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은 오늘날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주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호기심이 있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에 완전히 귀를 막지는 않지만 호기심 차원에서 화제가 될 뿐이지 삶의 주요 관심사로 끌어안고 깊이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20세기에 들어오고부터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것은 의식수준이 낮았던 옛날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이나 매달리는 신화적 세계의 낡은 유물에 불과하다고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에는 아예 대놓고 지옥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의 무신론자 데이비드 밀스(David Mills)는 ‘어떤 사람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축구경기를 보러 가는 죄를 범했다고 해서 백만 년의 고통을 받게 한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라고,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한다면 이것은 더더욱 가혹하고 부당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성경이 정말 그것을 말한다면 성경은 ‘신의 말씀’이 아닌 ‘악마의 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가이 해리슨(G. Harrison)은 “만약 지옥이 사실이라면 영원을 거기서 보낸다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올바른 정신을 가진 존재라면 누가 누군가를 영원히 벌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여기겠는가?”라고 냉소적으로 질문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데이비드 에드워즈(D. Edwards)는 존 스토트(J.R.W.Stott)와 나눈 서면 대화에서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끝까지 발휘하시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 많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겠다. 설사 사람들이 자기 죄를 스스로 받아들일 각오를 할지라도 그들의 운명을 지옥으로 정하는 하나님이시라면 정녕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지옥을 부정했습니다(김용규.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305쪽).
옥스퍼드 대학의 어느 교수는 ‘자신과 동료들은 지옥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거기에서 살지 않게 될 것임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마침내 도래한 하나님나라. )
예,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생각 좀 한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수많은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멸망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온전히 기뻐할 수 있겠느냐, 천국 옆에 지옥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인도적이고 자비로운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가장 인도적이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지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도 지옥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지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게헨나(Gehenna)’입니다. 헬라어 ‘게헨나’는 히브리어 ‘게 힌놈(Ge HinnomE)’을 소리나는 대로 헬라식으로 표기한 것인데, 히브리어 ‘게 힌놈’은 ‘힌놈의 골짜기’(수18:16, 느 11:30)라는 뜻입니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성 남서쪽 모퉁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골짜기입니다. 본래 이 힌놈의 골짜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가나안 사람들이 살 때 가나안 사람들이 무척 신성시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곳에서 ‘바알’이나 ‘몰록’과 같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특히 몰록에게 제사할 때에는 아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시야왕은 모든 우상숭배를 일소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힌놈의 골짜기에서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힌놈의 골짜기를 볼 때마다 이곳은 하나님을 배도한 더럽고 역겨운 곳이요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가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다 온갖 쓰레기를 갖다 버렸고, 그 골짜기에는 언제나 쓰레기를 소각하는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게 힌놈’(흰놈의 골짜기)이 신약에서는 지옥을 의미하는 ‘게헨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마5:30, 18:8-9). 지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도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막9:48).
이 말씀은 지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악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죽은 후에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옥은 구더기를 비롯해서 수많은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꺼지지 않는 불이 뜨겁게 타오르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지옥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실감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쓰레기장으로 변한 힌놈의 골짜기를 비유로 들어 말씀한 것입니다. 지옥의 삶이란 온갖 더러운 쓰레기들이 가득하고, 징그러운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꺼지지 않는 힌놈의 골짜기와 같다고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님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커서 똥지게 진다.” 저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아버지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다. 지금 공부 안하면 나중에 쌔빠지게 고생한다는 것을 ‘똥지게 진다’고 하신 거구나, 라고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예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척 알아들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의 요소를 끊어내지 않으면 내 삶이 쓰레기로 가득한 힌놈의 골짜기와 같이 더럽고 추악하고 괴로울 거라는 뜻이구나, 악의 요소를 끊어낼 때까지는 더럽고 추악하고 괴로운 삶이 결코 끝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구나, 라고 척 알아들었습니다.
전후의 맥락을 살펴보면 더 정확하게 이해됩니다. 지옥 이야기 앞에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툰 일화가 나오고, 그 일에 대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막9:33-37).
그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하지 않은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사람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게 금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치 깡패들이 자기 패거리가 아닌 사람이 자기 구역에서 장사하면 장사하지 못하도록 실력행사를 하는 것처럼 일종의 실력행사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니 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v.38-42).
그리고 이어서 지옥 이야기가 죽 나옵니다(v.43-48). 그 후에는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소금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v.49-50).
전체적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크게 세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다툼에 대한 이야기, 중간에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 뒤에는 화목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이 영 매끄럽지가 않습니다. 다툼에 대해 말하다가 화목하라는 말로 끝나는 것은 흐름이 매우 자연스러운데 중간에 갑자기 지옥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버렸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다툼에 대해 말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실력행사를 한 제자들을 나무라시다가 갑자기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손을 찍어버리고서라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이 툭 튀어나옵니다. 그리고는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끼어있는 지옥 이야기는 마땅히 다툼과 화목이라는 앞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지옥 이야기만 뚝 떼어서 읽으면 안 되고, 다툼과 화목이라는 전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될 것입니다. 전체의 흐름을 살피면서 읽으면 결국 이런 이야기로 들립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너희 속에는 형제와 다투게 하는 악의 요소가 많이 있다. 형제보다 더 크고자 하는 욕망도 있고, 우리와 남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이기심도 있다. 때로는 손이 그런 죄악을 범하기도 있고, 때로는 발이 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이 범하기도 한다. 그러니 너희 안에 있는 악의 요소를 끊어내라. 만일 끊어내지 않으면 너희 삶은 쓰레기로 가득한 힌놈의 골짜기와 같이 더럽고 추악하고 괴로울 것이다. 악의 요소를 끊어낼 때까지는 더럽고 추악하고 괴로운 삶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지옥의 삶을 아는지 모르겠다만, 지옥의 삶은 말이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 사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이란다. 그러니 너희는 지옥의 삶을 살지 않도록 조심해라. 건강한 몸으로 지옥의 삶을 사느니 차라리 장애인으로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이렇게 전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이렇게 알아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악을 행한 자는 죽은 후에 지옥 간다는 이야기로 들었고,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이야기로 들었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은 듣자말자 무슨 말인지 척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지옥(게헨나)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한 가지 의문과 한 가지 진실에 부닥치게 됩니다. 한 가지 의문은, 그러면 지옥은 없는 것이냐, 지옥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비유에 불과한 것이냐 하는 것이고, 한 가지 진실은, 지옥은 죽음 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먼저 의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옥(게헨나)을 비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지옥을 꼭 부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이 비유이기는 하나 지옥의 실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이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1-12)는 말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30)는 말씀, 또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12:5)는 말씀은 지옥을 전제하지 않고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이 새 예루살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기 때문에 해나 달의 빛이 필요 없으며,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21:23-24). 하지만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이나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21:27).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2:15).
더욱이 성경은 수없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면서 동시에 심판자시라고. 옳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요 끔찍이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온갖 불의로 얼룩져 있는 이 세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으십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왜곡시키고 썩어나가게 하는 모든 더러운 것과 독소를 깨끗하게 제거하는 우주적인 대청소를 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심판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심판 날 대청소를 하신 후에는 반드시 쓰레기들을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쓰레기들이 다시금 세상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단단히 조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지옥은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지옥은 죽음 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라는 진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과 지옥은 심판의 날이 돼야 비로소 가시화됩니다. 하지만 현재의 삶속에 침투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말합니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지금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그렇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죄악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고, 삶을 파괴하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지옥을 목도하고 지옥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지옥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지옥보다 더 강력하게 천국이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옥도 있고 천국도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과 삶속에도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지옥과 천국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를 않고 거의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삶속에도 천국과 지옥이 뒤섞여 있고, 세상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 속에도 천국과 지옥이 뒤섞여 있습니다. 천국으로만 가득한 삶도 없고, 지옥으로만 가득한 삶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천국과 지옥이 뒤섞여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천국과 지옥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는 천국과 지옥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쫙 갈라질 것입니다.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이 갈라짐을 가리켜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왜 이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지옥을 붙들고 있는 한 천국은 볼 수 없다. 천국을 받아들이려면 지옥이 남긴 아주 작고 소중한 기념품까지 미련 없이 내버려야 한다.”(10쪽).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영원히 뒤섞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삶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영원히 섞여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완전한 분리, 완전한 이혼의 날이 도래하고야 맙니다. 때문에 천국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쉼 없이 지옥과 이혼하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날마다 지옥의 속한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옥이 어떤 곳일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솔직히 지옥이 어떤 곳일지를 알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단지 로마서 1장 28절 말씀을 통해 짐작해볼 따름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 말씀을 정직하게 읽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정하여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지옥을 선택하는 것일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톰 라이트는 이 말씀에 의거해서 지옥은 어쩌면 하나님의 방임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제 1법칙 중 하나는 자신이 예배하는 그 대상을 닮아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배하는 그 대상을 반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자기 자신을 돈의 관점에서 정의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가 아니라 채권자, 채무자, 동업자 혹은 고객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성적인 기호나 성적인 관습이나 성적인 경험의 관점에서 자신을 정의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성적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관점에서 자신을 정의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공모자, 경쟁자 혹은 이용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한 때는 인간이었지만 어느 때인가는 인간이 아닌 존재, 어떠한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할 거라는 것입니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285쪽).
결국 톰 라이트는 지옥을 돈을 숭배하는 자가 계속 돈을 숭배하는 곳, 섹스광은 계속 섹스에 열광하는 곳,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더욱 극심하게 권력에 중독되는 곳일 거라고 보았습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사람의 자기 집착, 극단적으로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자기집착이 지옥일 거라고 보았습니다. 저도 이런 추측에 공감합니다. 지옥은 아마도 자기집착의 왕국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말씀드립니다. 자기집착을 버리십시오. 자기고집을 버리고, 자기편견을 버리고, 자기욕망을 버리고, 자기신념을 버리십시오. 나에게만 집착하는 인간의 고질적인 자기집착을 버리십시오. 자기집착에 해당하는 것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십시오. 손을 잘라내고, 눈을 빼어내는 심정으로 버리십시오. 자기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결단코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를 외쳐도 자기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결국 천국을 등지고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천국은 자기집착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집착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천국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기에서 날마다 지옥에 속한 것들과 하나씩 하나씩 결별하십시오. 이런저런 자기집착들과 하나씩 하나씩 결별하십시오. 끝없이 우리를 옭아매는 자기집착과 결별하는 것이 신앙의 삶이고, 천국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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