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복음은 용서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앞에 나아가는 것이 회개이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깨끗케 되는 것이 칭의이고, 하나님의 용서 안에 거하는 것이 화해입니다. 용서의 복음은 모든 행위를 부정합니다. 어떤 행위도 구원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용서의 복음에 담겨 있는 대전제입니다. 이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아니 부정해서는 안 되는 기독교 복음의 토대이자 기둥입니다.
1. 이 진리를 가장 뜨겁게 외친 사람은 바울, 어거스틴, 루터입니다. 특히 루터는 하나님의 용서만이 구원의 길임을 깨닫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소리 높여 주창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을 당겼습니다. 물론 루터가 처음부터 용서의 복음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가서 신학을 배웠는데 하나님은 개개인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며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구원에 합당한 행위를 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가톨릭의 보편적인 신학이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좌절과 절망만 깊어갔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훌륭한 수도사였다. 만일 어떤 수도사가 수도원의 규율을 지킴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양심은 내게 확신을 주지 못했고, 나는 항상 의심에 싸였다. 나는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고뇌에 싸여 신음하는 양심을 인간의 전통들로 치유하고자 노력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내 양심이 더욱 더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고뇌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을 나날이 깨달았다.”(A.E.맥그래스. 종교개혁 사상 입문. 121쪽 재인용).
이 고백을 들어보면 루터가 얼마나 심각하게 자기 구원 문제로 씨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루터는 한 동안 이 문제로 고민하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롬1:17)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두고 계속 묵상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마서1장 17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인 자신의 의가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수동적 의를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순간의 감격을 루터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으며,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 그 자체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이후로 성경 전체가 새로운 빛 아래 조명되었다. …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증오했지만 이제는 성경에서 가장 달콤한 말씀이 되었다. 바울의 이 말씀은 나에게 낙원으로 통하는 문이 되었다.”(123쪽 재인용)
루터는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의’가 ‘용서의 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만이 구원의 길이고, 하나님의 용서만이 기독교 복음의 토대이자 기둥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소리 높여 주창했습니다.
루터가 이렇게 ‘오직 믿음’을 소리 높여 주창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3: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안다(갈2:1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롬1:1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3:2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 라고 줄기차게 말했기 때문에 루터도 담대하게 ‘오직 믿음’을 주창할 수 있었습니다.
2. 그러면 행위는 필요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믿음이고,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면 행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예,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구원은 믿음/은혜로 받지 행위로 받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도 구원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용서의 복음에 담겨있는 대전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닙니다. 복음은 이렇게 단순하거나 배타적이거나 좁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포괄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즉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도 복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위 없이 구원받는다’는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까지 나아가야 ‘행위 없이 구원받는다’가 진짜 진리가 됩니다.
좀 차분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 자신이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5:20)고 선을 그었습니다. 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고 확실하게 쐐기를 박았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면서도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7:24,26)고 행위의 중요성을 힘써 강조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행위를 강조했습니다. 오른편에 서는 자는 영생에 들어가는 자들이고 왼편에 서는 자는 영벌을 받는 자들인데, 오른 편에 설 자와 왼 편에 설 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놀랍게도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있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어떻게 행했느냐를 보고 판단한다고 했습니다(25:31-46).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대위임령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20)고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가르치라’는데 방점이 찍지 않고 ‘지키게 하라’는데 방점을 찍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14:21).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거론하면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고 했습니다. 이처럼 구원 사건의 주역인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역설하셨습니다. 행위가 구원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서신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26),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2:14),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2:20)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까지 거론하면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2:21-22).
심지어 ‘오직 믿음’의 사도인 바울도 행함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10)고 역설했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4:9)고 아예 대놓고 ‘행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조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심판 때 “각 사람이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했습니다(고후5:10).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대로 보응하신다(롬2:6), 주께서 그 행한대로 갚으신다(딤후4:14)고도 했습니다.
3. 확인한 바와 같이 성경은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한 쪽에서는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한 쪽에서는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한 쪽에서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하고, 한 쪽에서는 각 사람의 행위를 보고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한 쪽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한 쪽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행위의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정답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도 안 된다’입니다. 믿음의 장단에만 춤을 춰도 안 되고, 행위의 장단에만 춤을 춰도 안 됩니다. 두 장단에 다 춤을 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행위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행위의 어머니이고, 행위는 믿음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자주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먹지요? 왜 낯선 음식점에 들어가서 음식을 사먹습니까? 그 음식에 세균이나 독약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은행에 예금을 하는 것은 은행이 돈을 떼어먹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나가는 것은 친구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은 운전자들이 난폭운전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싼 옷을 세탁소에 맡기는 것은 옷을 태우거나 훔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40층짜리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즐겁게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것은 빌딩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평생을 걸고 결혼하는 것은 상대방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믿기 때문에 이런 행동도 하고 저런 행동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짓도 할 수 없습니다. 물을 마실 수도 없고, 공기를 호흡할 수도 없고, 시장에서 구입한 찬거리로 음식을 해먹을 수도 없고, 계약을 할 수도 없고, 고속도로를 달릴 수도 없고, 결혼을 할 수도 없습니다. 앎도 그렇습니다. 믿지 못하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고, 부모가 나를 낳았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직 믿어야 행할 수 있고, 믿어야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모든 앎과 모든 행위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믿어야 행동하고, 믿어야 압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행위의 어머니이고, 행위는 믿음의 자식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믿음과 행위는 하나입니다. 믿음은 곧 행위이고, 행위는 곧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것 가지고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둘 중 하나만 옳다고 우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믿음과 행위 둘 다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믿음이냐 행위냐를 놓고 뜨겁게 논쟁하며 싸웠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부정하고 행위는 믿음을 부정한다고 주장하면서 믿음을 선택하든지 행위를 선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500년 전에 루터가 ‘오직 믿음/은혜’를 외친 이후로는 개신교회 전체가 ‘오직 믿음/은혜’만 주창했습니다. 성경은 ‘믿음’과 ‘행위’ 둘 다를 말하는데 교회는 주구장창 ‘믿음’만을 외쳤습니다. 행위가 중요하다고 입만 뻥긋해도 ‘행위 구원론자’라고 쏘아붙이고 정죄했습니다. 사실은 ‘믿음’과 ‘행위’가 하나인데,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데 교회는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켰습니다. 믿음에서 행위를 제거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라며 ‘행위 없는 믿음’을 대량생산 유통시켰습니다.
4. 그리고 ‘행위 없는 믿음’은 ‘행위 없는 구원’으로 나아갔습니다. 사실 구원은 옷과 같은 사물이나 객체가 아닙니다. 옷은 사물이고 객체이기 때문에 옷과 나는 하나가 아닙니다. 옷은 옷이고 나는 나입니다. 옷이 내 외모를 아름답게 보이게는 할 수 있어도 나와 내 삶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옷이 내 존재와 삶을 새롭게 형성하지도 않습니다. 옷은 그저 옷일 뿐이에요. 나와 동떨어진 사물이요 객체입니다.
구원은 그렇지 않아요. 나와 동떨어진 사물이나 객체가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이고 나는 내가 아닙니다. 구원과 나는 하나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하나도 변화되지 않은 채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구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뭐가 구원이냐? 내 존재와 삶이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변화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따라 살던 내가 하나님나라의 질서와 가치를 사는 나로 변화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죄악과 어둠으로 똘똘 뭉친 내가 하나도 변화하지 않은 채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지금 천국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이 지옥입니다. 천국이 지옥인데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구원받지 않았다고 해야 합니다. 천국이 천국이려면 내가 천국 스타일로 변화해야 합니다. 내가 천국과 한 통속이 돼야 합니다. 내 존재와 삶이 천국과 하모니를 이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구원이 무엇이냐,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삶이 구원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향유하는 삶이 구원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사물이나 객체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국 행위 없이 구원받지만 행위 없는 구원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행위 없이 구원받는다는 진리만 가르쳤지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는 진리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행위 없는 구원을 대량 유통시켰습니다. 그 결과 ‘구원 없는 구원’(구원의 삶이 없는 구원)이 난무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짠맛을 잃었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한 이익 집단이 됐습니다.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루터는 아마 땅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창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머리를 감싸 쥘 것입니다.
물론 오직 믿음/은혜의 교리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행위 없이 구원받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용서의 복음이고, 용서의 복음은 모든 행위를 부정합니다. 어떤 행위도 구원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용서의 복음에 담겨 있는 대전제입니다. 하지만 ‘행위 없이 구원받는다’만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도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붙잡으면 안 돼요. 둘 중 하나만 붙잡으면 반쪽 복음이 됩니다. 아니, 아예 복음이 아닙니다. ‘행위 없이 구원받는다’는 진리는 반드시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는 진리까지 나아가야 하고, ‘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는 진리는 반드시 ‘행위 없이 구원받는다’는 진리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복음, 온전한 복음이 됩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행위 없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행위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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