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27 - 은폐된 구원의 현실

새벽지기1 2015. 10. 8. 22:47

 

이 세상에는 두 개의 현실이 교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의 현실이고, 또 하나는 구원의 현실입니다. 이 중에 창조의 현실은 아담과 연결되어 있고, 구원의 현실은 예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담을 알아야 하고, 구원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사건을 알아야 비로소 창조세계의 현실이 제대로 보이고,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사건을 알아야 비로소 구원세계의 현실이 제대로 보입니다. 아담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면 세상을 살되 헛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진짜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먹고사는 일(먹고사니즘)에 쫓기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을 알고 예수를 알아야 이 세상의 진짜 진실을 알고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1. 이 작업을 가장 탁월하게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를 맞대응시킴으로써 창조세계의 현실과 구원세계의 현실, 아담 안의 현실과 예수 안의 현실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바울의 설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담의 사건으로 인해 온 세상이 죽음의 운명에 갇혔다. 하지만 온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예수의 사건을 통해 온 세상을 죽음의 운명에서 해방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음의 사슬을 끊어내시고 죽음에서 일으켜 세움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열었다. 그러니 더 이상 죽음의 운명에 갇혀 있지 말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라.’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 요지입니다.

 

2. 이중에서 아담의 사건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의 대표자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려라. 온 열매를 맘껏 먹어라.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아담은 이 계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뱀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죽음이라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육체인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의미하는 궁극적인 의미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며 사는 것이 죽음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세계의 현실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빛은 어둠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행복은 불행으로, 기쁨은 고통으로, 사랑은 미움으로, 관계는 파국으로, 희망은 절망으로, 살림살이는 죽임살이로, 진리는 거짓으로, 하나님은 우상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죄 · 어둠 · 죽음이 인생의 현실, 세계의 현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며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그 사건이 내 존재와 삶을 지배하고 있고, 세상의 역사와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아담 이래로 인간의 삶은 죄를 짓고 악에 희생당하는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만인을 향해 만인이 싸우는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에 따르면 만인이 특정한 1인을 향해 폭력을 가하고 죽이고 추방함으로써 사회의 갈등과 위기를 잠재우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도 희생양 메커니즘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 유대 사회가 예수의 이야기로 술렁이면서 내부 갈등이 점차 고조됐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르십니까?”(요11:49-50. 공동번역). 가야바 대제사장이 말한 것이 바로 희생양 이론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20세기 초반에 히틀러는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박정희 정권은 좌파 지식인과 정적들을 빨갱이로 몰아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일벌백계’에도 희생양 메커니즘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처럼 창조세계의 현실은 온통 아담 안에 갇혀 있습니다. 죄 · 어둠 · 죽음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동안 인간의 삶과 문화가 천지개벽에 가까울 만큼 변화하고 발전했는데도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죄와 어둠과 죽음입니다. 세상 곳곳마다, 생명이 숨 쉬는 곳곳마다 죄와 어둠과 죽음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도덕을 가르쳐왔고, 수없이 개혁과 체제변혁을 시도했고, 수없이 악의 고통을 경험했는데도 여전히 날마다 똑같은 현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악에 희생당하는 고통의 역사, 만인을 향해 만인이 싸우는 투쟁의 역사, 만인이 특정한 1인을 향해 폭력을 가하고 죽이고 추방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이 현실은 이성적이고 인과론적입니다. 계약을 맺었으나 계약을 어겼고, 계약을 어겼으니 계약대로 저주를 받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인과론적인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3. 그런데 예수의 사건은 전혀 다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구원자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기적을 행한 것, 예수가 인간이자 하나님이신 것, 율법을 유대인들이 이해한 것과 다르게 해석한 것, 세리나 창녀들을 가까이 한 것, 십자가에 죽은 것, 부활한 것, 이 모두가 기이하고 신비하고 신화적입니다. 제정신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도 다 어긋납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죽음이 정복됐고, 3일 만에 죽음에서 일어남으로써 종말론적인 생명의 세계를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죄와 어둠과 죽음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죄와 어둠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현실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사실상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투성이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문득문득 ‘과연 예수가 세상을 구원한 게 맞나? 내가 구원 받은 거 맞나?’하는 의문이 왜 안 들겠습니까? 사람이 이성적 존재이고 경험적 존재인데 예수 안의 현실은 이성과 어긋나는 것투성이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으니 문득문득 의문에 휩싸이는 게 어쩌면 당연합니다.

 

사실입니다. 예수의 사건과 구원의 현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성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가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의 사건과 구원의 현실도 은폐되어 있습니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영원 전에 계획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기록한 실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지켜보면서 ‘아, 이것이 구원사건이구나’라고 이해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알지 못했고, 마리아도 알지 못했고,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알지 못했고, 예수님께 치유 받은 자들도 알지 못했고, 로마 병사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안 게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자들만 알았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자들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는 걸 알았고, 믿었고, 말했습니다(행2:11).

 

4. 지금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지 2천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계시의 영인 성령이 은폐된 사건의 실체를 열어서 보여주어야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 사건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난 예수의 죽음과 부활도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는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어쩌겠습니까? 사람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는 것은 성령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당연히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태를 바람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바람은 수시로 붑니다. 우리는 스치는 바람을 몸으로 느낍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는 못합니다. 바람의 흔적과 증상만 알 뿐이지 바람의 근원과 실체를 알지는 못합니다. 구원도 그렇다는 것입니다(요3:8). 구원의 흔적과 증상들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걸 알 뿐이지 구원의 근원과 실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의 범주에서 일어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 중생의 체험을 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언제 중생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는 신비입니다.

 

5. 물론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구원만 은폐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도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현실이야 우리 앞에 활짝 펼쳐져 있지만 창조 사건 자체는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말합니다. 믿음으로만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고(히11:1). 진실로 그렇습니다. 창조도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사실 창조와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하나님만의 단독 사역입니다.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배타적 사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이 배타적 사역만이 궁극적 진실입니다. 창조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고, 구원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생명이 살아가고 있다는 면에서, 창조와 구원은 최고의 진실이고 궁극의 진실입니다. 사실입니다. 창조와 구원이 없으면 세상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창조와 구원이 없으면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창조와 구원이라는 나와 아무 상관없이 일어난 사건에 기초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은 창조와 구원의 진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세상을 헛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진짜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먹고사는 일에 헉헉거리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의 진실에 눈을 뜨고 구원의 진실에 눈을 떠야 이 세상의 진짜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호흡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알아야 할 이 궁극적 진실은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덜 중요한 것, 상대적인 것, 일시적인 것은 다 개방되어 있는데 궁극의 진실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창조도 베일에 싸여 있고, 구원도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이 베일은 인간의 힘으로 벗겨낼 수 없습니다. 지식으로도 벗겨낼 수 없고, 지혜로도 벗겨낼 수 없고, 종교적인 수행으로도 벗겨낼 수 없고, 고행으로도 벗겨낼 수 없고, 돈으로도 벗겨낼 수 없고, 어떤 과학기술로도 벗겨낼 수 없고, 죽음으로도 벗겨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벗겨낼 수 있습니다. 성령만이 베일을 벗겨내고 은폐된 진실을 보게 할 수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은 이성이나 인과론의 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이성이나 인과론의 틀로는 도무지 이해되거나 해석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영만이 사람의 일을 알듯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만이 알 수 있습니다(고전2:11).

예수님이 언젠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

이처럼 성령이 알려주시는 것,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이 알려주시는 것은 이성에 어긋나고 경험과 모순되는데 이성에 어긋나고 경험에 모순되는 것을 ‘예스’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고전1:23).

그런 면에서 이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복 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고독한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궁극적 진실-창조의 진실과 구원의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복 받은 것이고, 창조와 구원의 진실은 몽땅 이성과 어긋나고 모순투성이라서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으니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삶은 풍요로우면서 동시에 복잡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시적으로 사니까 지극히 풍요롭습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 있는 현실과 예수 안에 있는 현실을 동시에 살아야 하니까 지극히 복잡합니다. 사실 비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 있는 현실만 바라보며 살면 됩니다. 아담 안에 있는 현실에만 맞춰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 있는 현실과 예수 안에 있는 현실을 동시에 살아야 합니다. 죄와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나라는 겸치는 부분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데, 결정적으로 다른 두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고 붙잡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극히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결코 단순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구원의 현실은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부분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또 구원의 현실은 이성적이지도 않고 인과론적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