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25 - 또다른 언약의 대표자 예수

새벽지기1 2015. 10. 8. 22:45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아주 어렵고 고차원적인 조건을 내걸고 맺은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를 걸고 영생과 죽음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사적인 언약이 아니고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를 대표하여 맺은 공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오직 아담만이 대표 자격으로 맺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언약이었습니다. 돌이킬 수도 없고 번복할 수도 없는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 영생이냐 죽음이냐가 달려있는 언약이었습니다.

아담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고, 삶은 고통이 되었고, 땅도 저주를 받았고,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죽음의 운명을 맞았고, 에덴동산 밖으로 내쫓겼고, 다시는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창3:7-24). 아담뿐 아닙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 또한 죽음의 권세 아래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죽임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 진실을 로마서 5장에서 명확하게 말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그래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v.12).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v.14).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v.15).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v.17).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v.19)’

이것은 몽땅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체결된 행위언약(창2:15-17)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담 한 사람이지만, 아담이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언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정작 하려는 이야기는 이것이 아닙니다. 아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바울은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예표)’(v.14)이라고 했습니다. 모형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가 올 때까지 진짜를 가리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는 누구일까요?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오실 자’가 진짜입니다. 그리고 15절과 21절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라는 게 밝혀집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원론적으로 말한 건 이겁니다. ‘아담과 예수가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섰다. 아담도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예수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런데 아담은 모형이고 예수가 진짜’라는 것이 바울이 말한 원론입니다.

원론에 이어 내용이 나옵니다. ‘아담은 언약을 지키지 못했고, 예수는 언약을 지켰다(v.18).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고, 예수는 순종했다(v.19).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았고, 예수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v.16,19). 아담 안에서는 사망이 왕 노릇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생명이 왕 노릇한다(v.17). 아담 안에서는 죄가 왕 노릇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v.21).’는 것이 원론에 뒤따르는 내용입니다.

매우 짧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아담과 예수 이 두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당사자라는 것, 이들의 행위에 의해 타락과 구속이 일어났다는 것, 아담 안에 있느냐 예수 안에 있느냐가 불의와 의를 결정하고 죽음과 생명을 결정한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만 봐가지고는 이 진리의 맥락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에베소서를 봐야 로마서 5장이 이해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작정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작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성도들에게 주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말하고, 4절에서는 그 작정이 ‘창세 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도 전에, 아니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선택하시고, 우리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온 세상에 죽음이 닥치자 성부 하나님께서 어쩔 줄 몰라 하시면서 부랴부랴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불러 회의를 하시고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세상 다 쑥대밭이 됐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으니 성자 네가 사람이 되어야겠다, 네가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겠다’라고 허겁지겁 처방전을 내놓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되십니까? 곰곰이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감동하기도 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다르시구나! 아담과 언약을 맺기 전부터, 아니 창세 전부터 아담이 언약을 깰 것을 아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준비하시다니,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셔! 모든 것을 다 꿰뚫어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셔!’라고 기뻐하면서 굉장히 감동하기도 해요.

그러나 바울의 설명을 듣자 말자 그렇게 훅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그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의문이 들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거라는 것도 창세 전에 다 결정됐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이거 생쑈를 한 거 아냐? 하나님이 짜놓은 각본대로 아담을 움직인 거 아냐?’하는 의문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감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깊어지고 영글어갑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의문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그냥 감동으로 훌쩍 넘어가버립니다.

물론 이런 의문이 정당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의문이 정당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쑈를 하지도 않았고, 각본대로 아담을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은 것은 아담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생명이 어떤 생명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죽어야 하는 생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었을까요? 아담의 생명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생명도 아니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도 아니었습니다. 온 세상이 완결된 창조가 아니었던 것처럼 아담의 생명도 완결된 생명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생명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영생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행위언약을 지키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영생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생명을 받았습니다. 창조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명을 ‘자연적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생은 뭘까요? 영생은 자연적 생명이 아닙니다. 창조로부터 받은 생명이 아닙니다. 영생은 언약을 지켜야만 받을 수 있는 생명입니다. 언약을 통과할 때만 누릴 수 있는 생명입니다. 영생은 ‘자연적 생명’이 아니라 ‘언약적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영생-언약적 생명이야말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고 싶었던 진짜 생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고 싶은 진짜 생명은 자연적 생명이 아니었어요. 자연적 생명보다 훨씬 풍성하고 오묘한 생명, 죽음이 범접하지 못하는 생명, 곧 언약적 생명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아담을 죽음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쇠하지 않는 종말론적 생명을 주기 위해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생쑈를 한 것도 아니었고, 아담을 갖고 논 것도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인 영생을 주기 위한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다시 바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이 창세 전에 작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언약을 맺을 것도 창세 전에 작정되었고, 아담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할 것도 창세 전에 작정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것도 창세 전에 작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임시변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게 아니고 창세 전에 다 계획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무 근거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닙니다. 아담이 언약을 범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어느 정도의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유혹한 뱀을 저주하실 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3:15).

여기서 뱀의 머리는 사단의 권세를 암시하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사단의 권세를 짓밟고 승리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은 누구를 암시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권세를 짓밟고 무덤에서 일어나셨으니까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를 왜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성경은 누구의 후손을 말할 때마다 항상 남자의 족보를 따라 말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남자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고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왜 굳이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거니까 그랬을까요?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심오한 의도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굴복한 나머지 언약을 범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있다는 뜻이고, 아담과 함께 행위 언약을 범했다는 뜻이고, 아담과 함께 죽음에 갇혔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절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면 최소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안 됩니다. 아담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사람을 뱀의 권세에서 구원하려면 사람의 대표자가 되어 뱀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대표자가 되어 뱀과 싸우려면 아담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는 아담과 똑같은 사람이면서 아담의 후손이 아니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이면서 아담 밖의 존재여야 합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는 이처럼 독특한 존재라야 하는데 이렇게 독특한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겠습니까? 천사의 후손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단군 할아버지처럼 곰의 후손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이어야 하되 아담의 후손은 아니어야 하니까 ‘여자의 후손’이라고 할 밖에. 하여, 저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을, 구원자는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는 걸 표현하는 일종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매우 낯설고 기이한 존재가 출현할 것이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이 말씀에 근거하여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실패한 언약을 성취했다고 말했습니다(롬5:12-21, 고전11:24-25). 사실 예수님 자신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고, 식후에 포도주 잔을 건네면서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2:19-20).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하나님과의 언약적 행위로 보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킨 의의 행위로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 전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하시는 원리는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언약에 기초해서 세상을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와의 언약에 기초해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두 언약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두 언약에 기초해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때문에 누구도 이 언약을 짓밟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이 언약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항거해도 소용없어요. 절대로 언약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간혹 왜 예수만 구원자냐고, 왜 예수만 믿어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왜 석가모니나 공자를 따르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석가모니나 공자가 나쁜 놈이라서 그들을 따르면 안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석가모니나 노자나 장자나 공자나 마호메트나 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매우 탁월한 인류의 스승들입니다. 열정적으로 진리를 탐구한 구도자들입니다. 그래서 불교 경전이나 노자를 읽으면 정말 은혜로운 대목이 많습니다.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한 절대로 구원자가 못됩니다. 아담과의 언약은 영원히 유효하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한 구원을 받아야지 구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면서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시고, 예수님 안에만 구원이 있는 겁니다. 안타깝지만 그래요.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은 아담과 예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아담 안에 있든지 예수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외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다 아담 안에 있습니다. 석가모니를 따르는 자들도, 노자를 따르는 자들도, 마르크스를 따르는 자들도, 마호메트를 따르는 자들도 다 아담 안에 있습니다.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인지, 왜 예수님만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이해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