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역사적 기독교는 사실이다.

새벽지기1 2016. 6. 22. 12:09


역사적 기독교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쉐퍼가 죽은 그의 나라 미국에서 바라보는 평가를 봄으로서 그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Christianity Today지는 1997년도 3월호 표지인물로 “프란시스 쉐퍼”를 게재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특집을 실었다. Michael S. Hamilton은 쉐퍼에 대한 글의 제목을 “The Dissatisfaction of Francis Schaeffer“라고 하였다. 이것은 프란시스 쉐퍼의 비전과 좌절이 아직까지도 복음주의 사회 속에 끊임없이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Michael S. Hamilton은 쉐퍼의 일생과 사상을 논한 뒤에 프란시스 쉐퍼가 오늘 우리에게 주고있는 의마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미국에 있어서 20세기 후반의 강력한 영향을 행사했던 두 인물은 빌리 그래함과 프란시스 쉐퍼를 비교함으로서 쉐퍼가 주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특별히 이 비교는 빌리 그래함 식의 신앙에 젖어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비교가 될 것이다. 특별히 프란시스 쉐퍼가 의도하였던 내적 느낌이 아닌 객관적 진리로서의 믿음을 이해하는 좋은 평가이다.


"프란시스 쉐퍼가 의도한 것를 평가하는 시도에서 빌리 그래함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분은 미국복음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수 많은 방식으로 그래함은 온건 개혁파를 대표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최고의 소망, 공화당과 민주당의 친구이며, 중산층의 장애물을 완화시켰고, 그의 설교는 어느 누구나 동감한다. 역사가 그랜트 워커는 “중미는 그래함의 이야기를 경청했다.”라고 말했다. 한 손에 성경을 가지고 기차역에 서있는 빌리 그레함을 보는 것처럼 단독으로 대통령을 만나는 그래함을 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는 모피를 구입하기 위해 쇼핑하는 테레사 수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보다 부자와 함께 골프를  치는 프란시스를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만약 그래함이 복음주의의 온건파의 대표자라면, 쉐퍼는 복음주의를 사상의 전쟁터에서 방어하는 대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본성에 의한 복음주의는 종파 구분을 더럽혔다. 그러나 쉐퍼의 기독교의 비전은 엄격한 분파였다. 그래함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고, 모든 곳으로부터 그의 적을 환영했다. 그러나 쉐퍼는 모든 적을 거절했다. 그들은 그의 추종자가 아니라 현대 문화의 비인간화의 궤도와 세속화를 반대하는 전투에 함께 동참하는 자로서 쉐퍼의 교리화의 목표를 믿는 것이다. 그래함이 중산층의 힘을 요구할 때, 쉐퍼는 이미 머리가 되어버린 그들을 공격했다. 그의 강한 영향은 지식층, 낙오자들 그리고 최근 주목할만한 광경들, 깡패를 위한 휴식처로써 미국인 법을  수용하기 시작한 형식상의 점잖은 시민들이 함께 중산층에 불평을 터뜨렸다.


결론적으로, 프란시스 쉐퍼는 복음적 기독교의 한 부분에 대표한다. 그는 그의 가르침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우리가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내가 세상이 비 정상적인것(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든 의도가 아니다)이라고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올바르게 이 세상에 설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과 우리가 꾸며 나가야 할 세상의 커다란 차이점을 그의 수정 같은 안목으로 남긴 영원한 유산일 것이다."]Michael S. Hamilton,The Dissatisfaction of Francis Schaeffer,op.cit.,pp.27.


프란시스 쉐퍼는 무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하였던 "진리가 대결을 동반한다하여 무작정 덤벼서는 안되며, 먼저 기도하면서 기독교가 참된 진리라는 것이 당신의 뼈에 사무치게 되거든 그제서야 진리를 위해 서라“고 한 것은 그의 사회 개혁사상의 준비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기에 쉐퍼가 그렇게 ”진정한 영적 생활“을 강조한 이유를 알게된다. 헤롤드 브라운은 쉐퍼를 우리 시대를 위한 아타나시우스라고했다.


당시의 이단을 물리치고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였던 아타나시우스와 같이 진흙땅과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진리의 실천을 위해 투쟁하였지만, 아타나니우스보다 나은 자였다. 그는  성령에 사로잡힌 전도자였고, 그는 성령의 눈으로 시대를 바라본 현실주의자였다. 그리고 시대를 내다본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는 역사적 기독교가 사실임을 변치 않고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따스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사랑의 전도자였다.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안 직후


“내가 암에 걸린 것이 하늘에서의 싸움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나는 역사적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고백하고 믿었던 것에 따라 살 것이다. ”


라고 말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그는 5년반 이상을 암과의 전쟁을 치루었으며 그 기간동안에도 여전히 기독교는 진리임을 확신하면서 살았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전 저의 일을 끝냈습니다. 저를 본향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저는 지쳤습니다.”


하나님은 현대의 사상적 혼돈시기에 참 진리를 위하여 싸웠던 사랑하는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본향으로 데려 가셨다. 위대한 복음주의자 그리고 위대한 문화사역자 그리고 더욱 위대한 사회 개혁자인 쉐퍼는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역을 마치고 본향으로 간 것이다. 쉐퍼가 간 길에는 정말로 많은 씨앗을 뿌려졌고 그를 통한 복음의 열매는 20세기의 혼합된 세계관속에 신음하며 살고 있는 영혼들에게 단비와 같은 신선감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복음의 사역의 만개는 21세기가 될 것이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꽃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선지자인 엘룰(그도 지금은 이땅에 없다)을 보았듯이 하나님은 자신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이 세상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언제나 참여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동시에 동일한 질문을 가지고 동일한 답을 얻고자 고군 분투하였던 쉐퍼와 엘룰의 모습은 진흙탕과 같은 우리 시대를 향하여 부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지성과 겸손과 사랑을 소유하며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인도하여 주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교회 성장주의에 찌들려 있으므로 나의 주변에서 죽어가며 소리치는 아우성을 외면하는 지도자와 교회가 아니라 현실의 아픔을 분명하게 목도하면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외치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민족이 가야 할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로 가지고 이끌어주는 지도자 필요한 시대이다.


두 사람에 대한 비교연구는 우리에게 더욱 많은 도전과 흥분을 줄 것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글들이 많이 나오므로 한국교회에 좋은 이정표들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의 쉐퍼와 엘룰을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