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과 함께 걷는 목회자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페리파테오라는 헬라어 동사가 사용되었는데요, 직역을 하면 성령과 함께 걸으라는 말입니다. 창 5:24절에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는데 거기에도 ‘걷다’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3년 동안도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기가 힘든데 어떻게 에녹은 300년이나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 있었는지 그의 탁월한 신앙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런 탁월한 신앙 앞에 기가 죽게 되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에녹이 미처 누리지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더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성령의 임재를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1. 구약에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
구약에도 성령이 임재하셨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에야 성령이 임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까지는 우리 주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요 7:39절에 말씀처럼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성령으로는 아직 임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는 선재하신 예수님이 함께하는 성령이 구약 성도들 안에 임재하셨고 역사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전의 개념이 점점 변천되고 있습니다. 성막에서 성전으로 발전되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성전보다 크신 이 곧 예수님이 온전한 의미에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동 성전이셨습니다. 성전의 두 가지 핵심적 요소는,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것이죠. 예수님의 육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거하시고 그 영광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또 다른 요소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몸을 희생 제물로 삼으셔서 영원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성전과 제사 제도를 이제 폐지시키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 2: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성전된 자기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전된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죽이면 그 성전을 허물면, 우리 주님께서 삼일 만
에 부활하셔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세우시는 성전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엡 2:21에 교회를 새로운 성전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엡 5:18절에서 그런 맥락 속에서 새로운 성전인 교회, 과거 구약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처럼 성령이 가득해야 한다, 충만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 눈에 보일 때는 아주 보잘것없고 하찮해 보일지 모르는 공동체이지만,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임재하는 새로운 더 영광스런 성전입니다.
교회가 성전일뿐 아니라 바울 사도는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 소속된 모든 개인 신자가 또한 성령님이 거한 성전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획기적인 개념인데요, 우리는 이것을 너무 많이 들어서 당연시 생각하고 있는데요, 만약에 우리가 구약에 살았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성전이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아마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참람한 죄,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이죠.
구약 성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런 특권이 오순절 후에 사는 하나님 나라가 성령 안에 사는 우리들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이동성전이라는 사실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신약의 경건의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상징입니다.”
2. 성령의 임재와 신자의 삶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에 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보다 더 거룩한 곳에 항상 살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임재가 우리가 행하는 성스러운 일뿐 아니라 우리들의 세속적인 잡다한 일까지 다 거룩한 것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 외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망각하고 무시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순간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있습니다. 내 앞에 마이크가 있는 것, 내 앞에 사람들이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우리들이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일어난 영원 불변의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실현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느낌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들의 변덕스런 감정이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것 같다고 아우성칠 때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며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람데오의 삶이라 할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경건의 핵심은 1인 청중 앞에 선 것처럼 항상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군중 앞에서도 한 분만을 의식하며 살아가며 나 홀로 있을 때에도 한분을 의식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한결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이런 경건훈련, 하나님의 임재 사실을 의식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려고 하는 훈련들을 우리가 분주한 삶 속에서 소홀히 하고 살아가고 있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령을 좇아 걷는다는 말씀에서 ‘걷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듯이 매일 일상적인 일 속에서 성령님과 함께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때는 제 멋대로 살다가 우리가 필요할 때만 성령의 임재를 구할 때가 많습니다. 평상시는 성령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살지 않다가 설교하기 전에 우리들이 발작적으로 기도해서 성령의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일수록 성령을 팔아서 사기치려는 일들이 많아져 갑니다. 성령을 우리가 사랑하고 순종해야 할 인격적 대상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영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입으로는 비록 삼위일체를 고백할지라도 실제로 성령의 인격성을 현저히 무시하는 이위론자, 이단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붕괴하는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주의 일을 행하는데 능력과 은사를 구했지 매일의 삶속에서 인격적인 임재와 교제는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평상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거스리는 삶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거짓 선지자와 종교적 사기꾼의 유사한 특성들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열매로 알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 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우리 전인의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열매와 신자의 자유
성령의 열매는 주의 일을 할 때만 능력과 은혜를 체험해서는 열리지 않습니다. 평상시에 매일의 삶 속에서 조심스럽게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만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은밀한 삶 속에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고 오히려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산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 5:22절에 열거되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것은 구속의 목적과 직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 사람을 창조하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이고 경륜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고 성령이 우리 안에 새 언약을 실현시켜 주시는 능력의 영으로 내주하셔서 지금 강력하게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 성령의 열매를 맺히지 못하면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이 우리 안에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효력이 우리 안에 이뤄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성령을 현저하게 거스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무 율법주의와 율법주의라는 두 극단에 대항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경건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자유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가 역설하는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또한 무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주의에 대항해서는 할례 같은 율법의 규례로부터의 자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헛된 수고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율법주의에 대응해서는 율법을 팽개치고 제멋대로 사는 방종과 불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던 유대인들은 유대전통을 고집하던 크리스천들은 율법의 틀을 깨뜨리면 도덕적 해이와 무질서를 초래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틀보다는 성령의 자유가 훨씬 더 효과적으로 윤리적인 방종을 막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율법의 참된 요구를 이루는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적 노력과 열심히 이룬 경건은 아주 경직되고 도덕적이고 음울하고 성령의 자유함 가운데 맺은 성령의 열매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성령의 열매를 열거함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틀은 외부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강요하지만 그러나 경건한 삶과 순종의 원천인 우리 마음은 새롭게 해 주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율법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이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능력을 부요한 은혜로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4. 성령의 능력따라 사는 신자의 삶
성령은 새언약의 영입니다. 새언약은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과 똑같은 요구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그 요구를 이루어주는 은혜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의 완고한 불순종의 마음을 할례해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그런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새언약의 내용이죠. 하나님의 법을 우리 심비에 심어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심어준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의 마음이 간절히 원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상태로 우리 마음판을 갈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할례를 받고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기 전에 우리들의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혐오하는 완고한 마음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대상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명령만큼 우리들에게 곤혹스러운 요구는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혁신되었기 때문에 내가 가장 원하는 것, 내가 가장 바라는 것, 내 마음이 진정 사모하는 것을 율법이 행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나뉘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분열된 마음, 육신의 소욕을 따르기도 원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도 원하고, 그래서 두 사이에서 항상 머뭇거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항상 온전히 행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분열된 마음을 치유하여 주셔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입니다. 하나만을 온전히 마음으로 좇을 수 있는 자유가 성령께서 주
시는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 사도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4절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롬 6:6의 말씀과는 아주 다릅니다. 롬 6:6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에게 객관적, 수동적으로 이뤄진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능동적으로 행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수동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들이 능동적으로 그 일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실이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능력을 부요한 은혜로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통해서, 그 능력을 따라서 우리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객관적 사실이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주관적으로 체험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의존해서 우리들의 육신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적극적인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자존감이 너무 낮은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상이 너무 빈곤합니다. 땅에 속한 세상 사람들의 수준을 훨씬 능가할 만큼 우리들의 자존감이 높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땅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는 말
바울 사도는 롬 5:5에서 이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만을 바라고 주를 위해 살 때 세상에서 전혀 인정을 못 받을 수가 있고 오히려 세상적 기준으로 실패자, 낙오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위축되고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바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 영광이라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망상을 지금 좇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이 소망이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은혜로 때를 따라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너는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부요한 의식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이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서 듣게 될 종말론적 칭찬과 인정을 미리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 귀에 들려주십니다. ‘착한 종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인정하노라 내가 기뻐하노라.’
이런 성령님의 위로가 간간히 우리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의 열심을 자극하는 최고의 모티브가 되고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성령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광과 비전에 의해서 우리들의 마음이 매료되고 하늘의 능력으로 덧입음을 받아서 이 어두운 이 땅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하늘의 풍성함을 이 땅에 전달하는 그러한 사역을 감당하는 그런 우리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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