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어거스틴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1권, 21-25,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강의안2)

새벽지기1 2016. 7. 17. 07:29


21. 살인죄가 되지 않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 관하여

 

그렇지만 살인을 금하는 법에도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 의하여 정해진 몇몇 예외가 있다. 하나님의 권위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아주 정당하고 합리적인 권력의 근원인 국가의 법에 따라 국가의 권위를 대변하면서 범죄자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이 살인을 금하는 계명을 어겼다고 할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을 때, 잔인하다고 비난받기는커녕 헌신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칭찬받았다. 그의 행동은 범죄가 아니라 순종이었다.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집 문에서 처음 영접하는 이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에 자기 딸을 살해한 일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하더라도 타당하다(11:29). 또 삼손이 집을 무너뜨림으로써 적들과 함께 압사당했을 때, 그의 행위는 그를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신 성령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은밀하게 명령하셨다는 이유만으로도 정당화된다(16:28). 따라서 일반적으로 정당한 법으로 규정되었거나 특별히 정의의 근원인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명령된 이런 살인을 예외로 한다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살인죄에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22. 자살은 결코 당사자의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곤경이나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종종 암흑과도 같은 오류에 사로잡힌 대중들의 판단을 선한 양심의 순수한 빛과 비교하여 무시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의 정신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들은 많은 사람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했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했어야 했느냐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분명 실례보다는 건전한 이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어떤 실례들은 건전한 이성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뛰어난 만큼이나 본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예언자나 사도들 중에 자살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비록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간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묵숨을 끊으라고 명령하거나 권고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살전4:5)들이 어떠한 실례를 제시하든지 진리되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23. 카이사르의 승리를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살한 카토의 예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학식있고 고결한 인품을 지녔다고 인정되던 그의 행동이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정당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행동에 대하여 역시 학식이 있었던 그의 친구들이 현명하게도 그에게 자살을 만류했고, 그런 행동이 강한 정신력의 징표가 아니라 유약함의 징표이며 불명예를 피하려는 명예심의 증거라기보다는 역경을 참아낼 수 없는 허약함의 증거라고 간주했다는 사실 외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24. 레굴루스가 카토를 능가한 바로 그 덕목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뛰어나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경건한 욥이나,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성경에 기록된 다른 성도들보다 카토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다. 욥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하지 않고, 끔찍스런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고자 했다. 또 다른 성도들도 자살하기보다는 적의 수중에서 포로생활과 억압을 견뎌내기로 작정했다. 우리는 카토보다는 레굴루스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

 

카토는 결코 카이사르를 패배시키지 못하고 그에게 오히려 패배당했으며, 굴복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는 자살을 선택했다. 반면에 레굴루스는 이미 카르타고인들을 패배시킨 적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도리어 카르타고인들에 의하여 패배당했을 때, 그는 자살을 통하여 적의 통제범위 밖으로 나가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적군의 지배하에서 인내하는 동시에 로마인들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적에게서는 정복당한 신체를 강탈하지 않았고,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정복당하지 않는 정신을 빼앗지 않았다. 그가 자살을 거절한 것은 목숨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원로원에서 한 연설에 더 격분한 적에게로 주저하지 않고 돌아가서 맹세를 지킴으로써 이 점을 입증했다. 그는 현세에서의 생명을 귀중하게 보지 않았다. 적이 자신에게 화를 냈을 때, 스스로의 손으로 죽기보다는 어떤 종류든지 고문에 의하여 자신의 생명이 종식되도록 만들고자 선택했다. 자살이란 중죄임에 틀림없다고 선포한 셈이 되었다. 명예를 얻을 만하고 덕성으로 유명한 로마의 모든 영웅들 중에 이 사람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없다. 레굴루스는 대승리를 거둔 뒤에도 아주 검소한 생활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성공에 의하여 타락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아주 대담하게 그토록 끔찍스런 종말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역경에 의하여 분쇄당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적에 의하여 패배당했을 때에도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자 하지 않았다면,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그들이 자살하기보다는 노예상태를 감수하고자 했다면,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자살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섭리로써 그들을 시험하거나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한동안 적에게 맡기시는 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아주 높은 곳에서 그들을 위하여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런 치욕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범죄했거나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적조차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자신에 대해 적이 범죄했거나 행하리라는 이유 때문에 자살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끔찍스런 오판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25. 우리는 죄로써 죄를 회피하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육체는 적의 정욕에 의하여 굴복될 때, 쾌락의 유혹에 의하여 죄악에 동의하도록 정신을 유인할 위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파국적인 결과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살은 적의 죄뿐만 아니라, 그렇게 유혹당한 그리스도인의 죄를 예방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 아닌가라고 그들은 질문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진리되신 분이 분명히 밝혀놓았듯이 자살이 가증스럽고 저주스런 범죄행위라고 한다면, “장래에 생겨날 죄를 피하기 위하여 지금 죄를 범하자. 장래에 간음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지금 살인하자라고 말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육체적인 쾌락에 굴복하여 수치스런 일에 동의할 수 있는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정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그에게 두며 그의 도움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불순종은 우리가 잠들었을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지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책망받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