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20번에 걸쳐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구원이 뭔지를 탐험하는 여행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먹고 살기 힘든 현실 앞에서 다들 돈에 관심이 있고, 일등에 관심이 있고, 예쁜데 관심이 있지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때로 구원에 집착하는 그리스도인은 있어도 구원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은 보기 힘듭니다. 참 아픈 대목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은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구원에 관심이 없는 것이지 구원을 제대로 알면 구원에 몰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몰입하지 말라고 뜯어말려도 몰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창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창조는 구원의 토대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창조가 무엇인지, 왜 창조했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창조가 무엇인지, 왜 창조했는지는 살피지 않고 십자가로 내달렸습니다. 구원의 토대인 창조 이야기는 팽개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내달렸습니다. 물론 십자가는 구원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중심 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빼놓고는 구원을 이해할 수 없고,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창조입니다. 십자가는 엄밀히 따지면 구원의 방법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토대이자 내용은 창조이기 때문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창조를 봐야 합니다. 창조를 봐야 십자가가 보이고, 창조를 봐야 구원이 보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토대이자 내용인 창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창조의 근원 진실이 뭔가부터 추적해보겠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이 선언이 성경의 대전제입니다. 우주 만물이 우연히 존재하거나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이 단순히 창조만 말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야말로 구원의 뿌리요 목표요 덩어리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구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창세기 1장 1절이 구원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싶지요? 그러나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입니다.
창세기 1장 l절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가 성경 66권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향과 관점을 결정합니다. 특히 ‘천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천지를 이해하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를 물리적인 하늘과 땅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고,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총칭하고 땅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총칭한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천지’를 눈에 보이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땅이라고 이해하면 성경 이야기 전체가 풀리지 않습니다. ‘천’(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 · 비물리적인 세계를 총칭하고, ‘지’(땅)는 눈에 보이는 하늘을 포함한 우주 만물, 즉 가시적 세계 · 물리적 세계를 총칭한다고 이해해야 이후에 펼쳐지는 성경 이야기가 풀립니다.
확인해봅시다. 복음서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5:16,45,48, 6:1, 7:11),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7:21, 10:32,33, 12:5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하늘’을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저 창공(Sky)이라고 이해하면 하나님이 구름 속에 계신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하늘’을 저 창공(Sky)이라고 이해하면 아버지의 뜻이 구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 또한 말이 안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롬8:24-25). 고린도후서에서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가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라고 이해하면 어떻게 됩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창조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창조되지도 않은 것을 바란다는 게 말이 됩니까? 창조되지도 않은 것이 영원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도대체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 1절에서 ‘천’(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 · 비물리적인 세계를 총칭하고, ‘지’(땅)는 눈에 보이는 하늘을 포함한 우주 만물, 즉 가시적 세계 · 물리적 세계를 총칭한다고 이해하면 앞에서 봤던 말씀들이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더욱이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창조의 진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여기서 바울은 의문의 여지없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속에는 하늘도 있고 땅도 있는데, 하늘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땅에 있는 것은 보이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말하면서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다”(사44:24)고 했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하늘은 비가시적 세계를 총칭하고, 땅은 가시적 세계를 총칭한다고 이해해야 해석이 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하늘’은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하늘(Sky)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땅’도 우리가 밟고 있는 땅(지구)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보좌로서의 하늘(Heaven)을 가리키고, ‘땅’은 눈에 보이는 하늘(Sky)을 포함해서 우주만물을 가리킵니다.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세계 · 비물리적인 세계를 총칭하고, 땅은 눈에 보이는 하늘을 포함한 우주 만물, 즉 가시적인 세계 · 물리적인 세계를 총칭합니다.
욥기도 보세요. 욥기는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가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욥기는 먼저 땅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요, 아들과 딸이 열이나 되고, 재산도 많고,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1:1-5).
그리고는 돌연 하늘의 세계로 장면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모여 있는 가운데 사탄도 들어가서 욥의 신앙을 시험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아보라고. 그래도 그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지 한 번 보라고(1:6-12).
다시 땅으로 장면이 바뀝니다.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아보라고 결재가 떨어지자 사탄은 땅에 돌아와 욥을 칩니다. 욥의 자녀와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빼앗아버립니다(1:13-22).
장면은 또다시 하늘로 바뀝니다. 욥에게 무시무시한 재앙을 퍼부은 사탄이 다시금 여호와 앞에 나아가 논쟁을 합니다. 욥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면 욥이 하나님께 욕을 퍼부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그의 뼈와 살을 쳐보자고 제안합니다(2:1-6).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땅으로 내려가 욥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2:7-10).
이처럼 욥기에는 하늘과 땅이라는 두 무대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기에 등장하는 하늘 무대는 어디일까요? Sky로서의 하늘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좌인 Heaven으로서의 하늘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서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다르지만 소통합니다. 하늘에서 땅의 일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결정된 일이 땅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참 모습입니다. 이 세계는 하늘과 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로만 구성된 일원적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과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로 구성된 이원적 세계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원론적 세계와는 다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원론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있고 대립하는 세계인데 비해 성경이 말하는 이원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계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원론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둘인데 비해 성경이 말하는 이원적 세계는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인 참으로 오묘한 세계입니다. 하늘은 지혜와 사랑으로 땅을 다스리고, 땅은 하늘의 지혜와 영광을 담아내는 참으로 조화롭고 거룩하고 복된 세계입니다.
인간 또한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늘과 보이는 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보이지 않는 영혼과 보이는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루아흐- 하나님의 호흡, 생명의 바람)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사람을 땅에 속한 일원적 존재로 만들지 않고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를 동시에 가진 이원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창2:7).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40년을 사는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만나를 먹이셨을까요? 모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예,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알게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셨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이 땅에만 속한 일원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과 땅에 속한 이원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밥을 먹어야 살듯이, 하늘에도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이 당연한 진실을 가르치기 위해 만나를 먹인 것입니다.
결국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물질로 가득한 세상을 제조했다’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이원적 세계, 즉 비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로 구성된 이원적 세계를 창조했다’ 입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원적 세계를 창조하셨을까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만 만들어도 될 텐데 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하셨을까요?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자기 사역자를 삼으신다.”(시104:1-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는 계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조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원대한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후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신 게 있습니다. 항상 말씀으로 명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어라, 이렇게 항상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좋았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가 아무 뜻이나 목적 없이 이루어진 작업이 아니고 하나님나라를 펼치겠다는 깊은 뜻과 원대한 목적이 있는 작업이었다는 걸 말해줍니다. 작업의 결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나라(집)를 세우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는 걸 말해줍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이원적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영광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고, 당신의 나라를 펼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질만 가득한 일원적 세계로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고,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이원적 세계라야 온 세상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낼 수 있고, 온 세상이 구석구석 하나님의 나라(집)가 될 수 있겠기에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세계를 창조하신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세계를 완성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갖고 계셨던 비밀스러운 계획,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려고 미리 세워놓으신 원대한 계획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 통일되는 것, 화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엡1:3-10). 예, 이것이 구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면서 근원적인 설명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셨던 ‘천지의 세계’, 즉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인 그 조화로운 세계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가 물리적 세계로만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장소로서 존재하고, 하나님의 나라(집)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마6:10). 구원은 하늘로 치솟는 것도 아니고, 땅에 위대한 과학기술문명을 건설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다음에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오직 창조의 본래 목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2).
실로 의표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열심히 믿어도, 구원의 확신이 있어도, 꿈에 하나님을 보았어도, 주일마다 하나님을 예배해도, 뜨거운 영적 체험을 했어도,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켰어도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구원은 너희의 믿음이나 종교적인 능력이나 열심에 있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뭘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이 서로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하셨으니까 그 세계에 걸맞은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늘로 솟구칠 것도 없고, 땅에 처박힐 것도 없고, 땅에서 살되 하늘과 소통하면서 하늘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10:27).
현실적으로 말하면,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못하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도 자잘한 일상 속에서 하늘과 비밀스럽게 소통하며 사는 것입니다. 일상의 여기저기에 흔적 없이 임한 하늘을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대할 때에 주님을 대하듯 하고, 일을 할 때에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계획하신 최상의 삶입니다.
그런 면에서 구원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생활의 뒷전에 내팽개쳐도 좋은 헌 고무신짝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세상에서 하나님인 성전인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이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정수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인 빛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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