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 저는 몇 년 전에 제게 일어났던 나사렛 출신의 예수와의 만남에 대해 회상했었습니다. 아, 지난 주 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분을 위해 저를 소개해야 하겠군요. 저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전편의 이야기에서 저 자신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경위로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특별히, 제가 그 사람의 눈동자에서 짧은 순간 발견했던 그 특별함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사람 예수는 제게 일어난 변화를 알았는지, 제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 진리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도전해 왔습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정복자의 나라에서 파견받은 총독으로서 제가 그 사람을 신문하고 재판하고 있었는데, 실은 그 사람이 저를 신문하고 재판하는 것 같은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도대체 진리가 뭐란 말이요?"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로 걸어가면서 저는 재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지를 궁리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기에는 꺼림찍한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아시겠지만, 저는 폭동을 진압하는 일이라면, 수 천명을 한꺼번에 십자가에 걸어 죽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을 만큼 ‘강심장’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제가 나사렛 예수의 처형 문제 때문에 이렇게 곤란을 당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제 기억에 새겨진 그의 눈빛이 저를 놓아주질 않습니다. 그의 눈동자에서 잠시 목도했던 그 영원성(eternity), 그 타계성(otherworldliness), 그 진정성(authenticity)이 저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요구를 무시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처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교권과 금권에 눈이 멀어버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골치아픈 사람들인지, 얼마나 일방적이며 독선적이며 옹고집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을 원수로 규정하고 나면, 그 결정을 뒤집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처형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물러서지 않을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가뜩이나 민심이 쉽게 불타 오를 수 있는 이 유월절에 예수 한 사람 때문에 불필요한 잡음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그 궁지에서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2.
아, 그 때, 제 명석한 두뇌가 묘안을 찾아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처형하는 일도 피하고, 유대인 군중들의 마음도 무마시킬 묘안을 찾아낸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을 요량으로 그들이 원하는 유명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곤 했습니다. 마치, 여러분의 나라에서 국경일에 특별 사면을 실행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유대인들은 한 동안 고분고분해졌고 협조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 올 해의 유월절 기념 특사로 나사렛 예수를 풀어 주겠다고 제안을 해야겠다.’ 저는 이 계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총독 관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18:39)
그들이 저의 제안을 환영하리라고 기대한 것은 제가 너무 순진한 탓이었을까요? 그들은 잠시 동안 수군 수군하더니, 대제사장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 주시오"(18:40). 저들은 이미 이번 유월절에 풀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바라바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민족의 희망이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땅에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무장 폭동을 계획했었습니다. 다행히도, 모사 단계에서 저는 그를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강도죄를 씌워 감옥에 잡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 바라바를, 유대인들이 풀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의외의 일격(blow)을 맞고 마땅히 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총독 관저 안으로 다시 들어가 다시 궁리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궁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동정심에 호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악한 일을 한 것도 아니므로, 그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동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예수를 데려다가 심하게 고문하라고 말입니다.
그 사람 예수는 묵묵히 서서 그 모든 모욕과 고문을 견뎠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채찍을 여러분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갈래의 가죽끈을 묶어 만든 것입니다. 가죽끈 끝에는 납덩이가 달려 있고, 납덩이는 살을 파고 들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병사들은 채찍을 물에 불려서 죄수의 등에 내려 칩니다. 물에 불은 가죽끈만으로도 죄수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개의 납덩이가 내려 칠때마다 죄수의 살을 파고 듭니다. 채찍을 거둘 때마다, 납덩이는 살점을 떼어 냅니다. 나사렛 예수는 그 모진 고문을 엄청난 인내력으로 받아내고 있었고, 저는 아픈 가슴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저의 병사들은 마침내 가시나무로 왕관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피로 흥건한 그의 몸에 걸쳐 놓고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소리치면서 조롱을 했습니다.
3.
저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으로 버티고 있는 그 사람을 쳐다 보면서 마음 속으로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나에게는 당신을 이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소. 혹시나 당신을 놓아 줄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 이러는 거요. 당신이 아무 죄도 없이 참혹한 아픔을 당하고 견디기 힘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 당신의 동족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싶어서 이러는 거요. 그러니 잠시만 참아 주시오. 나를 너무 탓하지 말아 주시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자주 부르는 찬양 중에 ‘Above All’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에 "당신은 짓밟힌 장미처럼 떨어지셨습니다"(like a rose, trampled on the ground you took the fall)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병사들의 고문으로 인해 그는 실로 갈기갈기 찟겨진 장미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만 하면 됐다 싶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군중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 예수를 잠시 세워 두고, 저는 그들에게로 나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내가 그 사람 나사렛 예수를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19:4) 그리고는 병사에게 눈짓하여 예수를 불러 내오게 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피범벅이 된 얼굴에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걸치고 천천히 걸어 나와 무리들 앞에 섭니다. 걸음 마다 핏빛의 발자국이 새겨집니다. 자색 옷을 걸치기는 했지만, 고문의 흔적이 선명합니다. 이 참혹한 모습이 환한 태양빛 아래 드러나자, 무리들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일순 조용해졌습니다.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여인들은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울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저의 계획이 먹히는 것 같아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저는 나사렛 예수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보시오."(19:5)
무리들 사이에 예수에 대한 동정심이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을 느끼면서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며 주저 주저 하더니, 마음을 굳게 다져 먹고는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군중 심리라는 것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것인지요! 잠시 동안 예수를 동정하는 듯하던 군중들은 대제사장들의 외침에 깨어난듯, 일제히 그들에게 동조하는 겁니다. 이번에도 상황은 제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유대 군중들의 마음을 돌이킬 방도는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초조해지고 답답해져서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정 그렇다면,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6절)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일에서 손을 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7절)
4.
나사렛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제가 그 사람에게서 느꼈던 그 특별함, 그의 눈빛에서 보았던 그 영원성, 그 타계성, 그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사람에게서 느꼈던 감정이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의 눈빛에 빨려 들어가 느꼈던 그 안식과 평안과 성취감이 그가 이 땅이 아닌 다른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일까?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냥 나사렛 출신의 한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서 보냄을 받은 신의 대리자라는 말인가?’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제게는 그것이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에게서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 착각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라면, 그가 주장한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신의 아들, 신의 대리자를 처형하는 일에 연루될 형편에 처한 것이 아닙니까? 만에 하나라도, 아니, 천만에 하나라도 그 사람이 신의 아들이라면, 저는 그 죄값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입니까?
저는 급히 예수를 끌고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연한 척하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 맞소?" 저의 절박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제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사람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이 제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더 무엇을 말하면 당신이 믿겠소?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소? 당신은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지 않소?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나라에 들어올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뿐이오. 더 늦기 전에 결단하시오."
저는 마음으로 들려오는 그 음성을 외면하기 위해 도리질을 치며 그를 다그쳤습니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10절) 아, 저는 그 때 헛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게는 예수를 처향할 권한도 있고 놓아 줄 권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유대인들의 압력 때문에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력에 대한 저의 집착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저의 권력은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5.
그러자 그 사람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습니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나를 당신에게 넘겨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이오."(11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랍니까? 그를 저에게 넘겨준 사람들 즉 유대인들의 죄가 저의 죄보다 더 크다는 말은 적잖은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요? 정확한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마치 제가 가진 총독의 권한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참모들을 불러서 이 궁지를 벗어날 묘책을 찾아 보았습니다. 하지만 유대 군중은 요지 부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제안하는 모든 제안을 하나같이 거절했습니다. 그 다양한 제안들을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놓아 주려고 하는 제 의도를 알아채고는, 마침내 저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저를 압박한 것입니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12절)
나사렛 예수를 놓아 주면, 로마 황실에 진정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황실에서야 이곳 사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 유대 지도자들이 진정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저를 문책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저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골목까지 몰렸습니다. 저는 이제 최종 결단을 해야 할 지점까지 밀렸습니다. 제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의 아들을 처형하도록 허락하느냐, 아니면 권력을 잃을 것을 감수하고 신의 아들을 지키느냐?
제가 어떤 선택을 했겠습니까? 저는 권력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저를 이런 궁지로 몰아 넣은 유대인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예수도 원망스러웠고, 대제사장들도 미웠습니다. 저는 리토스트론이라는 곳으로 예수를 데리고 나와 유대 군중에게 외쳤습니다.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14절) 그러자 그들은 성난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14절)
저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15절) 그랬더니 대제사장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15절) 저는 이 말을 듣고 저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만을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방인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대표자인 대제사장들이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겁니다. 예수를 처형하려는 집착이 그토록 심한 망발을 하게 하는 것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6.
저는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저의 병사들에게는 유대인들의 요청대로 그를 십자가 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유대 군중은 환호했고, 영문을 알지 못하는 저의 병사들은 신속하게 처형 절차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십자가 형틀 위에는 범인의 죄를 써 놓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지나 가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 죄목을 읽게 하기 위해 히브리 말과 그리스 말과 로마 말로 써 놓았습니다. 저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제게 와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한 자’라고 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더 이상 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들을 대면하는 것이 너무도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쓸 것을 썼다"(22절)고 말하고는 돌아서 버렸습니다.
얼마 후, 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저는, 혹시나 그 사람이 신의 아들이 맞다면, 십자가 위에서라도 뛰어 내려 죽음을 피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의 아들을 처형하는 일에 가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저는 속으로, ‘신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죽을 수는 없지!’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모든 느낌과 생각과 의문들이 모두 착각과 오해이기를 바랬습니다. 그 사람, 나사렛 예수는 제 손에 처형된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를 바랬습니다.
제 마음 안에서는 그 사람이 제게 한 말들이 여전히 울리고 있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느니, 나는 진리를 위해 증언하러 왔다느니,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음성을 알아 듣는다느니, 위에서 주지 않았으면 나를 어찌할 권한이 없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메아리가 되어 계속 울렸습니다. 그 말에 마음의 귀를 기우리고 있을 때면, 제가 그 사람에게서 보았던 그 특별함, 그 사람의 눈빛 속에서 보았던 그분의 영원성과 타계성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럴 때면, ‘혹시나,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었다 해도, 그가 여전히 신의 아들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마주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의문에 빠져 있을만큼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잊고 제 업무에 몰도하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 저는 점점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게 되었고, 또 다시 권력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7.
권력의 자리에서 추락한 이후, 저는 이제야 그 사람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 때 제가 내렸던 결론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었으니, 그 사람 나사렛 예수는 신의 아들일 수 없다! 그것이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로마 사람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렇게 결론 짓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로마 신화에서 ‘신의 아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 때, 당연하게 보였던 이 결론이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니 당연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의 육신을 십자가에 걸어 목숨을 끊을 수는 있었지만, 제가 그 사람의 눈동자 안에서 목도했던 그 영원성은 깨뜨릴 수는 없었겠다 싶습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면, 제가 그 사람의 목숨을 골백번 끊어 버린다 해도, 그 사람의 본질은 해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은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그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나 그 사람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저에게는 그가 아직도 살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가 과연 신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방법으로 오늘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제가 그를 죽음에 내어 주었지만, 저는 실은 그에게 아무런 해도 가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제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생각납니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11절) 그 때, 총독의 권한이면 당신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고, 제가 말했었습니다. 그 사람 예수는 저의 이 기고만장한 말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그분이 하고자 한 말씀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나를 죽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오해하지 마시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나를 어쩔 수가 없소." 제가 칼과 창으로 그의 목숨을 끊어 버린다 해도, 그를 없애 버릴 수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목숨만을 알고 있었을 뿐, 생명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목숨이 끊어져도 지속되는 참된 생명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 때, 저는 ‘아래’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사람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저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도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더랬습니다. 그 때, 저는 육신만을 알고 있었을 뿐, 영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저는 ‘가이사의 나라’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 ‘신의 나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8.
이렇게 말함으로써 제가 저의 허물을 어떻게든 덮어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저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권력을 지키려는 욕심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무고한 사람을 정치범으로 죽게 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제가 권력을 누리고 있던 몇 십년 동안 저는 그런 잘못을 수 없이 저질렀습니다. 그 죄값을 어찌 다 받을지, 그 뒷감당 생각은 전혀 없이 함부로 살아왔으니, 저는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제가 그토록 악하게 살지는 않았을 거라는 때 늦은 후회가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진실로 신의 아들이었다면, 신 앞에서 들이 댈 변명이 제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고맙게도, 복음서의 기록을 읽고, 저를 동정하고 변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사자인 제가 저의 허물을 인정합니다. 저는 분명히 그분의 초청을 들었습니다. 저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진리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그 초청을 거부했고 모르는 척 무시했습니다. 저는 가이사의 나라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초청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그를 죽음에 넘겨 주었습니다.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저는 그 지옥의 가장 낮은 자리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다시금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귀에 들리는 진리의 음성에 귀 기우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그분의 초청을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해 생각하면서, 혹시나 그가 신의 아들이 아닐까, 혹시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있지 않을까, 혹시나 목숨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지 않을까, 혹시나 황제의 권력으로도 끝장낼 수 없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을까, 질문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질문을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에게 유익한대로 결론을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이렇게, 나중에서야 진실을 깨닫고 후회하지 말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아직 돌아설 기회가 있을 때, 그분, 나사렛 예수, 제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던 그 예수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며 생각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고개를 듭니다. 예수의 육신이 걸려 있던 그 십자가는 혹시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가 아니었을까? 혹시 그 십자가는 우주의 새로운 중심이 아니었을까? 혹시 그 십자가는 진리의 나라로 향하는 표지판이 아니었을까? 혹시 그 십자가는 땅을 보지 말고 ‘위’를 보라는 신의 손가락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온 몸을 바쳐 그 나라로 가는 길을 여신 것 아닐까? 그랬기에,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갔던 것 아닐까? 그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렇게 죽음을 통과하여 참된 생명으로 나아간 것 아닐까? 그렇게 하여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여신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길이 여러분 앞에 열려 있습니다. 저처럼 너무 늦기 전에 그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보혈을 지나 그 영원한 나라로 한 걸음씩 나아가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가운데로 활짝 열린 길을 걸어 진리의 나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제게 기회가 다시 온다면, 저는 제 모든 것을 대가로 주더라도 꼭 그렇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저희의 눈을 열어 주셔서
목숨만이 아니라 생명까지 볼 수 있도록,
이 세상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까지 볼 수 있도록,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을 낳는 진통이었음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이 땅의 나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주는 희망에 속지 않게 하시고
오직 진리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희망을 보게 하소서.
진리의 음성을 들을 때,
주저함 없이 응답하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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