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주도홍(기독신대원, 역사신학)

새벽지기1 2016. 3. 8. 21:32


I. 들어가는 말

『기독교 사역 동역회』와 『한국 라브리』가 주관하는 이 특별강의에서 역사신학도인 본인에게 주어진 주제는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이었다. 먼저 그의 72년간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볼 것인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삶을 주장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니까 쉐퍼의 이 땅에서의 영적 순례자의 삶을 추적하게 될 것인데, 특히 그가 추구했던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 곧 구원 이후의 진정한 성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인식하게 될 그의 성화관(聖化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주된 텍스트로서 그의 저서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 1971)을 중심으로 쉐퍼에게 있어서 영성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쉐퍼의 영성은 그의 모든 것을 말한다 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특히 그의 생애와 사역은 라브리 공동체와 함께 하는데, 영성이 곧 라브리 운동의 기본이며, 생명 줄이었기 때문이다. 쉐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책임의 막중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각주는 가장 간략하게 제시하도록 노력했다. 참고문헌을 비교해 보면 금방 자세하게 알게 될 것이다.


II. 다루는 말

1. 생애

1) 어린 시절

쉐퍼는 1912년 1월 30일 미국 펜실베니아의 독일인 촌에서 어머니 베씨 윌리암슨과 프란시스 어거스트 쉐퍼 3세의 독자로 태어났다. 육체 일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노동을 하면서 성장하였다. 사다리를 오르고, 나무를 톱으로 베며, 전선을 바로 교정하고, 파이프를 수리하는 일을 도우면서 셀 수 없는 시간들을 아버지와 함께 잡다한 노동 일들에 익숙하였다. 그 어떠한 지성적인 일을 하기보다는 그저 신체를 쓰는 일들에 종사하는 아버지의 아들로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의 학교생활도 단지 이러한 손재주 개발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그런데, 일찍부터 그의 비범한 지적 능력이 드러나고야 말았는데, 그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문을 연지 20년 역사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두 번째 우수한 학생이라는 편지 때문이었다. 그를 아는 주위의 모든 부모들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직 한 부모만이 이 기쁨에 동참하지 않았는데, 쉐퍼의 부모였다. 이유는 그가 기술학교에 가서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대학의 상아탑에 파묻혀 부모에게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는 잘못된 길로 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2) 청소년기

아버지의 완고함 때문에 고등학교에서도 기술교육 방향으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쉐퍼는 어느 날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의 음악에 매료되었는데, 그일 이후로 고전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전 음악과의 만남은 쉐퍼에게 있어서 새로운 문화적 만남이었다. 두 번째 그가 새로운 환경과 문화를 접하게 되는데, 불신자의 가정의 자녀였던 그가 어느 날 신학적으로는 좀 자유스러운 장로교회에 출석하는 일이었다.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를 통하여 그는 우연찮게 한 권의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헬라 철학서였다. 이 책을 읽는 중 그는 철학에 심취하였고, 인생의 거대한 문제들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17세의 청소년이었던 그가 아무리 자신에게 도전을 준 헬라 철학과 씨름을 하여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6개월 동안 성경을 통독하던 중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으며, 왜 우리는 이곳에 있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 1930년 어느 날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로 헌신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그의 삶의 모든 기준이며, 완벽한 지침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그에게 모든 우주 만물은 분명한 의미를 주고 있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풍요로운 영적 생활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새롭게 자신에게 부딪혀 왔다. 모든 성경이 새로웠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만이 성경을 믿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3) 반대하는 부모

1932년 1월 26일 그는 장차 그의 평생 동안 동역자요 반려자가 될 에디드(Edith)를 만났다. 이제 쉐퍼는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여전히 부모님은 이러한 쉐퍼의 생각을 반대하며, 전기 엔지니어가 될 것을 고집하였다. 아버지는 이러한 아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가까이 위치한 직업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 전기공학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목회자로의 소명은 결코 그를 가만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로 결심하고 버지니아에 있는 헴프덴-시드니 대학(Hampden-Sydney College)에 등록하였다.
비로소 집을 떠나 대학으로 가야하는 아침에 그의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을 때, 아버지의 너무도 강력한 반대에 또 다시 직면하게 되었으며,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재고할 것을 주장하였다. 부모의 뜻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한참을 기도한 후,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동전이 잡혔다. "하나님, 내가 떠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동전에 머리가 그려진 부분을 보여주십시오."하면서 동전을 던졌을 때, 머리가 그려진 동전 부위가 보여졌다. 다시 반복하였다. "하나님, 이제는 동전의 반대 면을 보여 주십시오." 이번에도 역시 동전의 반대 면이 보여졌다. 세 번째 기도를 한 후, "하나님, 이제는 다시 머리 부분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한 후, 던졌을 때 또 다시 머리 부분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 쉐퍼의 확신은 더욱 굳어져서 아버지께는 유감스럽게도,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분명히 믿는 믿음 가운데서 대학이 있는 버지니아로 떠나야만 했다. 이 순간 부모님들은 이제 더 이상 쉐퍼의 결심에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4) 대학시절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쉐퍼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밤샘을 하며 공부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다른 학생들은 술과 향연으로 세월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쉐퍼는 학과를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름대로 사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토요일 밤은 성령이 역사 하는 감동적인 시간이 되었다. 나름대로 전도의 열매가 있었고, 쉐퍼는 가까이 위치한 흑인교회에 나가서 주일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국제 어린이 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시간이 나는 대로 고향집에 와서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교회친구들을 만나곤 했는데, 고향 교회야말로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에 서 있는 장로교회였다. 어느 날 저녁 예배에 한 연합교회(Unitarian) 목사가 와서 청년들에게 특강을 하였는데, 제목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나는 아는가?"(How I know that Jesus is not the Son of God, and how I know the Bible is not the Word of God)였다. 그 자리에서 쉐퍼는 일어서서 1520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외쳤던 것처럼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대적한 쉐퍼의 논증은 그렇게 내용이 뒷받침이 되지 못한 힘이 없는 것이 되어, 못내 아쉬웠다. 이렇게 쉐퍼의 발언이 진행될 때, 젊은 한 여성이 한 편 구석에서 그를 주목하였고, 그가 누구인지를 친구에게 물었다. 그는 프란시스 쉐퍼이며, 부모가 목사가 되려는 그를 싫어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쉐퍼가 발언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제는 그 젊은 여성이 일어나서 단지 쉐퍼가 언급 정도로 끝냈던 내용을 보다 충분하고 명료하게 설명을 했다. 이 때 쉐퍼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제는 거꾸로 쉐퍼가 옆 친구에게 그녀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물어야만 했다. 그녀의 이름은 에디드 세빌(Edith Seville)이며, 바로 얼마 전 토론토에서 이곳으로 이사왔다는 것이었다. 쉐퍼는 비로소 같은 영적 동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선교사의 딸로서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기도와 헌신된 제자의 삶을 배웠다. 또한 신앙의 지성적인 면도 중요시 여기고 있었다. 그녀의 가정에 초대되어 좋은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했는데, 여기서 쉐퍼는 개혁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심도 있는 대화에 참여하곤 하였다. 보다 논리적이고 신학적이었던 그녀가 쉐퍼에게 개혁주의 신학자 그레샴 메이천(Gresham Machen)의 저술들을 소개하였다. 메이천은 두 사람의 신학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3년 동안 사귄 후, 1935년 7월 26일 결혼하였다. 그 해 1월 쉐퍼는 헴프덴-시드니 대학을 최우수(magna cum laude)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5) 신학교 시절

1935년 같은 해 9월 가을 학기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 등록하였다. 여기서 그는 메이천, 코르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 알렌 맥래(Allan MacRae) 등의 교수들과 함께 흥미로운 신학수업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 등등의 문제로 메이천이 성직 정직을 당하는 등의 교단 내의 문제로 학교는 나누어지게 되었다. 메이천은 미국장로교단(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을 세우는데 앞장섰고, 1937년 버즈웰(James O. Buswell Jr.),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그리고 레어드(Harold Laird) 등의 교수들이 함께 나와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와 성경장로교단(the Bible Presbyterian Church)을 따로 세웠다. 1937년 6월 18일 첫째 딸 프리실라의 아버지로서 쉐퍼 역시 이 페이스신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쉐퍼는 1938년 페이스 신학교의 첫 번째 졸업생이 되었고, 역시 첫 번째 목사 안수를 이 성경장로교단에서 받았다. 1938년부터 48년까지 펜실베니아와 미주리에서 목회를 하였다. 목회 초년생으로서 쉐퍼는 어린이들과 청년 사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부인 에디드 역시 이러한 사역에 특별한 은사가 있었다.

6) 영적 위기와 기회

세계 2차 대전 후 1947년 3개월 동안 유럽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났던 쉐퍼는 1948년 유럽으로의 이주를 결정하고, 아내 에디트(Edith)와 세 딸(Priscilla, Susan, Deborah)이 스위스로 선교하기 위하여 짐을 챙겼다. 도착한 곳은 스위스 로잔이었다. 그곳에서 어린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국제 기독교 교회협의회 창립을 도왔다. 그러던 중 1951년 쉐퍼는 영적 위기를 체험하였다. 1년 후 1952년 아들 프랜키(Franky)가 출생하였다.
그럼 이 영적 위기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하기로 하자. 1951년 겨울 어느 날 영적 위기를 인식한 쉐퍼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영성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소명의 확인과 헌신적인 삶의 결단을 새롭게 하였다. 자신의 저서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에서 쉐퍼는 이에 대한 간증을 하고 있다.

"1951년과 1952년에 나는 나의 삶 속에서 영적인 위기를 맞았다. 나는 여러 해 전에 불가지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십 년 동안 목회를 한 후에 내 아내 에디스와 함께 유럽에 건너와 수 년 동안 사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시기 동안에 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입장과 가시적 교회의 순수성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강력한 짐을 느꼈다. 그러나 점차 하나의 문제, 곧 실재의 문제가 내게 다가왔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 정통 신앙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이 기독교의 결과여야 한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의 실재를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내게는 느껴졌다. 둘째, 내 자신의 실재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초기보다 더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내게 점차로 커져갔다. 나는 정직하게 내가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나의 입장 전체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나는 맑은 날에는 산에 올랐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우리가 살던 옛 농가의 건초로 된 다락에서 서성거렸다. 나는 걷고 기도하면서 성경이 가르쳤던 것을 심각하게 숙고하였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들을 검토하였다. ... 점차 나는 내가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의 의미에 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거의 듣지 않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점차 해가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하였고 찬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정말 흥미롭게도 나는 여러 해 동안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았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 기쁨과 찬송이 흘러나올 때에 나는 시(詩) - 확신, 삶에 대한 긍정, 감사, 찬양의 시 - 가 다시 한번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 그 시는 내게 경이로웠던 나의 마음속의 노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과거나 현재나 라브리 공동체의 실질적인 토대이다."(기독교 영성관, 217-218)

어거스틴, 루터에게 찾아왔던 극적 순간처럼, 각성과 헌신에로의 새로운 전환을 체험한 쉐퍼는 3년 동안의 강한 영적 체험을 배경으로 1953년 515일 동안의 미국 방문 중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346회의 강연했는데, 신학적으로는 성화(sanctification)를 다루는 이 내용이 1971년 「참된 영성」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쉐퍼의 영성이 라브리 공동체의 영성이며 라브리 운동의 실질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쉐퍼의 생애와 사역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 라브리(L'Abri) 공동체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라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라브리를 빼 놓고 쉐퍼의 생애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쉐퍼는 이 라브리 영적 포도원의 근면 성실한 일군이요, 소명 받은 충성스런 주의 종이었다. 영적 은신처라는 의미를 가진 불어 라브리(L'Abri)는 쉐퍼를 쉐퍼 되게 한 사역의 현장이요, 꿈이 현실화되는 영적 보금자리였으며, 하나님이 진정 살아 계심을 확인시키는 기적의 실체였다. 쉐퍼에게 있어서 영성이 무언인가를 확실히 보여준다.

"라브리는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특히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아내는 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붙어 싸우기 마련인 기본적인 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사람 모두를 위한 영적 은신처다."(라브리, 15)

또한 라브리는 거룩한 낭만이 있는 사역의 현장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까, 중세 수도원적인 엄격성과 금욕주의적인 타율적 규율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밤이 오면 스위스 알프스에서 얻어진 향기 그윽한 장작들로 지피는 따스한 벽난로 가에서 복음의 풍성함을 실감하고 삶의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율적이고 균형 잡힌 영성이 지배하는 영적 공동체였다.

"때로 음악의 밤을 가질 때면 전에 오페라 가수였던 라브리 일꾼이 멋진 독창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바이올린, 오르간, 첼로 등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라브리, 17)

어떻게 이 라브리 사역은 시작되었는가? 50년대 중반 열심 어린 사역을 위한 기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님,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가르쳐 주소서! 이 때, 큰 딸 브리스길라가 몇몇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는데, 그들은 서로간에 하나의 물음을 놓고 진지한 논의를 하게 되었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아버지 쉐퍼를 그 현장에 불러와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러한 일에 은사가 있었던 쉐퍼는 이제 여러 모습으로 소문이 번져가게 되었다. 결국 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쉐퍼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리고 영적 대화에 진지하게 참여하기를 시작하였다. 어느 듯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토론, 상담, 그리고 기도가 이 모임을 이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라브리 사역은 태동되었다. 사실 이러한 사역을 쉐퍼는 어느 때고 생각하고 계획해 본 적은 없었다.(Burson & Walls, 41)

8) 저작들

그의 저서는 전집 5권으로 미국 일리노이즈 주에 위치한 웨스트체스트( Westchester, Illinois)에 있는 크로쓰웨이 출판사(Crossway Books)에서 1982년 완간 되었다. 「The complete Works of Francis A. Schaeffer」로서 첫 권은 "A Christian View of Philosophy and Culture"라는 주제 밑에 4부로 나누어져 있다 : "Book one: The God Who Is There - Book Two: Escape from Reason - Book Three: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 Book Four: Back to Freedom and Dignity". 두 번째 권은 "A Christian View of The Bible as Truth"이라는 주제로서 5부로 나누어져 있다 : "Book one: Genesis in Space and Time; Book Two: No Final Conflict - Book Three: Joshua and the Flow of Biblical History - Book Four: Basic Bible Studies - Book Five: Art and the Bible". 세 번째 권은 "A Christian View of Spirituality"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4부로 나누어져 있다: "Book one: No Little People - Book Two: True Spirituality - Book Three: The New Super-Spirituality - Book Four: Two Contents, Two Realities". 네 번째 책은 "A Christian View Of The Church"라는 주제로 5부로 나누어져 있다 : "Book one: The Church at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 Book Two: The Church Before the Watching World - Book Three: The Mark of the Christian - Book Four: Death in the City - Book Five: The GGreat Evangelical Disaster". 마지막 다섯 번째 책은 "A Christian View of the West" 주제로 4부로 나누어져 있다 : "Book one: Pollution and the Death of Man - Book Two: How Should We Then Live? - Book Three: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 Book Four: A Christian Manifesto". 필자는 1988년에 제 2판으로 나온 영어 전집을 소유하고 있다.
쉐퍼의 전집은 한국에서도 『크리스찬 다이제스트』의 수고로 번역 완간 되었는데, "I. 기독교 문화관", "II. 기독교 성경관", "III. 기독교 영성관", "IV. 기독교 교회관", "V. 기독교 서구관"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생명의 말씀사』에서도 적은 분량의 단 권으로 하여 전권 22권으로 보급하고 있다. 아무튼 출판사들의 노력으로 쉐퍼의 전집이 독자들에게 우리말로 읽혀지고 판을 거듭하면서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쉐퍼의 사상이 70년대 이후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쉐퍼의 어떠한 점이 한국교회의 독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하겠다. 특히 쉐퍼의 우주적, 균형 잡힌 전인적 영성이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