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28)

새벽지기1 2016. 11. 25. 07:15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오늘날 사람들은 의학의 발전으로 대부분의 사회가 이전에 겪었던 출산의 두려움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출산할 때 불행하게 죽은 여성의 수와 유아 사망의 비율이 대부분의 사회에서 현저하게 줄어든 반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이해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뜻하는 것은 오늘날 출생과 생명이 갖는 놀라운 신비를 이전 시대처럼 크게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오늘날에도 큰 위험이 따르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인간학적으로 볼 때,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이전의 삶을 떠나는 ‘경계의’ 혹은 ‘초기의’ 경험이다.


거의 모든 사회는 엄숙한 예식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기념한다. 레위기에 보면 이런 의식이 있다. 먼저는 번제로서 하나님께 아이를 전적으로 바친다는 것을 상징한다. 다음은 속건 제물로서 의식을 행할 때 뜻하지 않게 짓는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다. 이 둘은 그 어느 것도 고의로 짓는 죄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성관계가 신비스러운 것이고(에베소서 5장 31절), 아이가 ‘하나님이 주신 기업’(시편 127편 4절)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크게 즐거워할 때다, 왜냐하면 새 사람이 이 땅에 왔고, 여성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아이를 안전하게 낳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이 큰 슬픔의 원인이 되고 있다. 임신할 수 없으면 삶의 뜻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많다. 하지만 여성을 출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여성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갖는 존엄성을 해친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에는 약 25년 걸린다. 이것은 생애의 1/3 정도가 된다. 나머지 2/3는 어머니로서 아이를 기르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많은 여성은 아이를 기르면서도 사회적 활동을 하거나 경력을 쌓아간다. 게다가 어떤 여성은 스스로의 선택이나 본의 아니게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특유의 몸은 아이를 갖기에 적합하게 되어 있다.


남성에게 아이는 아무리 사랑하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의 몸의 부분이 될 수 없다. 전통적으로 남성은 아이를 소유물로 여기지만 여성은 아이를 자신의 확장으로 보고 있다.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죄를 피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가르친다,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가 가져다주는 손상과 해악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죄의 결과를 성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강조하여 모든 성적 활동이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오늘날 죄를 다룰 때 여성성 자체가 논쟁점이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죄의 개념 자체가 사회적인 필요와 성의 통제에 의한 각종 형태에 종교적 정당성을 주기 위해 남성이 고안해 낸 것으로 주장한다. 성경이 죄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고 있다고 흔히 주장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창세기 3장을 이해한다. 그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했다”(고린도후서 11장 3절)고 지적하고, 더욱 직접적으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고 말한다(디모데전서 2장 13-14절).


하지만 남성이 죄를 지을 때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은 아담의 죄를 인류의 대표일 뿐만 아니라 첫 사람의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신약성경은 죄를 전체로서의 인류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의 불순종으로 돌리고 있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