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프란시스 쉐퍼 들여다보기(3) '초기 목회 사역' / 신동식

새벽지기1 2016. 4. 20. 06:31


제4절 실질적 사역으로서의 초기 목회사역.

쉐퍼는 대학 졸업 후에 메이쳔 교수가 있는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쉐퍼와 에디스는 성경이 주는 진리, 완전한 기준이 되는 객관적 진리를 믿는 메이쳔의 신학을 따라 갔던 것이다.쉐퍼는 메이쳔 외에 탁월한 학자인 코넬리우스 반틸 문하에서도 연구하였다. 쉐퍼의 이러한 신학적 훈련은 그로 하여금 개혁주의 장로교인으로서 평생을 살도록 한 중요한 만남 들이었다. 그러나 신학교2학년때 메이쳔 박사의 사망후에 새 장로교회에 또 다른 시험이 왔던 것이다. 결국 쉐퍼는 맥크래 박사와 그 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델라웨어 윌밍튼의 페이스 신학교를 건립을 도우려고 학교를 떠났다. 쉐퍼는 가을 학기 수업부터 훼이스 신학교에서 수업하였다. 그리고 쉐퍼는 이 훼이스 신학교에서 모든 과정에 평균 A를 받고 처음등록 학생이자 최초로 졸업한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에 쉐퍼는 1938년부터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글로브시에 있는 언약 장로교회의 목사로 봉사하였다. 3년후 그는 성경장로교의 그레이크 레이크 노회의 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쉐퍼는 그해에 펜실베니아 체스터의 성경장로교회의 부목사로 일하였다. 쉐퍼의 목회는 성공적이었다. 빠른 교회의 성장이 쉐퍼의 목회에 있어졌다. 에디스는 쉐퍼가 설교할 때에 그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목사 부인으로서 에디스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책임중의 하나라고 느꼇다.ibid.,pp.51
쉐퍼는 기도와 말씀의 사람답게 많은 이들을 치료하며 특히 신유의 역사도 일어나곤 하였다. 쉐퍼는 자신의 이러한 성취에 대하여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련의 일들이 성경을 믿고 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1943년 쉐퍼의 부친은 돌아가셨고 그해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그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었다. 쉐퍼는 주2회 설교하고 수요일 저녁 기도모임에서는 성경 강해를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자매들에게는 성경공부 인도법을 가르쳤다. 곧 그 도시에 20개 정도의 지하실 방이 생기게 되었다]ibid.,pp.56 
 실질적인 평신도 제자운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쉐퍼의 평신도 제자운동은 그의 모든 사역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기 위한 사역의 주체자들이 바로 평신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은 그의 사역의 동역자들과 그리고 그의 영향아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동역자들의 면면을 볼 때 뚜렷해짐을 볼 수 있다.] 레인 데니스가 엮은 프란시스 쉐퍼의 삶과 사역에 기고한 인물들만 보더라도 그의 사역의 열매가 평신도들 사역에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자녀인 프랭키 쉐퍼 5세가 바로 영화감독을 함으로서 자기 분야에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쉐퍼의 평신도 사역은 그의 사역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쉐퍼의 목회는 실질적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는 신학적이며 지적인 논쟁들에 관해선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는 경험과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그 경험과 감정은 기독교 신앙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기독교 신앙은 모든 부분이 확신할 만한 진리로 이루어진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공유되어야 할 진리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도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믿음 가운데 살아야 한다.L.G.파커스트,프란시스 쉐퍼,op.cit.,,pp.59
쉐퍼의 목회 사역은 참으로 성경을 믿는 이들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체스터에서의 2년 남짓한 사역을 하면서 교회의 건축을 도울 수 있었다. 특별히 그는 교인수가 500명이 넘는 이 교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격이 없는 나눔을 가질 수 있었다. 부두 노동자, 농부, 또는 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성장 배경이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그는 더더욱 관심과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 목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또한 배울려고하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은사임이 틀림이 없다. 20세기의 혼란 속에서 바른 진리를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인 전도자로서의 쉐퍼로만 보는 것은 매우 편견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쉐퍼의 목회사역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었다. 이렇게 훈련된 쉐퍼를 하나님은 또다른 사역에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