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프란시스 쉐퍼 들여다보기 (1) / 신동식

새벽지기1 2016. 4. 15. 06:41


쉐퍼의 출생과 그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은 그를 바로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하다. 특별히 쉐퍼가 그의 사상을 펼치던 시대의 사상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쉐퍼의 출생의 시대를 아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쉐퍼는 1912년에 태어나서 1984년까지 살았던 20세기 최대의 복음 전도자이다. 쉐퍼가 1912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당대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라고 불리는 쟈크 엘룰또한 1912년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시대가 얼마나 위험한 시대였는지를 알고 지성세계에 위대한 사역자를 보내어 준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 사상가들 뿐 아니라 마틴 로이드 존스,빌리 그래함,그리고 존 스토트 같은 위대한 복음의 설교 사역자들을 보내심으로 20세기의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생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시대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대 격변기를 보냈던 시기였다. 

제1절 불신가정의 외아들로서의 유년시절

쉐퍼는 1912년 1월 30일 펜실베니아 저먼타운의 파스토리아 거리의 독일계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기독교 교육을 받아 본적은 있지만 그러나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쉐퍼의 부모는 자신들의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아이를 하나만 낳기로 하였다. 쉐퍼는 외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쉐퍼4세라고 지었다. 쉐퍼의 부모는 쉐퍼가 공학과 디자인 계통의 공부를 하여 편한히 살기를 원했다. 쉐퍼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하고 일하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성적은 올A였다. 그의 가정에서의 삶은 그에게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평범한 불신자의 가정의 삶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의 외부적인 활동이란 11세때 보이스카웃이 후원하는 웅변대회에서 우승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L. G. PARKHUST Francis A Schaeffer: The Man and His Message, 프란시스 쉐퍼 성기문 역 [서울:두란노 1995].pp.33 

쉐퍼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평범한 가정의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쉐퍼를 부르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쉐퍼가 그렇게 강조하였던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 바로 쉐퍼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제2절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으로서의 회심

프란시스 쉐퍼는 16살이 될 때까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쉐퍼는 여전히 불가지론자였다. 억지로 교회만 출석할 뿐이었지 그는 전혀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회심의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17살 때 기독교인이 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의 회심은 단순한 종교적 열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지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쉐퍼는 소련에서 이민온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교재로 구입하여 읽던 [그리스 철학 입문서]를 읽다가 그들의 진리에 대한 기록에 매력을 같게 되었고 이러한 진리에 대한 자극은 그를 교회에로 인도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주의 교회에서 설교를 유심히 들었다. 쉐퍼는 거기서 그 목사의 말은 자유주의적 사회윤리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쉐퍼는 더욱더 철학 서적을 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주의도, 철학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ibid.,pp.33 1800년도 이후에 불어닥친 신학적 자유주의는 실존주의 철학과 함께 온 세상을 뒤엎었다. 칼 바르트를 비롯하여 루돌프 볼트만, 본 회퍼,폴 틸리히,칼 라너등으로 신학적 자유주의는 정통 교회를 뒤흔들었으며 결국 복음의 메시지보다는 사회윤리적인 관점의 설교가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쉐퍼의 고민과 회심이 있었던 것이다.   

쉐퍼의 정직해지려는 열망 속에서 그는 자신의 불 신앙적 모습을 발견하고 교회에 나왔으며 그는 6주 동안에 성경을 통독하고 나서 그는 기독교인으로 회심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에게 경종을 울렸던 것은 창세기였다. 내가 들어 보았던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서도, 철학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참된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았다”]Edith Shaefer, "The Tapestry" [Word Book, Waco,1981]pp.52
라고 말했다.

1930년 8월 그는 어느 천막 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성경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가 진리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는 그에게 의미가 있었으며 논리적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해답과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에 관해서 서로 대화하고 함께 나눌 수 있었던 합리적인 하나의 체계였다.

쉐퍼는 말하기를 “우리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는 진실되다는 것이다. 지식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진실되다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경험적인 관계로 인도하겠지만 기본은 개념이지 경험이 아니다”]프란시스 쉐퍼,기독교 영성과 지성사이의 대화 정혜숙 역[서울: 솔로몬 1994]pp.53  

쉐퍼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하심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제 거대한 20세기의 사상들과의 싸움의 못자리가 준비되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