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어거스틴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1권, 1-14,서문, 도망친 사람들을 보호해준 사도들의 교회(강의안1)

새벽지기1 2016. 7. 13. 14:57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조호연·김종흡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2012), 1138,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은 서양 사상사의 획기적인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2,000년 역사상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3대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410년 알라릭은 로마를 초토화했다. 그 소식을 지중해 건너편에서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가 이교도의 손에 의해서 파괴된 그 원인을 추구하는 동시에 로마가 파괴된 책임이 절대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변명하고 그 책임이 신의 뜻을 어긴 로마 시민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그러나 그 배후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신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데 그 동기가 있었다. 그는 로마가 초토화된 후 3년간 숙고하다가 413년에 하나님의 도성을 쓰기 시작하여 425, 그가 죽기 4년 전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권에서 10권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변호하고 있으며 11권에서 22권까지는 두 도성이 인류역사 안에서 어떻게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진행되는가를 고찰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세 권(20~22)에서는 그의 특유의 종말론을 전개한다.

하나님의 도성은 처음으로 시도된 거대한 역사철학인 동시에 역사신학이다. 그는 인간 역사의 단계마다 사건마다 측면마다 신의 섭리와 역사를 발견했다. 이러한 역사관이 시발점이 되어 서구의 역사학이 발전되었다.

 

우리에게 히포의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of Hippo)으로 더 잘 알려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 있는 내륙도시인 타가스테(Thagaste:오늘날의 튀니지아와 동 알제리)에서 A.D. 354년에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세기는 역사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고전 그리스-로마 문명의 쇠퇴와 서구 유럽 문명의 출발 사이에 걸친 5세기의 중간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는 그리스도교를 위해서는 중요하고 특징적인 시대였다. 왜냐하면 그때 로마 황제가 이교도이자 박해자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보호자요 중재자로 변신했으며, 이집트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 수도원 운동이 현저하게 발달했으며, 각처에서 대규모 교회당과 다른 종교 건물이 건립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 신학적 논쟁과 신학적 정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는 아마도 근대세계에 의해서보다는 고대나 근대에 동등한 정신적 비중을 지닌 어느 집단에 의해서도 높이 평가받는 위대한 신학자들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은 교부신학의 황금기에 활동했던 교부들이었다. 그 중에는 대 바실, 그레고리 나지안젠, 닛사의 그레고리, 요한 크리소스톰, 암브로시우스 제롬,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329(바실)354(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 탄생했으므로 로마제국이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화 된 이후에 성숙에 이르게 된 1, 2 세대의 후예였다.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회심하도록 이끈 자극 중의 하나는 밀라노에서 볼 수 있었던 이집트 수도사들을 모방한 수도원 생활의 모범이었다. 그는 세례받은지 4년 후에 히포 레기우스로 가서 몇몇 동료들과 함께 수도사처럼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391년에 성직자로 서임되었다가, 395년에는 그 도시의 감독으로 성별되었다. 그 이후 35년 동안 그는 분지모양으로 된 그 도시에서 아직도 기둥의 마루와 받침이 남아있는 교회당 가까이의 집에서 살았다.


하나님의 도성의 배열과 내용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작 가운데 여러 번, 하나님의 도성이 어떻게 나누어지며, 각 부분의 주요 주제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22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기에는 너무 많다. 그대가 두 권으로 만들기 원한다면, 반드시 한 쪽은 10권으로, 다른 쪽은 12권으로 나누어야 한다. 그대가 두 권 이상으로 만들기 원한다면, 반드시 5권으로 만들어야 한다. 첫째 권은 처음 다섯 권을 포함한다. 거기서 나는 이교신들-나는 악령(다이몬)이라고 부르고 싶다-이 세상의 행복으로 이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하였다.

둘째 권은 다음의 다섯 권을 포함하고 있는데, 나는 그와 같은 신들을 내세에서의 행복을 위해 의식과 제사로 숭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하였다. 그 다음의 세 권은 각각 네 권씩 포함하고 있는데, 첫 네 권은 하나님의 도성의 기원을, 다음 네 권은 그 도성의 발전을, 마지막 네 권은 그 도성의 끝을 논하고 있다

 

1

 

개요: 세상의 재난, 특히 고트족에 의한 로마의 약탈을 그리스도교와, 제신 숭배 금지에 책임을 돌리는 이교도들을 저자는 반박하고 있다. 그는 인생의 화복은 항상 선인에게나 악인에게 다같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끝으로,

그는 여인들이 군인들에게 폭행당한 것이 그리스도교인들 때문이라는 그들의 후안무치함을 통박하고 있다.

 

이 작업을 착수함에 있어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한 서문

 

내 사랑하는 아들, 마르켈리누스여, 그대가 제안하였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이 작업의 주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도성이네. 나는 그 도성을 건립한 분보다 자기들의 신들을 더 좋아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도성을 옹호하기 위한 일에 착수하였네.

 

) 마르켈리누스는 카톨릭과 도나투스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해결하고자 411년 여름에 카르타고에서 소집된 공의회를 주재하도록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하여 파견된 인물로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끼던 제자였다. 그는 논쟁에서 카톨릭의 승리를 인정하고 도나투스파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려다 그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는 순교자의 반열에 드는 영광을 받았다.

 

우리는 여러 민족의 지배자이면서도 바로 그 자신이 지배욕에 의하여 지배 당하는 세상 도성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네.

 

1 야만인들이 그 도성을 노략질할 때 그리스도 때문에 살려주었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반대자들에 관하여

 

내가 대항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반대자들은 이 세상 도성에 속해 있다. 이런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경건한 오류를 교정하고 하나님의 도성의 아주 훌륭한 시민이 되기는 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 도성에 대하여 불타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고 구속하신 분이 베푸신 현저한 유익들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느끼고 있지 않다. 야만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살려주었던 바로 그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항한 적이 되지 않았는가?

 

로마가 노략질당할 때 순교자들의 거룩한 처소와 사도들의 교회당은 그리스도인이든 이교도이든 모든 피난민에게 도피처를 제공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피에 굶주린 적들은 아주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들의 야수같은 광적 행동을 삼갔다.

 

지금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불평하며 자기들 도성이 당했던 재난에 대하여 그리스도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 받은 것을 운명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적들의 손으로 당했던 어려움과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섭리로서 그런 재앙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올바르고 칭찬받을 만하게 살아가도록 훈련시키며,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좀더 나은 상태로 옮겨주거나, 혹은 이 세상에서 좀더 나은 목적을 위하여 그들을 보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품성을 교정시키고 정결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을 그토록 무정하고 오만하게 모욕하던 이들 중에 아주 많은 사람들은 그 끔찍스런 학살시기 동안 그리스도의 종인 양 행세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제 배은망덕한 교만과 아주 불경건한 광기로써 영원한 어둠 속에서 형벌받을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악한 태도로 그 이름에 대적하고 있다. 그때 그들은 이 짧은 인생의 빛을 향유하기 위하여 기만적인 입술로 그 이름 아래에서 도피처를 찾았으면서도 말이다.

 

2 승리한 자들이 패배자들을 그 신들에 대한 존중심으로 살려준 사건은 전쟁의 관행과는 정반대된다

 

우리는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이나, 그 다음에 흥기하여 세력을 잡은 이후의 시기에 발생된 수많은 전쟁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적들로 하여금 역사를 읽어보고 이방의 적군이 어떤 도시를 장악한 뒤 신전에 도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준 예가 있으면, 들어보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어떤 야만인 장군이 한 도시를 급습하였을 때, 이런저런 신전에서 발견되는 삶들을 난폭하게 다루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는지 인용하게 해보라. 아니네아스는 프리암이 제단에서, ‘스스로 성별했었던 불을 피로써 더럽히는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디오메데스와 율리시즈는 성채를 수비하던 모든 자들을 살륙하고 피묻은 손으로 거룩한 신상을 낚아채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저함없이 무서운 여신의 순결한 관에 손을 댔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트로이가 소멸된 것도 그 도시가 미네르바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네르바는 그녀 자신의 소멸로 이끌게 된 어떤 손실을 먼저 당했던가? 아마 호위병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던가? 그녀는 의심할 바 없이 바로 그 호위병들이 살해 당하자마자 도난당할 수 있었다.

사실은 신상이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상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로마인들은 트로이를 방어할 수 없었던 신들로부터 유익을 얻으리라고 믿었을 때, 평소의 현명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로마인들이 기꺼이 자기들의 도시를 보호하도록 위임하고는 기뻐했던 신들인 것이다! 이 얼마나 애처로울 정도로 어리석은 짓인가! 현명한 로마인들이 자신도 방어하지 못한 이런 신들에게 로마의 보호를 위임해야 했겠는가! 정복당한 신들을 보호자요 수호자로 경배하는 행위는 선한 신이 아니라, 악한 영들을 숭배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겠는가? 만약 이런 신들이 앞서 소멸되지 않았었더라면, 로마가 이런 재앙을 모면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된다.

 

4. 그리스인들로부터 아무도 구원치 못했던 트로이에 있는 유노의 성소에 관하여, 또 도망친 모든 사람들을 야만인들로부터 보호해주었던 사도들의 교회에 관하여

 

그리스인들도 같은 신들을 숭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어머니인 바로 그 트로이는 성별된 신들의 건물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불과 칼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위대한 여신에게 봉헌된 장소가 포로들이 당연한 권리로써 바깥으로 인도될 수 없는 장소로서가 아니라, 승리한 자들이 마음대로 포로들을 감금시킬 수 있는 장소로 선택되었다. 이 성소는 유피테르 자신의 누이이자 아내이며 모든 신들의 여왕인 유노의 신전이었다.

 

비열한 그리스인들은 유노의 신전을 자기들의 탐욕과 오만을 과시하는 장소로 선택하였던 반면에, 야만인들은 비록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당을 겸손과 친절을 보이는 곳으로 선택하였다.

 

5. 어떤 도성을 약탈하는 적군의 일반적인 관행에 대한 카토의 묘사

 

소년소녀들은 끌려가고 젖먹이들은 부모의 품에서 떼어집니다. 여인들은 정복자들의 쾌락의 도구가 되며, 신전과 집은 노략질 당합니다.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며 학살이 자행됩니다. 싸우는 사람들, 시체들, 유혈과 애곡소리로 모든 것이 혼란합니다.”

 

6. 로마인들도 도성을 장악했을 때 신전에 있는 피정복민들을 그냥두지 않았다

 

특별히 칭찬하는 말로 굴복하는 자들을 살려주며 교만한 자들을 때려눕히는 것이 관습이며 자기들이 당한 악행을 복수하기보다 오히려 용서해주기를선택했다고 언급되었던 로마인들을 돌이켜 보고 검토해보자. 이 로마인들은 자기들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많은 강력한 도시들을 장악하고 습격하며 전복시켰다. 우리는 어떤 신전에 특권이 부여되며 그곳으로 피한 사람이 자유를 얻도록 보장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비록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었다고 할지라도, 역사가들이 그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7. 로마가 약탈당할 때 발생된 잔인한 행위들은 전쟁의 관행에 부합했지만, 관대한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부터 결과되었다

 

최근에 로마에 재앙이 닥쳤을 때 자행되었던 온갖 파괴, 학살, 약탈, 화재 및 고통은 일반적인 전쟁의 관행과 일치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관습을 확립시킨 어떤 것, 즉 전체 국면을 변화시켰던 어떤 요소가 있었다. 만행을 저지르던 야만인들이 아주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대 교회당들을 선택하여 자기들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들로 가득 차도록 따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난폭하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강제로 끌려가지도 않았다. 자비심 많은 적들은 많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자유를 얻게 하였다. 이런 행위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 점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눈먼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점을 보고도 그에 대해 찬양하지 않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이에 대해 찬양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다.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런 관대한 행동의 원인을 야만인들의 야수적인 본성에 돌릴 수 없다. 그들의 과격하고 야만적인 정신은 오래 전에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리라”(89:32,33)고 말씀하신 분에 의하여 겁을 먹고 억제되며, 신비한 방법으로 완화되었던 것이다.

 

8. 종종 선인과 악인에게 차별없이 임하는 축복과 불행에 관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비는 왜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며 감사치 않는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겁니까라고 질문할는지 모른다. 이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그것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5:45) 분의 자비라는 것이다

 

어떤 악인들은 이런 사실을 생각함으로써 회개하고 자기들의 불경건을 고치지만, 그 사도에의 말대로 다른 악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며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 있다”(2:4,5).

 

그렇지만 하나님의 채찍이 선인들을 참을성있게 인내하도록 훈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아직도 악인들이 회개하도록 초대하신다. 악인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엄격함이 완화되듯이, 선인들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감싼다.

 

하나님은 섭리로써 의인들을 위해서는 불의한 자가 누리지 못할 장래의 축복을, 또 악인들을 위해서는 선인이 당하지 않을 슬픔을 예비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현세의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시에 임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래서 악인들도 동일하게 향유하는 모습을 보이는 어떤 것들을 우리가 지나치게 탐하지 않게 하고, 또한 심지어 선인들도 종종 겪는 해악으로부터 지나친 두려움을 가지고 움츠러들지 않도록 하셨다.

 

축복이라고 생각되는 일들과 불행이라고 간주되는 사건들이 각각 사용되는 목적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선인들은 이 세상의 좋은 일들로 인하여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고, 이 세상의 나쁜 일들로 인하여 압도당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악인은 현세의 행운에 의하여 타락해 있기 때문에, 불행에 의해서는 자신이 징벌받는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흔히 행운을 베풀거나 불운을 안겨줄 때조차 그분의 행동양식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악행에 대하여 명백하게 벌이 가해진다면, 마지막 심판을 위하여 남겨질 것이 하나도 없게 되리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능력이 현세에 저질러지는 어떠한 죄악에도 공개적으로 징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제기될 것이다.

 

현세에서의 행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눈에 보일 정도로 관대하게 행운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현세적인 축복이 그분의 소관사항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그분께 구하기만 하면 번영을 베풀어주시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단지 그런 보상을 위해서만 섬김받을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그분을 섬김으로써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욕스럽고 욕심만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통당하며 또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 사이에 결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이 비록 같다고 할지라도 고통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채로 남아 있다.

 

덕과 악덕은 비록 같은 괴로움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동일하지 않다. 금을 빛나게 만드는 그 동일한 불은 왕겨가 연기를 내도록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도리깨가 쭉정이를 떨어져 나가게 만드는 동시에 알곡을 걸러내기도 한다. 같은 압착기에서 눌린다고 하여서 기름이 찌꺼기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선인들을 검증하고 정결케 하고 순수하게 하기 위하여 엄습하는 난폭한 일이 악인들을 저주하고 파멸시키고 근절 시키도록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고난을 당할 때에 선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반면에, 악인들은 하나님을 증오하며 모독한다.

 

이로 보아 우리는 고난당하는 자의 본성이 중요하지, 고난의 본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정물통을 흔들어 보아라. 그러면 더러운 악취가 풍길 것이다. 이제 향료를 흔들어 보아라. 똑같은 동작이지만, 이때에는 향기로운 내음이 솟아오를 것이다.

 

9.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고난당하는 여러 가지 이유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끔찍스런 재앙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그분의 진노를 격발시킨 죄악에 대하여 겸손하게 생각해 본다. 그들은 비록 범죄적이고 불경건한 악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만, 죄악의 보응으로 나타난 현세적인 불행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 악행에서 스스로 멀리 떠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중 누구나 비록 칭찬받을 만한 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때때로 물질적인 욕망에 굴복한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극악무도한 죄악을 범하거나 불의에 잠겨있거나 가증스럽도록 불경건한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마도 가끔씩은 어떤 죄에, 보다 사소한 죄에는 더욱 빈번하게 빠져들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심한 책망과 비난으로 그런 자들을 훈계하고 권고해야 할 때에도 그 일이 성가시기 때문에, 또는 그들의 기분을 상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비겁하게도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혹은 우리가 열심히 얻으려고 추구하는 일이나, 잃을까봐 마음 졸이며 두려워하는 세상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우리를 방해하고 해를 주지 않도록 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삼갈는지 모른다. 그들이 이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고통받음으로 징벌당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나님이 현세적인 재난으로 도덕적인 타락을 징벌하기로 결정했을 때, 선인이 악인과 함께 징벌당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선인과 악인은 둘 다 악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비록 정도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현세적인 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징벌받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선인은 현세적인 삶을 경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교훈을 얻어 마음을 고쳐먹고 영원한 삶을 목표로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에 동행하기를 거절한다면, 인내심을 갖고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향해 갖는 그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있는 한 심경의 변화를 경험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은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33:6)고 예언자가 말씀한 사람들보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파수꾼또는 감독들은 가차 없이 죄를 책망하도록 교회에서 세움받았기 때문이다.

 

욥의 경우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선인이 현세에서 고난을 당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즉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이 검증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어느 정도로 순수한지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10. 성도들은 세상 재물을 빼앗겨도 잃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문제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고 충분히 생각한 이후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는 사도의 말씀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믿고 경건한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어떤 재앙이 발생했는지 살펴보라.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때 그들은 믿음도 아울러 잃어버렸는가? 혹은 헌신마저 잃어버렸는가? 혹은 하나님 앞에서 값진"(12:21) 내적 인격의 소유물을 잃어버렸는가? 그들이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는가? 이런 재물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역시 부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6-10).

 

그렇다면 로마가 당한 재앙 중에 세상적인 재물을 잃었던 사람들이, 겉으로는 가난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강한 그 사도에 의하여 서술된 대로 영혼 속에서 재물을 소유하였다면, 즉 만약 그들이 세상 물건을 쓰지만 다 쓰지 못한 자 같았다면(고전7:31), 그들은 심한 시련을 당했지만 결코 정복당하지 않은 욥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욥은 착한 종처럼 주님의 뜻을 자신의 큰 재산으로 삼으며, 그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살찐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잠시 후 죽을 때 뒤에 남겨놓아야 하는 재물을, 살아있는 동안에 잃는다고 하여 슬픔에 잠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상적인 재물을 비록 그리스도보다 우선시키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탐욕스런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 집착하는 보다 연약한 인물들은,

그것을 잃을 때에 자기들이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깨닫는다. 그들은 내가 이미 인용한 사도의 말씀대로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으며”(딤전6:1)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말로써 배우기를 거절했으므로 경험을 통해 보충교육을 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사도가 부하려 하는 사람들은 --- 시험에 빠지나니”(딤전6:9)라고 말했을 때, 그가 재물에 대해 비난한 것은 재물을 향한 욕망이지 재물이 제공하는 기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음 구절에 나오는 그의 명령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11. 보다 이르든지 보다 늦든지 인생의 종결에 관하여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살해당했고 온갖 종류의 끔찍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라고 저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비록 참아내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살게 된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당하는 일이다. 적어도 나는 죽음을 경험한 사람 중에, 언젠가 죽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인생의 종결은 긴 인생을 짧은 것과 같은 상태로 축소시킨 셈이다. 어떤 것이 일단 존재하지 않게 되면 더 이상 더 나은지 더 나쁜지, 더 긴지 더 짧은지는 문제가 안 된다. 일단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동일한 고통을 두 번 겪도록 강요되지 않는데, 그가 어떤 종류의 죽음으로 인생이 종결되든지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매일의 삶 가운데 수많은 죽음에 의하여 그런 식으로 위협당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죽음이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죽음을 두려워하느니보다, 한 번 고생하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느냐는 물음이 제기된다. 나는 사람들이 한 번 죽음으로써 모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되느니보다 그에 대한 두려움에 억눌려 사는 편을 당장 선택하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약하고 겁이 많은 육신의 본능적인 위축 현상과, 심사숙고하여 육체의 영향에서 벗어난 정신의 합리적인 확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죽음은 재앙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좋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죽음 이후에 받게 되는 응보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인간들은 어떤 사건으로 죽느냐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염려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에 다다를 목적지가 어디냐 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개가 헌데를 핥는 가난한 신앙인의 죽음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부자의 죽음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16:19이하). 그렇다면 지금까지 훌륭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런 끔찍스런 죽음이 어떤 해를 미칠 수 있었겠는가?

 

12. 시신의 매장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매장되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저들은 그 모든 살육의 소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매장조차 될 수 없었다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런 일마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들은 몹시 굶주린

짐승들이 시신의 부활을 막는다고 하더라도, 머리털 한 올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살해당한 시신에 대하여 적군이 하기로 마음먹은 어떤 일로 인하여 장래의 생명이 방해받을 수 있다면, 진리되신 분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0:28)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시신이 흙으로 덮이지 못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했다. 온 우주는 피조물을 어디서 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계신 분의 임재하심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 자색 옷을 입은 부자에 대해서는 그의 식솔들이 사람들의 눈에 화려한 장례식을 베풀어 주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는 그를 대리석 무덤으로 호위해가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아브라함의 품안까지 인도해가는 수종드는 천사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훨씬 더 화려한 장례식이 베풀어졌다.

 

그들의 시인이 무덤이 없는 이는 하늘에 의하여 덮여지노라고 노래했을 때 올바른 말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육신이 다시 형성되고 부활하며, 땅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신이 해체된 상태로 있는 아주 은밀한 처소로부터 신체의 각 기관이 다시 결합되리라고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13. 성도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여러 가지 이유

 

그렇다고 하여 죽은 이의 시신, 특히 성령이 온갖 종류의 선행을 위한 도구로서 거룩하게 사용했던 의롭고 신실한 이의 시신이 경멸당하고 버림받아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결코 단순한 장식품이나 외적인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성 자체에 속한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경건한 장례의식과 함께 무덤이 마련되었으며 정중하게 안장되었다. 그들은 생전에 매장에 대하여, 혹은 심지어 자기 시신을 보다 좋은 장소로 이장하라고 자식들에게 지시했다.

 

주님께서도 비록 삼일 만에 살아나실 터였지만 어떤 경건한 여자가 그분의 장사를 위하여 손과 발에 값비싼 향유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한 사실이 기념되어야 한다고 선포하며 명령했다(26:10). 그리고 복음서에서는 주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거둔 사람들이, 그를 조심스럽게 싸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장사지낸 일이 칭찬받을 만한 행위로 언급되었다(19:38).

 

그것들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시신에까지 미치며, 부활에 대한 신앙을 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장례의식도 그분께 기쁜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건전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생명없는 시체에 행한 어떠한 배려와 봉사가 하나님의 눈에 잊혀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있고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에는 얼마나 커다란 상급이 따를 것인가!

 

그러나 선인이 음식과 의복같은 생활필수품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많은 불편을 겪겠지만 그것이 그에게서 인내심을 갖고 참아내려는 용기를 빼앗아 갈 수 없고 그 영혼에게서 현신된 마음을 몰아내지 못하며 오히려 훈련을 통하여 그런 마음을 강하게 만든다면, 일상적인 방식대로 장례되고 매장되는 영예를 얻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 일이 복받은 이들이 거하는 은밀한 곳에서 평화를 누리는 자들에게 곤경을 안겨다줄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한가!

 

14. 사로잡힌 성도들에 대하여: 그런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위로는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저들은 말한다. 사실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다른 곳에서 사로잡히게 되었다면, 그런 일은 분명히 아주 가련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재앙에 대해서도 커다란 위로를 제공해준다. 포로로 잡혀간 세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4).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갔고(1:6), 다른 예언자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위로자되신 하나님이 그들 곁에 계셨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예언자도 버리지 않았던 그 하나님은 , 비록 야만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인간인 종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믿는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pp 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