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무엇이 구원인가를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구원 이야기보다는 창조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안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구원 이야기는 안 하고 창조 이야기를 하는가, 안식 이야기를 하는가, 선뜻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창조를 통해 구원을 말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창조와 구원을 연결 짓지 않고 따로따로 말해왔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때문에 제가 구원을 말한다면서 자꾸 창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매우 낯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창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창조를 통해 구원을 말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일 구원을 말하지 않고 창조만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했는지, 뭘 위해 창조했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창조를 말하지 않고 구원만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창조는 구원의 토대와 내용이고, 구원은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창조와 구원을 별개로 분리하면 창조는 의미와 방향을 잃게 되고, 구원은 토대와 내용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창조를 통해 구원을 말하지 않으면 구원은 어쩔 수 없이 왜곡되고 형해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심히 왜곡되고 형해화한 것도 따지고 보면 창조를 통해 구원을 이해하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반드시 창조를 통해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죽음 저편으로 증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창조와 구원을 연결하는 끈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창조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안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식이 창조의 피날레요 오메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마무리되었다는 것, 6일 동안 창조한 세상이 하나님이 디자인하고 목적한 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이차적으로는 당신께서 창조한 모든 세계를 당신의 안식, 즉 당신의 즐거움에 초청하셨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곱째 날 하나님이 홀로 쉬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의 노동에 지쳐서 쉬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 쉬신 것은 6일 동안 창조한 온 세상을 당신의 안식에 초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 세상이 훌륭하게 창조되었으니 다함께 창조의 현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초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후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중에서 처음 세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입니다.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입니다. 셋째 계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넷째 계명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이처럼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을 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일곱 가지 계명 중에서 가장 으뜸 되는 계명으로 나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보다도 앞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안식일 계명을 으뜸 계명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안식일도 없이 일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이 약화될까봐 걱정돼서 그랬을까요? 안식일도 없이 일에 파묻혀 살면 하나님을 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품을 떠날까봐 걱정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안식일’ 하면 대뜸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도 하면 안 되는 날, 어떤 것도 즐기면 안 되는 날, 금욕해야 하는 날이라는데 안식일의 방점을 찍습니다. 예, 일단은 옳습니다. 안식일 계명의 핵심은 분명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입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데 안식일의 방점을 찍으면 안 됩니다. ‘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느냐’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여러분, 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일을 놓아야, 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안식에 푹 잠길 수 있고,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안식일 계명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너와 네 가족만 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와 네 가족은 물론이고, 남종과 여종을 포함해서 집에 머무는 식객까지, 심지어 가축까지 다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종들과 가축을 하루 종일 놀리라는 겁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법은 매우 불리한 법입니다. 엄청나게 손해나는 법입니다. 또 생산성을 높여서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매우 불편한 법입니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이 노동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게 일반화되어서 안식일 계명을 생산성 차원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이 그런 차원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전제하면 이 법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법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불편한 법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왜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 하셨을까요? 안식일 계명이 단지 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 정도로만 말씀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죽이라,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출31:14).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종들이나 식객이나 짐승까지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들도 일을 놓아야만 하나님의 안식에 푹 잠길 수 있고,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저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해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주인들만 안식하는 나라가 아니라 종들, 식객들, 짐승들까지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런 나라가 되기 원하여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고, 집에 머무는 식객도 쉬게 하고,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안식일 계명은 안식년으로 확대됩니다. 출애굽기 23장에는 안식년에 관한 법이 나옵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23:10-11). 레위기 25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여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고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레25: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시점부터 계산하여 7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이니 온 땅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살펴본 안식일 계명에는 땅이 안식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식년 계명에는 안식의 대상이 땅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적어도 7년에 한 번씩은 땅도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희년으로 가면 안식의 영역과 깊이가 더더욱 확대되고 깊어집니다.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7×7=49년)의 다음 해로서 50년이 되는 해인데 기본적으로는 안식년과 동일합니다. 희년에도 안식년처럼 땅에 농사를 지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 난 것조차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희년에는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합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라.”(레25:10). 예, 희년에는 정말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집니다. 50 여년이 지나다 보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땅을 잃고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각각 자기 고유의 권리와 기업과 가족을 되찾게 됩니다. 종살이에서도 해방되고, 모든 부채 또한 면제받습니다(신15:1-3). 그야말로 50년 동안에 발생된 모든 불평등이 사라지고 얽매임에서 해방되는 거대한 사회변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해를 희년, 즉 ‘은혜의 해’라고 합니다(사61:2).
이사야 선지자는 희년에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메시아 시대의 구원과 연결시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희년)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1-3).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을 인용하여 자기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러 왔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무슨 말입니까? 나는 희년의 은혜를 성취하러 온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희년에 이루어져야 하는 모든 일들이 나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희년의 성취가 곧 구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8-30). 예,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안식에로 초대하셨습니다. 내게 안식이 있다고, 내게 안식이 있으니 내게로 오라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안식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창조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안식은 안식일로 이어지고, 안식일은 안식년으로 이어지고, 안식년은 희년으로 이어지고, 희년은 예수님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쭉 살펴봤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 과정을 말씀드린 것은 이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구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과정을 이해해야만 창조와 구원을 통시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의미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는데 창조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창조와 구원을 하나의 맥락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계속해서 창조는 구원의 토대이자 내용이고, 구원은 창조의 의미와 목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최초의 안식(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안식)에 종말론적 안식이 내포되어 있으며, 모든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안식으로 이끄시겠다는 굳은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안식일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억압의 날이 아닙니다. 옴짝달싹도 못하는 금욕의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축복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있지 않아요. 안식일의 축복은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안식에 풍덩 잠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음미하고 향유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깊이 음미하고 향유한다니까 신비롭고 거창한 뭔가를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거워하는 것, 존재와 삶 자체를 환대하는 것,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고 창조 세계의 품에 안기는 것,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지혜와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을 음미하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식일은 하나님나라의 맛보기이자 전망이고, 또한 하나님나라 실현에 대한 굳은 약속입니다.
안식일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짚고 끝내겠습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에게는 일곱째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섯째 날 만들어진 아담에게는 안식일이 첫째 날입니다. 아담이 창조된 후 첫 번째 맞은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삶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 아담의 삶은 노동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안식으로 시작해서 또 다른 안식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담에게 주어진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안식으로 시작해서 안식으로 귀환하는 것이 하나님이 축복한 본래의 삶이었습니다. 옳습니다. 삶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안식으로 시작해서 안식으로 귀환하는 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이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이 안식을 잃은 채 살고 있습니다. 삶이란 모름지기 안식으로 시작해서 안식으로 귀환하는 것인데 안식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안식으로 귀환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금 안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너희가 향유해야 할 안식이 내게 있으니 나에게 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초대로 인하여 잃어버린 안식을 되찾았습니다. 삶의 알파요 오메가인 안식을 되찾았습니다. 이 복된 안식을 되찾은 여러분, 잊지 말고 주일마다 이 안식으로 귀환하시기 바랍니다. 시간, 가족, 물, 태양, 달, 바람, 이웃, 짐승, 나무, 꽃, 산, 1천억 개나 된다는 은하계까지를 몽땅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 자신을 최상의 선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기이한 선물로 긍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돈, 명예, 인기, 힘, 이데올로기, 성공, 성취, 인정 욕구, 욕망, 전통, 관습, 비교, 염려, 두려움, 경쟁, 아픔, 상처 등등 여러분을 옭아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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