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밖으로 나오자 유대인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해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습니다. 예수의 의도가 그들의 기대와 다른 것이 드러나자, 그들은 예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나귀 새끼를 타신 왕이 아니라 백마를 탄 전사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섬기는 왕보다는 하늘 높이까지 솟아올라 군림하는 왕을 원했습니다.
1.
나귀 새끼를 타신 왕,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왕, 무력과 금력으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왕, 백성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백성을 살리려는 왕?나사렛 예수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이 높아지기를 꿈꾸고 더 커지기를 열망하며 더 오래 살기를 바라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지만, 나귀를 타신 왕 예수님은 낮아지기를 꿈꾸고 더 많은 것을 내어 주기를 힘쓰고 당신의 생명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영토를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사람들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왕을 원하겠습니까? 얼마 전 취임한 조국의 새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기독교인이다 보니, 권력은 섬기기 위한 도구라는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이 앞으로 그리 할지 어떨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만, 어쨌든 방향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든, 임금이든, 회사 사장이든, 장관이든, 심지어는 작은 가게의 주인이든, 거대한 직장의 말단 사원이든, 모든 자리는 섬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왕이 백성을 섬기는 자세로 다스리겠다고 말했다면, 그 왕이야말로 진짜입니다. 그런 왕이야말로 환영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 군중들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빌라도가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이오?"(요 19:15)라고 말했을 때, "우리에게는 [로마]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섬기는 왕을 더 좋아할 것 같지만, 실은 군림하는 왕을 더 좋아한다는 뜻 아닙니까? 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왕은 별 매력이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며 영토 확장을 향한 야심을 끝없이 불태우며 그 영광을 찬란하게 빛내는 영웅을 사람들은 더 좋아합니다. 인류 역사 상, 대중들이 열광했던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신무장하고 백마를 타고 전 세계를 제패하겠다고 깃발을 들고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대중은 생명을 초개와 같이 바쳤습니다. 반면,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안녕을 위해 세심히 살피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며 섬기는 지도자들은 별로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2천년 전 총독 관저 광장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우리라면 군중들과 달리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 같은 왕이 마음에 들지 썩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의 왕이 새끼 나귀를 타고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점에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 더 강력하고 화려하기를 바랍니다. 예수같이 무력하고 매력 없는 왕을 모시고 사느니, 차라리 로마 황제를 왕으로 모시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가까운지요?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 유대인들, 정말 나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유대민족에 대한 적개심을 쌓아 올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난 2천년 동안 유대 후손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어 왔는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의 예수의 원수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마음 안에 있던 비틀린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한국인이든, 영국인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2.
예수님이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비난의 화살을 다른 누구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비틀린 욕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 섬김의 왕 예수, 희생의 왕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은 누구의 마음에나 있게 마련인 뒤틀린 욕망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왜곡된 욕망을 채워줄 왕을 찾습니다. 그 오염된 욕망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한 없이 커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커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없이 높아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친구를 짓밟더라도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부리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참으로 사악한 욕망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배우자조차도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리고 싶어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뒤지느니 차라리 함께 죽는 편을 택하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비틀린 욕망입니다.
이민 생활 초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너 살고 나 살자.’고 생각한답니다. 중국인들은 ‘너 죽고 나 살자.’는 태도로 살아간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너 죽고 나 죽자.’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제일 무섭답니다. 맞는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어느 민족에게나 ‘너 죽고 나 살자.’는 심보, 정 그것이 안 되면 ‘너 죽고 나 죽자.’는 못된 심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동족들 사이에서는 ‘너 살고 나 살자’는 태도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다른 민족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인종이 아닙니다. 인간이면 그 어떤 인종이든지 간에 이같은 못된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못된 욕망, 빗나간 욕망, 사악한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친 방법으로 그것을 채우려 하고, 어떤 사람은 고상한 방법으로 그것을 채우기 위해 힘씁니다. 겉으로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면은 동일합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한 없이 커지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마음껏 부려 보고 싶고, 모두에게 앞서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그 욕망을 우리 스스로 채우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대리 만족이라도 받고 싶어 합니다. 사악한 독재자에게 군중이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욕망을 성취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일입니다. 이 욕망을 치유하는 것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생각하며 우리의 뒤틀린 욕망을 재판대 앞에 세워야 합니다. 불과 닷새 전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그 손을 흔들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그 유대 군중을 생각하며, 우리의 타락한 욕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오염된 욕망의 희생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왕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왕이 되어 다스리실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아지는 일에,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작아지는 일에, 더 많이 부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기는 일에, 그리고 나를 내어 주어 너를 살리는 일에 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오염된 욕망이 치유되기 전에는 그토록 매력 없어 보이던 어린 나귀가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처럼 보일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진실로 변화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고, 전쟁터로 변한 우리의 사회가 놀이터로 바뀌는 길도 이 길밖에 없습니다.
3.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보듯, 빌라도는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 위에 명패를 걸어 두도록 명령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 볼 수 있도록 그 명패는 세 가지 말 즉 히브리말과 그리스 말과 로마 말로 쓰여졌습니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나중에야 이것을 알고는 ‘자칭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고쳐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 걸려 있던 그 명패는 침묵으로 진리를 증언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일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왕으로 취임하는 사건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부활이 무엇인지, 승천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방도는 없습니다. 그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 교리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설픈 논리로 설명해 놓고는 믿으라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부활도, 승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도, 모두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방도도 없고, 정확하게 이해할 방도도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교리가 전하려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죽임 당하신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방식으로 활동하고 계시며,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모든 존재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들려져 영원하고 참된 왕으로서 높여지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감동적이고 심오하게 묘사한 것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그리스도 찬가’입니다.
그[예수님]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2:6-11)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 섬김과 희생의 길을 걸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 인기 없는 왕으로 배척 받고 거부당한 예수, 그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여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곳에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분이 임하는 곳에 어둠이 물러나고,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생명이 넘쳐납니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임하시면 우리의 비틀린 욕망이 치유됩니다.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처럼 그렇게 온유하게, 드러나지 않게, 표시 나지 않게, 따뜻한 햇살에 봄눈이 녹듯이, 혹은 파릇한 새싹이 언 땅을 뚫고 나오듯이, 그렇게 부드럽게 활동하십니다.
그 활동 방식은 비록 부드럽고 은밀하지만, 그 통치권은 그만큼 널리 미치고 깊이 침투해 들어갑니다. 그 은밀하고도 부드러운 통치권에 노출되면, 그 통치권은 필경 우리 존재의 모든 면에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비록 처음에는 미미해 보이고 별스럽지 않아 보일지 모릅니다만, 마치 적은 누룩이 나중에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는 것처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이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예수, 나의 왕이여!"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분의 다스림이 없이 우리 인생에는 희망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4.
무리들이 손에 들고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는 그들의 비틀린 욕망을 상징합니다. 반면, 예수님이 타고 입성하셨던 어린 나귀는 그 욕망을 치료받을 때 우리가 걷게 될 생명의 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걸으셨고 또한 우리에게 걷기를 기대하시는 섬김의 길, 낮아짐의 길, 희생의 길, 양보의 길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종려나무 가지보다는 나귀 새끼가 이 날의 의미를 상징하기에 훨씬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내년부터 이 날을 ‘나귀 주일’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예배당 입구에 어린 나귀를 한 마리 세워 두고 싶습니다. 그것으로써 이 날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교회 전통에 따라 그냥 ‘종려 주일’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종려나무 가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는 전통을 따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종려나무 가지를 통해 우리의 오염된 욕망을 볼 수만 있으면 됩니다.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손에 쥐어진 종려나무 가지를 다시금 살펴보십시다. 이것을 잘 간직하여 집으로 가지고 가셔서, 고이고이 접고 접어 십자가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비뚤어진 욕망을 접어 십자가에 못 박는 심정으로 접어서, 잘 보이는 벽에 걸어 두십시다. 그리고는, 지금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사랑의 통치를 행하고 계시는, 나귀를 타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으십시다. 그분의 통치권으로 우리의 왜곡된 욕망을 치료받고, 그분의 은밀하고도 부드러운 다스림의 손길로 우리 존재의 속속들이 치료 받게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이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의 길로 고집스럽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십시다. 나사렛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마음의 영토를 다스릴만한 참된 왕이십니다.
왕이신 주님,
봄 햇살처럼 부드러운 당신의 통치권에
저희의 전 존재를 맡깁니다.
당신의 빛을 속속들이 비추시고
샅샅이 침투하게 하여 주소서.
저희의 마음의 영토를 점령하여 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저희의 왕이 되어 주소서.
저희도 주님처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저희를 고쳐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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