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긍휼과 복 (마 5:1-7)

새벽지기1 2016. 6. 24. 22:46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에 대해서 설교해 오고 있다.

네 번째 시간이다. 다섯 번째 복이지만,

지난 주의 의와 복에 대한 설교는 좀 어렵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설교를 되도록 쉽게 할려고 애를 쓰지만 좀 어려울 때는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꼭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서 설교를 찾아 다시 읽어 주셨으면 한다.

한 주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팔복의 설교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요약하여 들려드리고 있다.

그분의 팔복에 대한 설교는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오하고 폭이 넓다.

그 반에 반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분이나마 전함으로 은혜를 나누고 싶은 것은

저와 여러분이 이 중요한 팔복에 대해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청교도들은 다른 사람의 심오한 성경적인 설교를 보았을 때

그대로 옮기거나 요약하여 설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휫필드가 그랬고 요한 웨슬레가 그랬고 다른 청교도들도 그랬다.

꼭 자기의 창작 설교만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다 영향을 받고 그 나머지 나오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 수준이 내 수준에서만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수요일과 금요일에도 주일 오후에도, 너무도 훌륭한 그분의 설교들을

정리하고 발췌해서 함께 나누는 것이다.

되도록 이면 기회있을 때마다 훌륭한 청교도들의 말씀들을 들려드리고 싶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말씀 수준과 신앙 수준이 함께 업그레이드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을 상고하고자 한다.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한 복들의 연속선상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이 팔복을 말씀함에 있어서 아무렇게나 하시지 않고 한 단계 한 단계 진전을 시키셨다. 

마음이 가난하고 죄에 대해 애통해 하고 온유해져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을 받아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와 자세가 긍휼이다.

우리의 타고난 기질로 하는 긍휼이 아니다.

안이하고 적당주의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여기서 말씀하는 긍휼이 아니다.

법과 질서에 위반되든 말든 봐주기식으로 긍휼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기질로 이런 걸 잘하여 그 사람은 긍휼이 많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팔복에 나오는 어떤 성품도 타고난 것으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복음은 특정한 타고난 기질이나 성품을 두둔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셨다”.


긍휼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형용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련하에서 긍휼은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긍휼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신다.

하나님은 긍휼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시다.

긍휼을 해석할 때 이 점이 항상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져야 한다.

의를 떠나서, 진리(법)을 떠나서하는 긍휼은 참된 긍휼이 아니며 잘못 이해한 것이 된다.

긍휼과 진리는 조화되어야 하고, 진리와 율법을 희생시키는 긍휼은 참된 긍휼이 아니다.

적당주의식으로 온정을 베푸는 것이 긍휼이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긍휼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긍휼을 은혜와 비교하는 것이다.

바울이 다른 서신들에서는 인사말이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지만

목회서신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는 인사를 한다.

은혜는 죄는 지은 사람들과 특히 관련되고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관련된다.

은혜는 죄를 전체로서 내려다보는 반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 본다.

긍휼은 측은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행동이 합쳐진 것이다.

긍휼은 측은감과 행동이 합쳐진 것이다.


독교인은 측은감을 가진다.

사람들의 비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것을 제거하려는 열정으로 유도한다.

우리가 긍휼한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람을 법대로 처리해야겠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하는 것은 긍휼과 정반대이다.

긍휼은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하여 내적 동정심과 외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긍휼의 실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여행중에 그는 강도들을 만나 큰 상처를 입었다.

지나간던 레위인도, 제사장도, 못본체 그냥 지나갔다.

그들은 동정이나 측은한 마음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은 강도에 희생되어 거반 죽게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눅10:33)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눅10:34-35).

이것이 긍휼이다. 측은감만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사태를 해결하려는 행동까지를 포함한다.


긍휼에 대한 완벽하고 최고의 실예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련한 상태를 보셨고, 고통을 보셨으며,

법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긍휼이다.

그래서 아들이 오셨고 우리의 상태를 해결하신 것이다.

공의와 긍휼 사이에는, 진리와 긍휼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둘은 서로 조화된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긍휼이 도래했음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메시야가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오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긍휼이 여기는 자의 복은,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복처럼 자주 오해를 받아온 복은 없다고 하겠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해야만 하나님도 내게 긍휼하실 것이며,

내가 용서해야 나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내가 용서받는 조건은 내가 용서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에는 이와 유사한 진술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잘못된 해석은, ‘우리가 용서하면 우리도 용서를 받을 것이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기도를 기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마 18장의 빚진 자들의 비유에 이와 비슷한 진술이 있다.

빚을 지고 있는 어떤 잔인한 종이 주인으로부터 빚을 청산하라를 요구를 받는다.

그 종은 갚은 돈이 없어 주인에게 빚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주인이 그를 긍휼히 여겨서 그가 빚진 것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밖으로 나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가 주인에게 탕감받은 빚고 비교하면 아주 사소한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 사람도 사정하여 이르기를 ‘조금만 더 참아 주시면 꼭 모든 빚을 갚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고, 그가 남은 한 닢까지 갚기까지 감옥에 쳐넣었다.

다른 종들이 이 모습을 보고 주인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주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잔인하고 불의한 종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좋아 너희 행동에 비추어 나는 네게 한 말을 취소하겠다’고 하고서,

그가 마지막 한 닢을 다 갚기까지 감옥에 들어 있으라고 가두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 ‘이와같이 너희도 진심으로 형제를 서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잘못된 해석은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해석은 옳지가 못하다.

첫째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엄격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어느 누구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며, 아무도 천국을 보지 못할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적으로 엄격히 해석한다면 용서는 불가능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게 해석하면 신약 성경으로부터 은혜론을 전부 말소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도다’든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도다’와 같은

영광스런 성구들을 읽어서는 안 된다.

이 성구들을 모두 함께 물리쳐야만 한다. 무의미한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성구들은 모두 사실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성구를 다른 성구들과 모순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해야 하며’ 교리들 사이에는 서로 일치가 되어야 한다.

바른 해석은, 내가 참으로 회개할 때에 한해서 참으로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내가 처벌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내가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돌려야 하며,

다른 아무 것에도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할 수 있다.

내가 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서 내 위치를 인식하고,

내가 이런 식으로만 용서받게 됨을 알게 되면,

내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반드시 용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심령이 가난해지고, 나는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애통해 한다.

온유해지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로 배불림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고 점점 성화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복을 받고 이렇게 체험한 이상,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완전히 전적으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게 일어난 일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는 내가 전에 그들을 보는 식으로는 보지 읺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지금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속고 있는 희생물로, 죄와 사탄과 세상 길의 노예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싫어할 사람들로만 보지 않고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들 나도 아직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그들에 대하여 긍휼할 수 있고 또 긍휼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긍휼의 최고의 실예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결코 지으신 일이 없고, 누구에게도 아무 해를 주지 않으시고, 오셔서 진리를 설교했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하러 오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보라.

십자가 위에 못박혀 고난을 받으신 주를 보라.

자기를 못박은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무엇이라 하셨는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어째서 인가? '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사탄이었다. 그들은 희생물이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긍휼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스데반이었다.

성난 유대인들이 그에게 돌을 던질 때 그는 무엇이라 했는가?

‘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은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했다.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긍휼히 여겼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죄의 노예된 무능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써 비애감을 느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악용하고 헐뜯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긍휼이 여겨야 한다.

신랄하게 분내고 성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영이 온통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과연 긍휼에 대하여 빚을 진 자임을 안다면,

과연 내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것을 안다면,

나에게 교만이 있을 수 없으며, 변명이 있을 수 없으며,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비열한 것이 발견되거나,

그것이 죄의 표출인 것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큰 슬픔을 느껴야 마땅하다.

우리도 죄를 다시 지을 때마다 다시 긍휼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향하여

‘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있을 때,

우리가 다른 어느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기도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윗이 표현한 대로 ‘내가 내 마음 속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이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도에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이 복이 말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다.

만일 그 불의하고 잔인한 종이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을 용서하지 않으려 했다면,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주인에 대한 그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용서의 한 가지 조건은 회개이다.

회개는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께 조금도 권리를 주장할 것이 없으며,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반드시 긍휼해야 한다는 귀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긍휼과 함께 마음 속에 임할 때 우리는 긍휼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가 못받았는가의 여부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가 아니 하는가로 선언하는 셈이 된다.

내가 용서를 받았다면 나는 용서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누구도 생래적으로 용서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용서의 영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죄에 빠져들에 마련이다.

죄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이 긍휼이 필요하며 이것을 얻는다.


우리의 최후를 기억하자.

딤후 1:16-18에 바울이 로마에 포로되어 있을 때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방문한 오네시보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날에 주께서 자비를 그에게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최후의 날에 우리는 모두 긍휼이 필요할 것이다.

종말의 날에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서

몸으로 행한 행실의 기록을 갖고 직고할 때 이 긍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속에 있다면, 우리가 긍휼하다면, 우리는 그 날에 긍휼을 받을 것이다.

나롤 긍휼히 여기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각지 자신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러분은 긍휼한가? 저 죄인들이 여러분에게 죄를 지어도 그 모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가?

여러분은 세상과 혈육과 마귀의 희생물이요 속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가?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