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28 - 용서, 구원의 길

새벽지기1 2015. 10. 8. 22:49

 

구원이 뭘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던 것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관계가 변화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1. 하나님은 관계적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 것부터가 관계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도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려면 의사소통이 돼야 하고, 의사소통이 되려면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대응할 수 있으려면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하니까 하나님은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관계적 세계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주체적으로 사는 세계, 너 없이도 자기 혼자만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너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살 수 있는 세계, 자기 혼자로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관계적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만 해도 아침과 저녁이 반복되고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은 지구가 태양의 관계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의 빛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전을 하면서 태양 주변을 공전하기 때문에 아침과 저녁이 있는 것이고 계절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꽃이 열매를 맺는 것도 꽃과 벌과 나비의 관계 때문이고,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고, 오늘 아침에 밥을 먹은 것도 땅 하늘 바람 농부 정미소 도로 장사꾼 등 수많은 관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의 어느 것 하나도 다른 것과의 관계없이 존재하는 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관계로 인하여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온 세상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관계 중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 가장 으뜸 되는 관계는 단연 하나님과 아담(사람)의 관계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다른 관계가 소중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작은 미물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관계의 그물망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관계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매우 특별합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모든 관계에 앞서는 관계이고, 모든 관계를 좌우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정상이면 모든 관계도 정상이 되고,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틀어지면 모든 관계도 틀어지는 매우 특별한 관계입니다. 여타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2. 그런데 이 관계가 깨졌습니다. 삼라만상의 관계를 좌우하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사실 인격적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입니다. 신뢰가 관계를 세우고, 신뢰가 관계를 살찌우고, 신뢰가 관계를 굳건하게 합니다. 신뢰야말로 관계의 토대요 생명줄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 당신의 형상까지 내주셨는데도 아담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한 창조자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의 진정성을 의심했습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될까봐 그게 두려워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당연히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을 이어주던 관계의 생명줄이 끊어졌습니다. 이것은 일파만파로 이어졌습니다. 으뜸 되는 관계가 어그러지자 모든 관계도 다 어그러졌습니다. 죽음이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삶이 고통의 신음소리로 가득하게 됐습니다. 신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각색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치유하셨을까요? 심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불쌍해서였을까요?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각색 병자를 치유하신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제사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육체에 흠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눈이 먼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몸이 일그러졌거나 기형인 사람, 손이나 발이 불구인 사람, 등이 굽은 사람, 난쟁이, 눈에 백막이 낀 사람,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사람, 고환이 상한 사람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레21:17-20). 이런 제사법은 예수님 당시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혈루증 앓는 사람, 앉은뱅이, 소경, 귀머거리, 문둥병자 등은 성전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제물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치유하여 온전케 했습니다. 질병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치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나아갈 수 있게 한 것,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시킨 것, 이것이 구원의 핵심이자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표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한 의료행위가 아니라 구원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나아가게 한 구원 행위였기 때문에 ‘표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4. 그런데 구원의 진짜 표적은 치유가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입니다. 사실 병자들만 흠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병자들만 부정한 건 아니거든요. 모든 인간이 부정하고 불의합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흠투성이입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서 몰아낸 결과(롬1:28) 인간 속에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미움, 능욕, 교만, 자랑, 우매, 거짓, 무자비, 불효, 배신이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롬1:29-31).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며(롬3:23),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산다고 말했습니다(롬5:10).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 없이 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며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관계적 존재이십니다.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시고,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특하고 불의한 현실을 마냥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신뢰로 충만해야 할 관계가 완전히 어그러졌고, 그로 인해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는데 그걸 마냥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고 있는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십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미움, 능욕, 교만, 자랑, 우매, 거짓, 무자비, 불효, 배신이 가득한 인간의 삶을 보시며 애간장을 태우십니다. 1주일 전에 지진으로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부상당한 네팔을 보시면서도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깊이 아파하시고 슬퍼하십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야말로 하나님에게 가장 큰 고통이고 아픔이고 상처이고 짐입니다. 인간에게도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고통이고 아픔이고 상처이고 짐입니다. 하여, 하나님은 어떻게든지 관계를 회복시켜야 했습니다. 모든 관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관계를 한 단절된 관계를 다시 잇고, 원수 된 관계를 화해시켜야 했습니다.

 

5. 어떻게 해야 화해의 길을 열 수 있을까요? 이미 범죄는 일어났고 관계는 깨졌는데, 한 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일어난 범죄를 되돌릴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화해의 길을 열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만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 백 번, 천 번을 생각해보십시오. 용서하는 것 외에 길이 있는가. 없습니다. 천만 번을 생각해봐도 용서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걸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이 길, 용서의 길을 가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값싼 용서의 길을 가신 건 아닙니다. ‘얘들아, 내가 큰 맘 먹고 너희들 용서해줄게. 우리 화해한 거다.’ 이렇게 말 한 마디로 간단하게 해결하는 값싼 용서의 길을 가신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셔서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죄의 삯인 죽음을 대신 죽는 값비싼 용서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엄청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 심판을 받는 역설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셨습니다(사53:5). 하나님은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요함을 주셨습니다(고후8:9). 하나님은 약하게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강함을 선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의를 담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입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선사하셨습니다.

 

6. 하나님께서 이토록 엄청난 고난의 길, 역설의 길을 가신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산산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용서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고,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대속이자 용서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대속이 이루어졌고, 십자가로 인해 용서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제물이 됨으로써 대속이 이루어졌고, 대속의 죽음을 죽음으로써 용서가 이루어졌고, 용서를 함으로써 원수였던 관계가 화해되었습니다.

때문에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십자가에 죽은 대속의 제물만 가지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아래에 서고, 십자가를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놀라운 화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건이요 실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적 사건이요 실재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아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해도 역사적 사건이요 실재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15:58).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하나님과의 화해는 이론이나 지혜가 아닌 사건이자 실재입니다. 역사의 한 시점에 이스라엘의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이자 실재입니다. 비록 나와 아무 상관없이 일어났지만 어쨌든 역사의 한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고, 이 사건이 지금 온 세상의 역사와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사건이 나와 상관없이 일어났지만 나를 비롯해서 온 세상의 역사와 삶에 죄와 어둠과 죽음을 가져왔듯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도 나와 아무 상관없이 일어났지만 나를 비롯해서 온 세상의 역사와 삶에 빛과 화해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생명이 이 땅에 임했습니다. 아직은 은폐되어 있고, 아직은 부분적이지만 그래도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생명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기뻐하면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7.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그것도 값싼 용서가 아니라 매우 값진 용서입니다. 믿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 아래에서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받은 자임을 인정하고 용서받은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믿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참 믿음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사는 것만이 참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때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용서하셨습니다. 항상 용서하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가죽 옷을 입혀줌으로써 용서의 길을 보여준 이래로 지금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용서는 비루한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으니 앞으로는 내 앞에서 눈깔 굴리는 소리도 들리면 안 돼, 라고 윽박지르는 용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실로 엄청난 용서입니다(눅15:22-24). 하나님의 자녀 된 권한을 맘껏 누리게 해주는 용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용서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값진 용서,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용서, 무조건적인 용서, 무한한 용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충분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용서를 받은 자는 자유와 평안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면 더 이상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쓸 이유가 없어지고, 뭔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이유도 없어지고, 세상의 요구에 굴복할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에 놀라운 자유와 평안을 얻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용서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용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생각하기 쉬운데,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를 용서하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일입니다. 당연히 너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도 용서하셨으니 나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은 용서의 복음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행위나 업적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깊은 지혜나 종교적 경건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오직 용서를 통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임으로써만 들어갑니다. 이 복음을 믿는 여러분, 날마다 용서받은 자로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나를 용서하고 너를 용서하며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