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22 - 무엇이 구원인가?(2)

새벽지기1 2015. 10. 8. 22:41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세계, 즉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구성된 이원적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은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고 (그림1)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그림2)처럼 하늘과 땅이 서로 겹쳐있습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에 하늘이 함께 있습니다. 태양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달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꽃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밀림의 호랑이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바다 깊은 곳에도 하늘이 함께 있고, 사람에게도 하늘이 함께 있습니다. 하늘 없이 순수물질만 존재하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물론 하늘과 땅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차원도 다르고 속성도 다릅니다. 하지만 하늘과 땅은 서로 겹쳐있습니다. 하늘 속에 땅이 침투해 있고, 땅 속에 하늘이 침투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참으로 오묘한 세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림2)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창조 사역이 완성됐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완성은 완제품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뭘 만들 때 책상이든 자동차든 아파트든 좌우지간 완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도 세상을 만들 때 완제품으로 만드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제품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의 출생과 엇비슷합니다. 엄마 뱃속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흠잡을 데라고는 없는 완전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태어남으로써 일단 출산은 완성된 겁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돌봄과 성장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이와 같아요.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나 계획(master plan)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정말 흠 잡을 데 없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발전이 필요 없는 완결된 창조, 완제품으로서의 창조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성은 너무나도 무한하기 때문에 6일 동안의 작업으로 완결되는 창조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창조로써 완결되는 닫힌 세계를 만들지 않으시고 무한히 변화하고 완성되어야 하는 잠재력의 세계, 최종적인 완성(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 무한히 열려있는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결된 창조가 아니라 완전한 창조였습니다. 성경이 창조를 기술하면서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고 말한 것도 창조가 완결됐다고 말한 게 아니라 창조가 완전했다고 말한 겁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이차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구상하고 계획(master plan)한 그림이 있는데 구상하고 계획한 그림대로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구상하고 계획하신 그림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 것도 없으면 허전하고 고독하니까 그냥 심심풀이로 뭔가를 만드신 걸까요? 단지 물질로 가득한 세계를 제조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상하고 계획하신 그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조직신학자 한스 요아킴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는 “창조는 단지 세상의 제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와 행위의 표현”이요 또한 “창조는 그 근원에 의하면 하나님 안에 근거하며 그 안에서 인식되는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현실이며, 그 목적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이다”라고 했습니다(조직신학. 157쪽).

구약학자 메리데스 G. 클라인(Meredith G. Kline)은 ‘우주는 생물들의 서식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고상한 기능으로는 창조주 자신의 거처’로도 지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조는 왕을 위해 집을 짓는 것과 같으며, 우주는 위대한 왕의 궁전이요 언약의 종주되신 주권자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하나님나라의 서막. 53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단지 물질세계를 존재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 즉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창조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작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창세기 2장이 말하는 안식은 단지 쉼이 아닌 게 됩니다. 안식은 노동 이후의 쉼이 아니라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건설됐으니 이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라고 온 세계를 초청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을 온 세계에 선포하고 왕 되심을 경축하는 잔치(축제)가 됩니다. 오늘날의 대통령 취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떻게 합니까? 곧바로 정권 인수 작업에 착수하고 정해진 날에 취임식을 합니다. 그리고 청와대에 들어갑니다. 세계 열방의 지도자들을 초청해 국가적인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전체를 다스리는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를 만드시고 온 세계가 당신의 나라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온 세상을 초대하신 자리에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표현했습니다.

 

구약학자 메리데스 클라인도 하나님께서 안식한다는 의미는 ‘영광의 왕께서 수행하시는 영원한 왕적 통치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하나님나라의 도래. 34쪽). 또 다른 구약학자 존 왈튼(John H. Walton)은 약간 다르게 “구약성경에서 안식이란 안정이 확보되었을 때 수행될 수 있는 정상적인 활동에의 참여를 가리키는 아이디어”라고 했습니다(창세기1장의 잃어버린 세계. 108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존 왈튼이 말한 대로 구약성경에서 안식은 단지 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2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너희가 아직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이르지 못했으나 여호와께서 너희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곳으로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거제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너희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신12:9-12). 여기서 안식은 쉼이 아닙니다. 여기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대적들의 방해나 공격 없이 평안히 사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호수아 21장 44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이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 것을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다’고 표현했고, 23장 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도 안식은 쉼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안정적인 상태에 있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사용되는 안식의 의미를 살펴볼 때 창세기 2장이 말하는 안식은 피조된 세계가 하나님이 구상하고 계획하신(master plan)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6일 동안 창조한 모든 세계가 매우 안정적인 상태에 있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제각기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서로 겹쳐지고 섞이면서 조화롭게 작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삐거덕거리면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게 아니라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해석이 아닙니다. 이것은 100%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실 수 있는 최상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총동원하여 만드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조화롭고, 가장 다채롭고, 가장 황홀하고,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다차원적이고, 가장 창조적인 세계입니다. 비록 아담의 죄악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이 훼손되었고 (그림1)의 세계로 퇴락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정말 신묘막측하고 다채롭고 환상적인 세계입니다. 어떤 천재도 감히 상상하거니 모방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세계입니다. 수 천 년이 흐르고 수 만 년이 흘러도 항상 새롭고 생생한 참으로 역동적인 세계입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감탄과 감동이 바닥나지 않는 참으로 멋진 세계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고 기기묘묘하고 다채롭고 웃기고 재미있는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그저 놀랄 뿐입니다.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멋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황홀해할 뿐입니다.

 

예, 하나님은 정말 모든 피조물들이 기뻐하고 감동하며 황홀해 할 만큼 완전하고 멋진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세계 위에 안식이라는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는 안식을 향한 창조였습니다. 안식이야말로 창조의 피날레요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궁극적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이 말하는 안식은 종말론적 안식을 가리키는 일종의 손가락입니다(히4:1,10).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완성은 분명히 성취된다는 일종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인 안식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실제입니다. 사실 이것 이외의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은 몽땅 가짜 구원입니다. 돈이 아무리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지혜와 깨달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인기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인격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예술이 아무리 우리 상처를 치유한다 하도라도 그 모든 것은 다 가짜 구원입니다. 거기에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안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고, 이 안식만이 참된 구원입니다.

 

물론 이 구원은 종말이 돼야 도래합니다. 이 땅에서는 이 구원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구원을 보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통일된 삶,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눈에 보이는 세계가 하나로 통합된 삶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을 본 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며 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호흡과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봉오리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물론 구원을 본 자들은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황량하고 사악하고 폭력적인지도 봅니다. 내가 얼마나 못나고 가련한 존재인지도 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과 황량함과 사악함만 보지는 않습니다. 못나고 가련한 내 모습만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도 함께 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작품이고 선물이라는 사실도 보고, 하루의 삶과 생명이 얼마나 위대하고 값진 은총인지도 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구원을 보지 못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는 반면, 구원을 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본다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무덤덤하게 습관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죽지 못해 살지 않습니다. 세상살이가 비록 전쟁터와 같고 비루하고 버텨내기 힘든 일이 많을지라도 순간순간을 감사하며 삽니다. 경쾌하게 삽니다. 깊이 삽니다. 당당하게 삽니다. 생생하게 삽니다. 감동하며 삽니다. 결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 앞에서 기죽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행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부드럽게 세상을 가로질러 갑니다.

혹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하등의 도움도 안 되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며 사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보며 사느냐 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하루 일당으로 10만원을 버느냐 50만원을 버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하루하루를 무덤덤하게 습관적으로 사느냐 감사하면서 생생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학생이 학기말 시험에 50점 받느냐 100점 받느냐 하는 것도 긴급한 문제이지만 죽지 못해 사느냐 황홀하게 기뻐하며 사느냐 하는 것은 훨씬 더 긴급한 문제입니다.

정말이에요. 구원을 보고 사느냐 구원을 보지 못하고 사느냐,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고 사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보고 사느냐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한 오늘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의 건강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학교생활과 직장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취미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매 순간 숨 쉬는 일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실로 우리의 존재와 삶 구석구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오늘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이 안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후 만물에게 허락하신 이 안식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이 담고 있는 뜻을 온전히 담고 있는 참된 안식일니다. 주일은 단지 쉬는 날이 아닙니다. 세속의 노동을 멈추고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안식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날입니다. 모든 노동과 염려를 내려놓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상처를 내려놓고, 사람들 사이에 높이 쳐진 장벽도 허물고, 삶 전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시간도, 가족도, 물도, 태양도, 바람도, 이웃도, 짐승도, 나무도, 꽃도, 심지어 아픔까지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날입니다.

주일은 단지 쉬는 날입니다. 단지 예배하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구원의 실재입니다. 주일의 은총과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의 은총과 축복에 참여한 그 기쁨과 감격으로 나머지 6일 사는 것이 구원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원은 주일의 은총과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고, 주일의 은총과 축복에 참여한 그 기쁨과 감격으로 나머지 6일 사는 것입니다. 주일을 살았던 그 눈과 그 마음으로 나머지 6일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지금 여기서 구원을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