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성도들의 행동이 본받을 만하지 않다
“박해당할 때 익사하기 위하여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정절을 위협하던 자들로부터 벗어난 몇몇 경건한 여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죽은 뒤에 전체 교회로부터 순교자라고 칭송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덤을 방문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순교자로서 자살한 가장 유명한 예는 성 펠라기아였다. 그녀는 15세의 나이로 어머니 및 자매들과 함께 폭행을 피하기 위하여 몸을 내던졌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고 펠라기아의 영웅적인 행동을 찬양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감히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다. 나는 교회가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적절한 증거를 받아 그들에 대한 기억이 이런 식으로 영예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들은 인간적인 오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으며, 오류가 아니라 순종으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삼손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명하시고 그분이 명하셨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실 때, 그에 순종했다고 하여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누가 고소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말하고 있고, 주장하고 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확정지으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어느 누구든지 영원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곤경을 모면할 수단으로 고의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지난 죄 때문에 자살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자신의 죄가 회개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도록 현재의 삶을 살아갈 필요성이 더 있기 때문이다. 혹은 죽음 뒤에 올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여 자살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죽음 이후에 더 나은 삶으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27. 죄를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선택해야 하는가
“당신은 부정한 쾌락의 유혹으로 가득차 있고 온갖 끔찍스럽도록 잔인한 행동으로 날뛰며 갖가지 오류와 공포로 위협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당신의 모든 죄가 사함받은 지금 이 순간에 또다시 동일하거나 더 심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자살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극악무도한 자가 아니겠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악한 행동일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사악한 행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자살을 뒷받침하는 온당한 견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8. 적군은 하나님의 어떤 판단에 정결한 그리스도인들의 몸에다가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도록 허락받았는가?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들이여, 당신들의 정조가 적에 의하여 놀림감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인생을 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만약 당신이 당신에게 죄를 짓도록 허락받은 자들의 죄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양심 속에서 확신한다면, 당신은 크고 진정한 위로를 받고 있다. 그 이유를 당신이 묻는다면, 우리는 온 우주를 다스리며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에는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으며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연약한 자들이여, 이 이중적인 위로를 받으라. 한편으로 당신은 시련을 겪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징벌받았다. 한편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정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그런 행위를 허락했지만 어느 누구도 벌받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사실 현재 하나님의 신비한 판단 속에서 사악한 욕망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지만, 그에 대한 징벌이 최종 심판을 위하여 유보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정결한 덕목에 대하여 자만심에 부풀어있지 않다고 양심으로 확신할 수 있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최근에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오만하고 득의만만해할 정도로 어떠한 취약점을 몰래 가지고 있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육체와 영혼의 정결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유지되며, 굳건한 의지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동의 없이는 강탈 당할 수 없는 보물인 것이다. 최근의 재앙을 통하여 아마 그런 이들의 오류는 교정되었을 것이다.
29. 하나님이 적군의 흉포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불신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종들은 어떤 답을 해야 하는가
최고이며 진실하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가족은 이런 위로, 즉 속이며 불안정하며 타락적인 세상사가 결코 제공해줄 수 없는 보다 확실한 소망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위로를 갖고 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교육받고 있기 때문에 이 현생의 훈련을 거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적인 축복을 순례자처럼 대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인 불행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시험하고 교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따름이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답변은 이렇다. “나의 하나님은 어디든지, 온전히 계실 수 있다. 내가 곤경을 당하여 고통당할 때, 그는 나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시거나 나의 잘못을 벌주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내가 현재의 고통을 충성스럽게 인내하고 나면, 그 보답으로 주실 영원한 상급을 예비하고 계신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지만 하늘을 지으시며 모든 신보다 경외할’(시96:4,5)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과 논할 가치는 더더욱 없다.”
30.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불평하는 자들은 사실 수치스런 쾌락을 억제 당하지 않고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당신들이 방해받지 않고 악을 즐기며, 당신들이 고통이나 책망도 받지 않고 타락 속으로 함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들이 평화와 변영을 바라는 이유도 당신들이 겸손과 절제와 자제와 경건으로써 그런 축복들을 고귀하게 사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광기어린 방종으로 무진장 다양한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번영은 적의 온갖 분노보다도 훨씬 더 악한 도덕적인 타락을 낳고 있다.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가장 훌륭한 로마인으로 선택되었던 당신들의 대신관인 위대한 스키피오는 그 당시에 로마의 경쟁국이던 카르타고의 파괴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이 점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도시의 파멸을 제안했던 카토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는 악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사태평이 위협이라고 염려했다. 그는 건전한 두려움이 시민들에게 적절한 보호수단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카르타고가 파멸되었을 때, 분명히 로마공화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제거되었다. 그 위협이 사라지자 즉각적으로 번영으로부터 생겨난 재앙이 잇달았다. 우선 야만적인 유혈봉기에 의하여 안정이 파괴되고 분쇄되었다. 적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던 로마인들이, 그런 도덕수준이 붕괴되자 동료 시민들로부터 더 잔악한 일들을 당하게 되었다. 권력욕이 몇몇 세력가들 사이에 자리잡게 되었고, 그 결과 피곤에 지친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와도 같은 멍에 아래 짓밟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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