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라는 것, 행위 없이 구원받지만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1.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고민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분명히 헛것이고, 행함이 없는 구원은 없는 것이 확실한데 그렇다면 행함이 과연 가능하냐,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 고민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당장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 욕하지 말라,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원수를 사랑하라,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마태복음5-6장).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했습니다(마5:48).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들이 정말 그렇게 행합니까? 형제에게 노하지 않습니까?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지 않습니까?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치게 합니까? 원수를 사랑합니까?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합니까? 어림반푼어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실력으로는 단 하루도 그렇게 행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뱅, 바르트도 그렇게 살지 못했고,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 15편도 봅시다. 시편 15편에서 다윗은 주님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님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냐고 물으면서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 높은 이자를 받지 않는 사람,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성산에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삽니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은 더러 있겠지만 온전히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마음으로는 다들 이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않고 원하지 않는바 악을 행합니다(롬7:19).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기는 하지만 의를 행하지는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민이고 갈등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만큼 살지 못하는 것, 믿음과 행위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자,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대부분은 두 가지 방식으로 풉니다. 하나는 행위를 중심으로 풀고, 또 하나는 믿음을 중심으로 풉니다. 행위를 중심으로 푸는 자들은 ‘할 수 있는 노력 다 해봤는데 결국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더라. 나는 역시 구원받지 못한 것이 분명해’ 하면서 끝없이 행위로써 자기 구원을 판단하고 의심합니다. 자기 행위가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절망하고 흔들립니다. 비슷하게라도 사는 것 같으면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날뛰다가도 세상의 시궁창에 빠지고 나면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놈이 무슨 구원을 받아. 나는 아직 멀었어.’라고 의기소침해합니다.
믿음을 중심으로 푸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못살아. 그러니 행위는 볼 것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확실해’ 하면서 오직 믿음만 주창하고 의지합니다. 행위는 아예 배제하고 믿음만 내세웁니다.
2.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고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행위를 중심으로 풀거나 믿음을 중심으로 풀어가지고는 믿음과 행위 사이에 있는 간격이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주장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주장이 통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에 치우치든지 행위에 치우치든지 좌우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루터도 이 문제로 깊이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결국 믿음에 치우쳤습니다. 루터는 바울의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면서 ‘누구라도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박사모를 그에게 씌워주고 그가 나를 바보라 부를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야유하면서 신약성경의 일부로 인정하기를 주저했습니다(권연경. 행위 없는 구원? 41쪽. 재인용). 대부분의 교회 또한 바울의 가르침에만 귀를 기울였지 야고보의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왜 한쪽에서는 행위로 믿음을 의심하고, 한쪽에서는 믿음으로 행위를 배제하는 것일까요? 구원을 통시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큰 틀에서 보지 않고 믿음과 행위의 차원에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단순하거나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구원은 매우 복잡하고 입체적입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측면과 두 가지 양태가 입체적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적 측면, 현재적 측면, 종말론적 측면이 중첩되어 있고, 양태적으로는 수동태와 능동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바울 서신을 통해 확인해봅시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과거시제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현재시제의 구원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고 미래시제의 구원을 말합니다.
바울은 구원을 한 가지 시제로 말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세 가지 시제로 말합니다. 더욱이 과거시제의 구원을 말할 때는 ‘구원을 받았다’고 전적인 수동태를 쓴 반면, 현재시제의 구원을 말할 때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능동태를 씁니다.
이처럼 구원에는 세 가지 측면과 두 가지 양태가 입체적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적 측면, 현재적 측면, 종말론적 측면이 중첩되어 있고, 양태적으로는 수동태와 능동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분명히 하나인데 어느 때는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과거시제로 말하고, 어느 때는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미래시제로 말합니다. 어느 때는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니 너희는 그저 받기만 하면 된다’고 수동태로 말하고, 어느 때는 ‘네가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능동태로 말합니다. 참 복잡합니다.
3. 사실입니다. 구원은 단순하거나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구원은 매우 복잡하고 입체적입니다. 우선 구원은 사건적이면서 과정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시작이고, 예수님의 재림이 구원의 끝인데, 이것은 사건적입니다. 한 번의 사건으로 구원이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인해 구원이 성취됐고, 예수님의 재림 사건으로 인해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구원은 지금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에 있는데, 이것은 과정적입니다. 끝없이 반복하면서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사건적이면서 과정적이고, 단회적이면서 반복적입니다. 구원은 이미 성취됐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Already not Yet).
신학적으로는 구원의 과거적 측면을 칭의라 하고, 현재적 측면을 성화라 하고, 종말론적 측면을 영화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측면이 시간 순서를 따라 평면적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입체적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칭의 속에 성화와 영화가 들어와 있고, 성화 속에 칭의와 영화가 들어와 있고, 영화 속에 칭의와 성화가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봅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행했습니까? 교회 안에서 시기하고 분쟁했습니다.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갈라져 싸웠습니다(3:3-4). 5장에 가면 한 술 더 뜹니다. 어떤 성도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첩)를 취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5: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시기와 분쟁을 일삼았고, 이방인들도 행하지 않는 음행을 행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현실입니다. 또한 이것이 구원의 현실입니다.
조금만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롬5: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요1:12), 영생을 얻었다(요5:24), 죄에 대해 죽었다(롬6:11),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롬6:22)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이 구원을 흔들지 못합니다(롬8:38-39).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지만 화평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 죽고 죄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삽니다. 영생을 얻었지만 영생을 살지 못하고 다 죽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도 100% 진실이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도 100% 진실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것도 100% 진실이지만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다는 것도 100% 진실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것도 100% 진실이지만 죄에 대해 죽지 않은 것도 100% 진실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이 안 됩니다. 모순입니다. 그러나 둘 다 진실입니다. 둘이 모순인데 둘 다 진실입니다.
결국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측면과 두 가지 양태가 입체적으로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말할 때에는 항상 구원의 세 가지 측면과 두 가지 양태를 통시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통시적으로 봐야 믿음과 행위 사이의 간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지만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의 구멍 뚫린 현실, 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부족한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구원을 통시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통시적으로 구원 전체를 보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기독교장로회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회는 현재의 구원에 치우쳤고, 보수적인 교회는 과거의 구원에 치우쳤고, 구원파는 보수적인 교회보다 더 광적으로 과거의 구원에만 집착했고, 대다수의 이단들은 미래의 구원에만 매달렸습니다.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사건으로서의 구원’인 칭의에만 집착했지 ‘과정으로서의 구원’인 성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칭의와 성화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갈등했습니다. 믿음과 행위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고 극복하기는커녕 믿음이냐 행위냐를 놓고 끝없이 싸웠습니다. 목사도 설교할 때마다 믿음이 부족해서 승리하지 못한 것이고, 기도하지 않아서 말씀대로 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성도들을 책망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김진 박사는 이 모든 게 지향적 목표를 현재적 목표로 오해하는 데서 빚어진 부작용이라고 설명했습니다(구원 이후의 여정은). 가령 죄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죄 없이 흠 없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엡1:4-5),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기 원하시니까(고전1:8) 마땅히 죄 없이 흠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죄 없이 흠 없이 살지 못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천만 번 40일 금식을 해도 죄 없이 흠 없이 살지 못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원수를 마주치면 어떻게 되나요? 원수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가라앉았던 분노가 솟구쳐 올라옵니다. 멍울졌던 응어리가 되살아납니다. 얼굴 표정이 차갑게 굳습니다. 속으로 ‘에이 뒈져라’는 말이 튀어 나옵니다. 예수님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것뿐이지 목 천장까지 튀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실상을 모르실까요? 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걸까요? 당연히 압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40일 금식을 천만 번 해도 죄 없이 흠 없이 살 수 없다는 것,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 다 압니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실까요? 죄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 죄 없이 살라고 요구하실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그렇게 사는 것만이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요구하시면서도 압니다. 아직은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놈도 당신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 압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구원에서 탈락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현재적 목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향적 목표로 주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살아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지향적 목표로 주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향적 목표인지 현재적 목표인지를 구별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순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믿음을 강화하고 순종을 닦달하면서 순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됩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됩니다. 40일 금식을 천만 번 해도 안 됩니다. 아무리 믿음을 강화하고 순종을 닦달해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정죄합니다. 나는 안 돼, 나는 안 돼, 하면서 자신을 정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식과 위선으로 자기를 감춥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속내를 감추고 사랑하는 척, 속에는 교만이 가득한데 겉으로는 겸손한 척 외식을 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행위는 팽개치고 믿음에만 코를 박습니다. 앞의 두 경우는 지향적 목표를 현재적 목표로 붙잡아서 생긴 오류이고, 세 번째 경우는 지향적 목표를 아예 포기한데서 생긴 오류입입니다.
5. 여러분, 이러면 안 됩니다. 지향적 목표를 현재적 목표를 붙잡아도 안 되고, 지향적 목표를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을 지향적 목표로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향적 목표로 붙잡고 이 지향적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믿음이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지향적 목표를 현재적 목표로 붙잡아도 안 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기도하고 성령 충만 받으면 지향적 목표를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고 구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만 번 믿고 구해도 원수 사랑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구원이 지금 성화의 단계에 있지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원수 사랑 못해요. 천만 번 금식해도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없어요. 고작해야 100번 실패하다가 101번째 겨우 흉내내는 정도이지 멋지게 해내지 못합니다.
정말입니다. 100번 실패하다가 101번째 겨우 흉내 냈는데 102번째 또다시 실패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결코 멋지게 해내지 못해요. 금식 한 번 했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환상을 보고,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아주 꼬질꼬질하게 진전합니다.
여러분, 꼭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구원의 성화적 과정을 살고 있습니다. 구원의 성화적 과정은 지향적 목표를 붙잡고 꼬질꼬질하게 나아가는 단계이지 지향적 목표를 단숨에 현재화하는 단계가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 사이의 간격을 확인하면서 간격을 좁혀가는 단계이지 간격을 훌쩍 뛰어넘는 단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걸 모르고 믿음으로 훌쩍 뛰어넘었다가 다 절벽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지향적 목표를 현재적 목표로 붙잡겠다고 폼 잡다가 외식과 위선만 떨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지향적 목표를 현재적 목표를 붙잡지도 마시고, 지향적 목표를 포기하지도 마세요. 단지 믿음으로 지향적 목표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디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백 번 실패합니다. 아니, 만 번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시고 한 걸음을 내디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 번 실패하는 자신, 언제나 지향적 목표에 미달하는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 번 실패하는 형제, 언제나 지향적 목표에 미달하는 형제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용납하세요. 견디세요. 속에서 불덩어리가 올라오겠지만 꾹꾹 누르세요. 하나님이 온전케 하실 것이라고 믿고 견디고 기다리세요.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고 기도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덤비는 게 믿음이 아니고, 지향적 목표에 미달하는 자신과 형제를 용납하고 견디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과 행위 사이의 간격을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지향적 목표를 향해 걸어가십시오. 성화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한없이 꼬질꼬질하지만, 천만 번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성화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때가 되면 주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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