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계에서 난무하는 참으로 해괴한 행태는 주님의 일이며, 선교와 전도를 위한 일이라는 명분을 붙이면 거의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거룩한 명분을 둘러대는 것이 비판의 화살을 피하는 성역을 구축하고 그 속에서 안전하게 세상과 육신의 소욕을 채울 수 있는 비결이다.
그 중에 하나가 교계에 깊이 침투해 있는 기독교 상업주의이다. 며칠 전에 대표적인 기독교 TV 방송사의 회장이 수백억 원의 회사 돈을 횡령해서 개인 사업에 유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검찰수사가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수사결과가 나와 봐야 사건의 진위를 알 수 있겠지만, 그런 가능성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다.
유명한 목사들까지 동원하여 기독교 TV 방송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역에 얼마나 효과적인 방편인지를 교인들에게 설득하여 후원을 요청하기 일쑤인데, 그 방송 내용이 과연 복음을 증진시키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복음의 빛을 가리며 기독교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지 매우 우려스러울 때가 많다.
개신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광고효과가 있는 듯하다. 지식의 일천함과 영성의 바닥을 드러내는 설교, 은혜가 없는 메마른 심령과 영감이 없는 머리에서 쥐어짜낸 것 같은 설교가 듣는 이들을 괴롭게 한다. 단골메뉴로 방영되는 설교는 많은 후원금을 내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이다.
이미 여러 가지 비리로 세상법정에서 실형까지 선고받고도 당당히 세상죄악을 손가락질하는 뻔뻔한 목사의 역겨운 얼굴이 안방에까지 버젓이 등장한다. 기복신앙과 번영 신학, 성장제일주의로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불러오는데 일역을 담당했던 대형교회 목사들의 구태의연한 설교들이 영상을 주름잡는다.
거기에 웃기는 설교가 항상 양념처럼 깃들인다. 영적으로 어둡고 혼란한 한국교계에 절실하게 필요한 선지자적 메시지나 복음의 진수를 담은 설교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행히 좋은 설교들이 간간히 방영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용이 부실하고 신통치 않은 설교가 더 많고 제발 방송되지 않았으면 좋을 설교들도 부지기수다.
비기독교인들도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우연찮게라도 기독교 방송을 접하게 된다. 그들이 그런 방송을 보고 기독교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을까? 기독교 방송이 그들에게 한국교회를 보여주는 일종의 얼굴 역할을 한다. 비성경적이고 경박한 내용의 설교는 그들에게 기독교의 이미지를 현저히 왜곡시켜 일그러진 교회의 얼굴을 보여 줄 뿐이다. 그리하여 전도의 매체가 되기보다 전도의 문을 막는 방해꾼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 TV 방송이 기독교의 위상을 드높이기 보다는 오히려 더 추락시키는 역기능을 해온 것이 아닌지 깊이 자성해보아야 한다. 이 방송을 시청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기독교 방송사의 상업주의로 인해 기독교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을 방관만 하지 말고 비판과 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일반 TV 방송 시청자들도 드라마와 프로그램을 모니터하며 더 좋은 방송을 위한 조언과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하물며 주님과 교회의 얼굴에 먹칠하는 방송을 보면서도 비판의식이 마비될 정도로 은혜가 충만하여 모든 것을 묵과하고 태평 자약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기독교 TV 방송이 표방하는 바와 같이 진정으로 전도와 선교의 효과적인 매체가 되려면 기독교 방송에 깊이 스며든 기독교 상업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순수한 복음방송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많은 후원금이 끊어질지라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달되는 설교,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풍성과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모범적인 설교만을 선별하여 방영할 때 기독교를 증진시키는 전도 매체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지금 처한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 긴급한 회개와 각성을 외치는 음성이 울려 퍼지는 방송이 된다면 한국교회를 일깨우고 새롭게 하는 강력한 부흥의 매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역을 위해서 난립해 있는 기독교 TV 방송들을 가톨릭 TV 방송처럼 단일화하고 선교적 차원에서 범교회적으로 지원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강단의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키고 복음의 진리를 변질시키는 설교는 걸러내 주기 바란다. 정말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떤 목사들(여기에는 여자 목사도 포함됨)의 설교는 제발 내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교내용은 부실하고 말의 표현과 자세는 경박하기 짝이 없는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제 그만 방영하자.
목사들도 기독교 TV에 자신의 설교가 방영이라도 되면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고 자기 교회선전과 성장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여 재정적으로 무리해서라도 방송을 타려고 한다. 어떤 목사는 자신을 너무도 모르는 것 같다. 듣기가 참으로 민망한 설교를 자신은 아주 잘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자신의 설교가 방방곳곳에 울려 펴지는 것이 낯 뜨겁지도 않은가보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니 말이다. 이것을 담대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두운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 셈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아름다운 성령의 얼굴을 보여주는 이들이 희소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그런 이들을 분별하는 영적 지각이 마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모습이 이 아름다운 얼굴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적으로 벌거벗은 모습이 영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데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성령을 통해 이 아름다운 얼굴빛이 비출 때 우리는 우리의 부끄럽고 추한 얼굴을 가리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외칠 것이다. 회개는 자기 발견에서 오는 부끄러움에서부터 시작한다. 에스라가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스9:6) 라고 했듯이 말이다.
요즘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주위의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해 죄송하다. 또한 목사로서 교인들 앞에 서기가 부끄럽다. 신학교 선생으로서 신학생들 앞에 서기도 미안하다. 내가 아름다운 성령을 멋지게 강의하여 아름다운 성령의 얼굴을 가진 자처럼 멋지게, 아니 거의 완벽하게 연기해 많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 왔기 때문이다.
아마 영적으로 예민한 분들은 다행히 속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제는 가면 쓴 삶을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어졌다.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며 심히 부끄러운 내 얼굴을 드러내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주님께서 자비와 긍휼의 얼굴빛을 비추어 참 내 얼굴, 아름다운 성령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반영하는 얼굴로 찾게 해 주시기 바란다.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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