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어거스틴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1권, 15-20,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강의안2)

새벽지기1 2016. 7. 15. 07:03


15. 비록 거짓 종교이기는 하지만 종교를 위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않는 자발적인 포로생활을 참아내는 모범을 보인 레굴루스에 관하여

 

우리의 대적들은 아주 뛰어난 영웅들 중에 종교적인 양심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포로생활을 참아낸 유명한 예를 하나 가지고 있다. 로마의 장군인 마르쿠스 레굴루스는 1차 포에니 전쟁 중인 B.C. 256에 카르타고에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의 포로를 잡아두기보다는 로마인들에게 붙잡힌 카르타고인들이 석방되기를 더 바랐기 때문에 레굴루스를 선택하여 대표단과 함께 사절로 로마로 파송하면서, 그 이전에 만약 그가 자기들이 요구한 결과를 얻는 데 실패한다면 카르타고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그가 연설을 마친 후에 로마인들은 그가 적에게로 돌아가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맹세한 내용을 자발적으로 이행했다. 적은 온갖 교묘하고 끔찍한 고문을 가한 뒤에 그를 죽였다. 상자의 사면에는 날카로운 못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그가 몸을 기대면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잠을 자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저들이 그토록 무시무시한 운명보다 높이 솟아오른 용기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레굴루스는 신들을 아주 존중했다. 그 결과 그는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나라에 머물거나 원하는 장소로 가지 않고 조금도 주저함없이 잔인한 적들에게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그런 신들에 비난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진실된 믿음으로 하늘 나라를 소망하고 심지어 자기들의 고향에서조차도 단지 순례자에 불과함을 알고 있는 성도들의 투옥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비난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16. 포로로 잡혔다가 정절을 잃은 성별된 처녀들과 다른 그리스도인 처녀들에 관하여, 그리고 이들은 의지로 그런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그들 영혼이 더럽혀질 수 있는가에 관하여

 

올바른 생활을 위한 조건이 되는 덕목은 마음 속에 자리잡고서 육체의 각 부분에 대하여 명령한다는 사실과, 성별된 육체는 성별된 의지의 도구라는 사실이 굳게 확정되어야 한다. 의지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다면, 불가피하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를 당하여 다른 누구가 육체를 가지고 혹은 육체에 대하여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피해자에게 책망할 거리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고통뿐만 아니라 욕망을 포함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몸에 범해질 수는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가 저질러졌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이 비록 최고의 결단력으로 유지되었던 순결을 파괴시키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수치심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수치심은 그 행위가 의지의 동의를 수반했다고 생각되지 않기 위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17. 징벌이나 불명예에 대한 두려운 때문에 저지른 자살에 대하여

 

이런 처녀들 중 일부가 그런 불명예를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택했다고 할지라도,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이끈 심정을 이해할 수 없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죄를 범함으로써 또다른 범죄행위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을 거부했다. 어느 누구든지 범죄자조차 개인적으로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어떠한 법도 이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살인자이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난에 대하여 스스로 결백하면 결백할수록 자살을 통하여 죄를 더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다의 행위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지 않는가? 그는 목매달아 죽음으로써 가증스런 배반행위를 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을 가중시켰다고 진리가 선포하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고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구원을 얻게 하는 회개의 기회를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가 자살했을 때, 그는 범죄자를 죽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죄가 있는 목숨을 종식시켰다. 그는 비록 죄 때문에 자살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죽임으로써 또 다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이 왜 자신에게 악한 일을 해야 하는가? 왜 그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범죄한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하여 무죄한 자를 죽여야 하는가? 왜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죄를 빼앗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죄를 범해야 하는가?

 

18. 정신은 침해당하지 않고 남아있지만, 다른 사람의 정욕에 의하여 육체에 가해질 수도 있는 폭력에 관하여

 

우리는 정신의 순결이 범해졌을 때 육체적인 순결이 상실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육체가 농락당했을 때라고 할지라도 정신의 순결성이 유지되는 한 육체의 순결을 잃지 않았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여인이 동의하지도 않고서 다른 사람의 죄에 의하여 범해지는 경우에, 그녀는 자의적인 죽음으로써 자신을 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녀는 추행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할 까닭은 더더욱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는 아직도 확실하게 드러나지도 않은 범죄를 피하기 위해서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정욕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피해자를 조금도 더럽힐 수 없을 것이다. 정욕이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면, 그것은 가해자의 것일 뿐만 아니라 피해자도 그 정욕을 공유하고 있을 때 뿐이다. 정신의 덕목인 순결은 악에 동의하기보다는 모든 악을 참아내는 인내를 그 동료 덕목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의지의 동의 여부를 통제할 수 있을 뿐, 항상 자기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육체마저도 정결하게 하는 정신의 결단력이 유지되는 한,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폭력적인 정욕은 요동하지 않는 자제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순결을 빼앗아갈 수 없다.

 

19. 자기에게 행해진 폭행 때문에 목숨을 끊은 루크레티아에 관하여

 

우리는 추행당한 그리스도인 여인들이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순결하다고 변호하고 있다. 사람들은 고대 로마의 귀부인인 루크레티아를, 그녀의 정숙함으로 인하여 높이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타르퀸왕의 아들이 그녀의 육체를 범했을 때, 그녀는 이 젊은 불한당의 범죄행위를 지체 높고 대담한 자기 남편 콜라티누스와 친척인 브루투스에게 알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복수를 맹세하게끔 만들었다. 그 이후에 그녀는 상심하고 모멸감을 참아낼 수 없어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주제에 대하여 연설하면서 진실을 잘 말해주었다. “기묘한 현상이로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간음을 범했다." 이 말은 명쾌하고 진실된 말이다. 그 사람은 두 육체가 결합된 광경에서 한 사람의 역겨운 음행과 다른 한 사람의 정숙한 의도를 관찰했고, 그 행동에서 그들의 육체가 합치된 모습이 아니라 두 사람의 정신의 상이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간음을 범했다."

 

그토록 높이 찬양받는 루크레티아는 또한 죄없고 정숙하며 모욕당한 루크레티아를 실해했다. 그녀가 비록 간음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간음자에게 포옹당했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한 것은, 그녀가 정숙함에 부여한 고귀한 가치보다는 수치심에 과도한 부담을 느낀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스도인 여인들도 루크레티아와 같은 일을 당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자신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고, 스스로 가담하지 않은 범죄 행위에다가 자신의 범죄 행위를 첨가시키기를 거부했다. 적군이 정욕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간음하도록 내몬 것처럼 그들이 수치심 때문에 자살하도록 내몰렸더라면, 그들은 범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 안에, 자신들의 양심이 증거하는 가운데, 정절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이러한 명예를 가지고 있으며,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실 그들은 선을 행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의혹을 벗어나기 위하여 불법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의 권위로부터 일탈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20.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자살을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거룩한 성경 가운데 어디에서든지, 영생을 보장받기 위해서나 어떠한 악을 피하거나 모면하기 위하여 자살하라는 계명이나 그에 관한 허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우리는 특히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20:16)는 거짓증거를 금하는 계명에서처럼, “네 이웃이라는 말이 부가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살인하지 말지니라"(20:13)는 계명에 의하여 자살이 금지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39)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건대, 이웃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 계명이 자신에게 거짓 증거하는 자가 면죄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에 아무 첨가된 말이 없고 어떠한 사람, 심지어 그 계명을 받은 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자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야생동물이나 가축마저 죽이지 말라는 의미로 확대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으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사는 식물에는 적용하지 않는가?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으로부터 하나님이 잡목마저 제거하지 못하도록 금하셨다는 결론을 끌어내어, 마니교도들의 오류에 동참해야 하겠는가? 그것은 정신 나간 생각일 것이다. 식물과 동물의 생명이 우리의 필요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이 정당하게 정하신 질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인간들 즉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적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을 죽이는 것도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