설 <도가니>에 나오는 이강석 장로와 이강복 장로는 주일마다 ‘영광중앙신당’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들이 바치는 십일조와 헌금은 ‘복채’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욕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긴, 그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없는 ‘공적 예배’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같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
다시는 헛된 재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놓고 못된 짓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는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1:11, 13, 15-17)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뿐 아니라, 예레미야를, 에스겔을, 호세아를, 미가를, 아모스를 통하여 이와 동일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영광제일교회가 이미 수 천 년 전에 이스라엘에 있었고, 이강복 장로와 이강석 장로가 그 옛날 이스라엘에도 적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공적 예배가 속속들이 썩어 있었고, 그로 인해 예배자들의 삶도 악취가 날 정도로 썩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만 예배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의 예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의 예배로 인해 역겹다고 하십니다.
Robert Schnaze 감독이 제안한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Five Practices of Fruitful Congregation)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는 extravagant generosity ‘후한 인심’, 즉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은사를 넉넉히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radical hospitality인데, 저는 이것을 ‘따뜻한 관심’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마음의 화로’와 같이 우리 자신을 녹이고 다른 사람의 추위까지 녹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Schnaze 감독이 꼽은, 열매 맺는 교회의 세 번째 습관은 passionate worship입니다. 직역하면 ‘열정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이것을 ‘영감있는 예배’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토저(A. W. Tozer)는 “인간은 누구나 예배자다”라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예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습니다. ‘예배하다’라는 말은 그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무엇인가의 가치를 느끼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worship이라는 말이 worth-ship에서 왔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무엇인가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재확인하지 않으면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공적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분의 가치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공적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창조주 하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오늘 우리 중에서 활동하시는 성령, 그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분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를 경험하고 선포하고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배 중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한 시간 만큼은 그동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에게, 그분의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에, 그분의 사랑에, 그분의 섭리에, 그분의 미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매 번 이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가장 먼저 목사인 저 자신에게 하는 말씀입니다만, 다른 일로 예배를 돕는 분들도 마찬가지이고, 그냥 예배에 참여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이끄는 사람이나 돕는 사람이나 참여하는 사람이 모두 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예배를 준비하고 행해야만, 예배가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철저히 준비되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마음 다해 참여해야 합니다. 마치, 이 예배가 내 생애 마지막 예배인 듯, 예배 때마다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감있는 예배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한 번이라도, 시간과 장소를 망각하고 예배에 푹 빠져 본 일이 있습니까?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영감 있는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영감있는 공적 예배를 드리고 영적 세계에 눈을 뜨고 나면, 삶의 현장으로 나와도 계속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영감있는 공적 예배를 드리고 난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에 전과 다르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공적 예배를 드리면서 만났던 그 하나님이 내 가정에도, 내 직장에도, 내 차 안에도, 내가 가는 골프장에도, 유흥장에도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동일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그분이 기뻐할 일을 찾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우리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적 예배에 나오는 회수가 많아지면서, 배우자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자녀들을 혹은 부모님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공적 예배를 드리는 년수가 많아지면서, 직장에서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에 얼마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며 일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까? 나는 더 진실해지고 있으며, 더 투명해지고 있으며, 더 따뜻해지고 있습니까? 말버릇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 돈 씀씀이에 바람직한 변화가 생겼습니까? 시기심과 질투심이 약해지고 있습니까?
오늘 성서 일과를 따라 시편 24편을 읽었습니다. 이 시편은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지은 시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자는 먼저 예배당에만 갇혀 있지 않은 하나님,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류의 역사와 기도자 개인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
분명히 주님께서 그 기초를
바다를 정복하여 세우셨고,
강을 정복하여 단단히 세우셨구나. (1-2절)
이렇게 고백한 다음, 기도자는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3절)
이 질문은 “누가 공적 예배에 참석할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예배자는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이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기도자는 스스로 제기한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깨끗한 손과 해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을 찾는 사람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4-6절)
영감있는 공적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 눈을 뜬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어디에서나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과 함께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 않고,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그분께 의지하여 그분의 뜻을 찾아 살아가기를 힘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맑으며,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적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통해 기뻐하시고, 그같은 예배자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도자는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외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뉘시냐?
만군의 주님,
그분이야말로 영광의 왕이시다. (9-10절)
여기서 ‘문들’은 예루살렘 도시의 성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그 영원하신 왕을 모셔 들이고 예배하기 위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로 모여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마음에 모셔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적 예배를 마치고 일상 생활로 돌아가서도 계속 예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이아나 배스(Diana Butler Bass)가 지은 <Christianity for the Rest of Us>라는 책에 보면, 애리조나에 있는 Scottsdale Congregational 교회 담임목사인 Eric Elnes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어느 여름, 오레곤에서 study leave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호수 근처에 앉아서 “도대체 예배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호수를 응시하며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배스(bass) 즉 농어가 한 마리 지나갑니다. 평생 그렇게 큰 배스는 처음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큰 물고기가 물결을 만들어 내면서 에릭 목사 근처를 지나갈 때, 그는 그만 그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경외심과 경이감에 사로잡혔고,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그 때, 에릭 목사의 마음에 선명한 깨달음이 잡혔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주일 아침 한 시간을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네가 경험한 그것, ¼초, 그 짧은 순간, 경이감에 젖게 하고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자신을 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면 된다.”(p. 173) 나중에 에릭 목사는 인터뷰에서 예배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술회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은 제가 오레곤의 그 선창 끝에 앉아 있던 것처럼 마음을 열고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호숫가로 배스가 지나갈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 갈 때, 당신은 그것에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p. 174)
그렇습니다. 공적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마치 호숫가에서 잔잔한 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마음을 다해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피상적으로 볼 때는 예배 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지만, 우리는 성령께서 예배 중에 특별한 방법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예배에 전념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우리 중에 움직이고 계시다는 증거가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물고기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움직임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고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면 틀림없이 그분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¼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일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 예배 중에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조용히 묵상할 때, 마음에 성령의 터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전심으로 찬송할 때, 마음이 녹아지며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헌금을 드릴 때, “너는 내 것이라!”는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기도 드릴 때, 불현듯 성령께서 내 숨겨진 아픔을 아신다는 자각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항복합니다. 마음을 모아 설교에 집중할 때, 번개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임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실로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눈 팔지 말고 집중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요 4:23) 예배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성령의 임재가 보이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경이로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히고, 자신을 잊고 하나님에게 몰두하게 됩니다. 우리의 공적 예배가 이렇게 살아날 때, 우리는 공적 예배를 마치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서 계속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일에만 예배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예배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Sunday Christian이 아니라 24/7 Christian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영감 있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그 무엇보다도 공적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주일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이며, 예배드리는 동안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배가 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나를 진실로 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영감 있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예배자를 복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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