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을 지나며 깊어지는 영성
숨겨진 하나님의 얼굴’, 이것은 신자의 삶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 얼굴을 감추시는가? 왜 그들의 고통과 신음과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지만 그 약속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은 어찌된 일인가?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하심이 항상 함께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아주 멀리 떠나 계신 것 같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실제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에 미지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임재를 여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은 알지만 도무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지 않는 것같이 느껴질 때, 또는 계셔도 우리를 전혀 돌아보시지 않는 것만 같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낙심되고 지쳐서 영적훈련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어두운 영혼의 밤을 거치면서 사실상 우리는 최대의 영적 위기를 만나는 동시에 최상의 성숙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하나님의 버려두심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이 영적 어두움은 결코 소수의 사람에게만 국한된 특이한 경험이 아니다. 성령의 빛을 잃고 죄 속에서 방황하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가장 거룩한 성도까지도 면제될 수 없는 보편적인 경험이다. 스펄젼(Spurgeon)은 더 귀히 여김을 받는 주의 종일수록 더 많은 어두움의 시간을 맛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1
씨 에스 루이스(C.S. Lewis)는 신비롭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들을 버리신다고 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겼던 이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했다.2
예수님이 참으로 버림받은 자이며 그의 애처로운 절규가 버림받은 자가 드리게 되는 기도의 원형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는 시편 기자의 울부짖음(“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 22:1)은 주님이 하신 절규의 작은 반향이며 메아리이다.
이러한 외침은 불신앙에서 발원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역설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을 굳게 믿기에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슬픔의 감정을 토로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굳게 믿었는데 그 기대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시고 버리시는 실제 상황에 처할 때 철석같이 믿었던 이에게 배반당한 것 같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간섭과 도움을 구하는 애절한 기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전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오랜 침묵만이 계속될 때 우리 마음속에서는 ‘왜, 어찌하여’라는 의문의 절규가 솟구쳐 올라온다. 이같이 절규는 믿지 않는 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참으로 믿을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부재가 실제 상황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대한 증언
수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경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 부재의 경험을 가리켜 그것을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Soul), ‘알 수 없는 구름’(The Cloud of Unknowing)3, ‘하나님의 버려두심’(God's desertions),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해 왔다.
성 요한(St. John of Cross)이 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책은 이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고전에 속한다. 이 책은 영적 어두움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과 신비주의 사상이 깔려 있어 개신교 신자들이 읽을 때에는 각별한 주의와 분별력을 요한다.
이 책의 핵심 논지는 신인합일의 단계(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에 들어가기 위해 보통 수년간의 극심한 고난, 즉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쳐 영혼이 온전히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연합은 개신교에서 이해하는 것과 같이 영성의 근원과 바탕이 아니라 영적 수련의 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연합은 수양과 고난을 통해 정화된 결과로 획득한 경건의 성취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고난과 수고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수고의 대가로 값없이 주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울러 저자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적활동을 멈추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감성적, 지적 기능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비주의 특유의 논점 곧, 믿음으로 거듭난 인간일지라도 지성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상이 확연히 드러난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서적으로는 청교도 목사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이 쓴 「어둠 속을 걷는 빛의 자녀들」(A Child of Light Walking in Darkness)이라는 책이 있다.4 그리고 조셉 시몬즈(Joseph Symonds)의 저서(The Case and Cure of Deserted Soul)도 영적 어두움의 여러 가지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5 .스펄젼도 그의 설교에서 이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죄로 인해 영적인 어두움이 신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세밀히 분석한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설교도 읽어볼 만하다.6 좀 더 현대에 들어와 쓰인 책으로서는 로이드 죤스(M. Lloyd?ones)의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를 들 수 있다.7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신앙의 어두운 측면을 다루는 가르침이나 메시지를 좀처럼 접하기가 힘들다. 현대교회에는 축복, 형통, 성공 일색의 메시지가 범람하고 있다.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가 신자들이 겪는 실존적 고뇌에 와 닿지 않는 피상적인 설교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말씀이 실존에 깊숙이 침투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좀더 현실적 고난의 깊이에 천착함으로써 실존의 심층적 차원까지 담아 낼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죄로 인한 어두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숨기시고 어두움 속에 우리를 버려두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성경을 통하여 이에 대한 몇 가지 원인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먼저 왜 영적 어두움이 임하는가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가 계속되는 죄 속에 살게 되면 성령께서 근심하시며 성령의 은혜도 소멸되게 된다. 성령의 위로와 기쁨이 떠나가고 구원의 감격이 사라져 심령은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황량해진다. 그 때 하나님이 마치 자신을 떠나시고 버리신 것 같은 영적 비애와 황폐함을 경험하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는 그의 설교에서 실제로는 수많은 신자들이 죄로 인해 극심한 영적 어두움과 곤고함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통찰하였다. 신자에게 영혼의 어두운 밤이 빨리 끝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이유는 그 문제의 근원인 죄가 온전히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주장에 의하면, 신자가 죄를 확실히 도살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고 성령의 위로와 소망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는다. 만약 죄가 처리되지 않은 채 성령의 달콤한 위로와 평강의 은혜가 회복되면 그 은혜는 오히려 죄짓는 삶에 더욱 담력과 위로를 안겨주는 요인으로 역기능 할 수 있기 때문이다.8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그의 자녀들이 죄에서 철저히 돌이킬 때까지 그 얼굴을 숨기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5:15~6:1).
이 시대의 교회도 과거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성령을 근심케 하므로 영적으로 암울한 바벨론 포로기를 맞이한 것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그 얼굴을 숨기셔서 우리 가운데 그 영광스러운 임재가 떠난 것 같은 영적인 황량함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군대에서 단체로 기합을 받듯이 하나님의 연대 기합을 받으며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의 손길 아래 있는 듯하다.
신자가 겪는 고난 중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가 바로 징계로 오는 고난일 것이다. 이 고난이 견디기 힘든 것은 대개 아무런 내적 위로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힘든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성령의 위로라도 있다면 그 고난을 거뜬히 이길 수 있으련만, 징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싸늘한 뒷모습과 하나님의 적막한 고요와 침묵, 그리고 칠흑과 같은 월식뿐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심정의 공허함과 비참함 때문에 영혼은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시편 기자의 표현대로 그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시 77:2).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심은 징계를 더욱 효력이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면서 웃으면서 징계의 말을 한다면 징계를 받는 그 자녀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장난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책망하고 훈계하실 때 우리가 그 책망을 뼈아프게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향한 그의 영광스러운 미소의 얼굴을 잠시 베일로 가리신다. 그래서 죄를 깊이 의식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미소띤 얼굴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여 구하게 하신다.
영혼의 젖떼기
그러나 영적 어두움은 꼭 죄에 대한 징계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선진들은 영적 어두움을 신앙이 성숙하는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홍역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우리의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달콤한 영적 감정을 자주 느끼게 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즐거움과 예배의 감격을 느끼게 하신다. 또 우리의 기도에도 잘 응답해 주신다. 이런 좋은 영적 위로나 은혜가 초신자들에게는 신앙에 열심을 내게 하는 자극제가 되며 어느 정도 그들 신앙의 버팀목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부패성 때문에 이런 영적인 위로와 감미로움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거기에 탐닉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좋은 영적 느낌이나 감격이 없으면 은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감정에 중독되어 그런 것이 없으면 신앙 생활하기가 힘들어지고 신앙의 열심이 식는다. 결국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을 섬김으로 누리게 되는 영적 행복감에 마음을 더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좋은 영적 감정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쳐가는 우상, 즉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즐거움이라는 쾌락의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신앙의 초점이 영적인 기쁨과 혜택에 쏠리게 될 때 참된 신앙의 본질은 왜곡되고 영적인 즐거움은 오히려 신앙의 성숙에 큰 걸림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감각적인 위로와 영적 요람을 거두어 가신다. 우리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시기 위해 영혼의 젖떼기 훈련을 시작하신다. 우리를 황량한 사막으로 내모심으로써 감정적으로 매우 메마른 시기를 거쳐 가게 하신다.
거기서 육적이고 세속적인 불순물이 혼합된 우리 신앙의 열정과 감성을 정제하고 순화하신다. 과도하게 고조된 종교적 흥분과 광신적인 열심을 가라앉히는 영적 냉각기를 거치게 하신다. 큰 기쁨과 감격이 없이도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최대 관심과 만족으로 삼는 신앙을 갖게 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가’는 영적 달콤함과 기쁨이 고갈된 메마른 광야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기쁨과 감격이 넘칠 때는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면서도 치열한 내적 싸움과 힘겨운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적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고 기쁨에 취해서 쉽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게 된다.
토저(A. W. Tozer)의 말처럼, “큰 영적 기쁨이 있을 때는 많은 신앙을 요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 축복의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보다 우리자신의 기쁨을 더 의지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가끔 그의 내적 위로를 우리에게서 거두셔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신뢰의 바탕을 두어야 할 반석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 필요하다.”9
신앙생활에 있어서 좋은 감정은 매우 중요하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성령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쁨을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은혜가 없는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존 뉴튼(John Newton)도 이러한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이런 감각적인 느낌이 희미하고 저조할 때 참된 믿음의 연단과 은혜 안의 성장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영혼은 주 안에서 기뻐할 때보다 그를 향해 목말라하고 애통해 할 때 더 번성하는 상태에 있으며, 산 위에서 노래할 때보다 골짜기에서 분투할 때 더 신실한 가운데 있을 수 있다. 어두운 시기는 믿음의 위력이 가장 확실하고 강하게 나타나게 한다.”10
우리에게는 성령의 위로와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누릴 수 있는 이 축복은 다만 천국의 맛보기(foretaste)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완전한 천국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따라서 신자는 천국을 맛보는 것으로 자족함을 배워야 한다.
아직 보류된 천국의 축복을 성급하게 청구하는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의 오류를 피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희열과 신비적인 체험을 갈구하다가 체험주의와 광신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영적 체험과 좋은 영적 감정을 추구하는 데 더 많은 신앙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어리석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가 그의 책 「기쁨에 놀라서」(Surprised by Joy)에서 잘 지적했듯이, 기쁨은 고속도로의 이정표와 같다. 우리가 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사인과 같은 역할을 한다.11
그러나 그 기쁨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나 관심은 아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예루살렘, 즉 천성이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성을 향하여 가는 것이다. 우리는 기쁨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러한 기쁨이 없을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과 열정을 다해 섬긴다.
어두운 밤은 믿음이 가장 잘 자라는 시기
감옥에서 오랜 핍박과 고난의 밤을 지내야 했던 사무엘 루터포드(Samuel Rutherford)는 그의 옥중서신에서 “밤과 그늘이 화초에 좋고, 밤의 달빛과 이슬이 계속되는 태양빛보다 낫듯이, 특별한 필요를 위한 주님의 부재하심이 오히려 영혼을 성숙케 하는 효력이 있고, 겸손에 수액을 공급하며 영적 배고픔을 심화하며 믿음이 자랄 수 있는 적절한 토양을 제공한다”고 했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에서 필립 얀시(Philip Yancey)도 “가장 혼란스러울 때, 안개가 자욱하게 꼈을 그 때가 바로 믿음을 가장 잘 자라게 하며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시기”라고 설파했다.12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 같고 기쁨과 감격이 충만하며 기도가 놀랍게 응답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 분명히 보일 때 하나님을 못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멀리 떠나계신 것 같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으며, 아무런 도움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어둡고 실망스러울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의 결단을 요한다.
모든 것이 확실하고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을 때에는 더 이상 믿어야 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는지,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시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영적인 암흑기야말로 진정한 믿음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의 신앙은 이 어두운 시기를 통과하며 다시는 쉽게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월터 카이저(Walter Kaizer)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고통과 기다림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동안 주님의 은혜 가운데 가장 크게 성장해 왔다. 나는 골짜기에서 체험한 더 깊은 진리와 확신을 부드럽고 평탄한 삶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13
신앙의 어두운 측면을 무시한 채 축복과 형통함, 능력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번영신학이나 영광의 신학은 신앙의 참된 성숙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신자를 영적 유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피상적 영성의 수준을 결코 뛰어넘지 못하게 한다.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세실 머피가 말한 것처럼 “밝은 빛이 비추는 길을 달려가는 것보다 어둠 속에서 믿음으로 힘겹게 내딛는 한 걸음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할 수 있다.”14
고통스러운 상황이 우리를 짓누르고, 하나님마저 한 가닥 위로의 얼굴빛을 비쳐주시지 않는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놀라게 하는 신앙이다.
이것은 짙은 먹구름을 뚫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믿음의 눈을 가진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신뢰하며 감사하고 찬양한다. 스펄젼은 우리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듣기 좋아하신다고 했다.15
하나님의 귀에 가장 감미로운 찬송은 바로 ‘밤에 부르는 노래(Song in the night)’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 이런 믿음의 단계에 이르도록 우리를 연단하신다.
골고다 언덕에 메아리치는 절규 속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참으로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와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잠시 가리우시지만 그의 진노하심으로 얼굴을 가리시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처절하게 버리심을 당하셨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참혹한 저주의 버리심은 없다.
우리의 죄에 대한 징계로 잠시 얼굴을 숨기시지만 그것은 결코 죄에 대한 형벌이나 진노가 아니다. 우리들의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한순간도 떠나지 않으신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아들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사랑을 조금도 약화시킬 수 없다. 우리를 바라보실 때마다 우리를 향하여 무한한 기쁨과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의 연단과 영적 유익을 위해 그 영광스러운 얼굴빛을 베일로 잠시동안 가리우실 뿐이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성령이 떠나가신 것은 아니다. 젠킨(Thomas W. Jenkyn)이 지적한 대로, 다만 성령의 교통하심(Communion)과 성령의 효과적인 사역(effcacious operations)을 거둬 가실 뿐이다.16
그래서 비록 성령의 기쁨(the joy of the Spirit)은 떠날지라도 그 기쁨의 성령(the Spirit of joy)은 여전히 내재하신다.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재는 단지 우리 의식의 차원에서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부재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의 분명한 반증이다.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불신자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음에도 그 부재를 깊이 인식하지 못한다. 더욱이 그로 인해 낙심하거나 고뇌하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실제로 함께 하시는 신자만이 그분의 부재를 더욱 깊이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재의 느낌을 하나님의 임재의 달콤함을 더욱 사모하게 하는 자극제로 사용하신다.
우리같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없는 자들도 자신이 조금 경험하고 조금 신뢰한 하나님이 외면하는 것 같을 때에는 견딜 수 없이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하물며 영원 전부터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고 사랑하던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처절하게 저주받아 버림받은 주님의 참혹한 심경과 괴로움은 어떠했겠는가? 영원 전부터 자신을 향해 한 순간도 가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얼굴빛이 진노와 저주의 얼굴빛으로 돌변하고, 그 진노의 무시무시한 형벌과 심판이 임하고, 하나님께 처절히 버림받아 음부의 고통에까지 내던짐을 받을 때 그 심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는가? 그 고통은 필설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는 십자가 고난의 참혹함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겪으신 영적인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가히 비할 수 없다.
성경은 그가 십자가에서 당한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의 육체적 고난을 자세히 묘사해서 사람들의 센티멘털한 감정을 자아내려 하는 것은 과연 성경적인지 의문스럽다. 상대적으로 성경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데서 오는 극심한 주님의 심적 고뇌와 참담한 심경을 심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 26:38)고 그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셨고, 하나님께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고 기록함으로써 주님의 심적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난의 절정에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진 이 처절하고 애처로운 외침 속에 우리들의 모든 고난 속의 부르짖음이 삼키운 바 되었다. 이 골고다의 외침 때문에 우리들의 부르짖음은 더 이상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절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지극히 사랑받는 자의 애가가 되었다. 하나님과 끊어지는 처절한 비극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연합으로 들어가는 구애의 외침이 되었다.
우리는 어두운 골짜기에서의 신음과 절규를 통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부르짖음의 놀라운 구속적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다. 그 고난의 깊은 사랑을 알게 된다.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는 자기가 자주 겪었던 영적침체와 고통의 심연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더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런 어두움의 경험이 없이는 결코 십자가 고난의 신비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의 말대로, “자신이 ‘깊은 곳’에 있어 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지 못하고 측량하지 못할 것이다. 깊은 곳에 있어 본 사람만이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던 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볼 것이다”.18
결국 우리의 깊은 고통과 비참의 심연에서 우리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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