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29 - 용서의 본질

새벽지기1 2015. 10. 8. 22:49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셨습니까? 전능하신 분답게 능력의 방식으로 구원하셨나요? 정복의 방식, 승리의 방식으로 구원하셨나요? 아닙니다. 완전히 깨지는 방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는 대속의 방식, 하나님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패배의 방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는 용서의 방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1. 여러분, 용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용서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시혜,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에게 베푸는 시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파 들어가 보면 용서는 시혜가 아닙니다. 은전을 베푸는 게 아닙니다. 용서를 시혜라고, 은전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고, 용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결코 시혜가 아닙니다. 은전을 베푸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용서가 뭘까요? 죄를 지우는 것일까요? 지우개로 잘못 쓴 글씨를 지우듯이 주홍 같이 붉은 죄를 깨끗하게 지워 없애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죄를 지우는 것이 용서입니다. 죄의 흔적을 지워 없앰으로써 깨끗하게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받은 상처를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이 용서이고,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성폭력을 행한 자의 죄악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죄를 지우는 것 그 이상입니다. 용서란 단지 죄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가 됨으로써 죄 있는 자를 죄 없는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내려감이 없어도 용서로서는 부족하고, 끌어올리는 것이 없어도 용서로서는 부족합니다. 반드시 내려감과 끌어올림이 있어야 참된 용서가 성취됩니다.

 

2. 하나님이 바로 이런 용서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늘에서 이 땅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자리에서 시공간의 구속을 받는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창조의 말씀에서 피조물의 하나로, 죄가 없으신 분께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 죄인이 되어 심판받는 자리에 서셨습니다. 저주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심판과 모든 저주를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려오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실로 상상할 수 없는 하강을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창조자가 피조물이 되는 파격적인 내려옴을 단행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용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신 거였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와야 합니다. 저 하늘 위에 앉아서 용서 못합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죄악의 자리, 불의의 자리, 어둠의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신영복 선생이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깊은 성찰입니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도 돕는 길이긴 합니다. 그러나 비를 맞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쪽팔릴 수 있습니다. 나는 없는데 저 사람은 있으니까,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니까 감사하기는커녕 쪽팔릴 수 있습니다. 자기 처지가 비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비를 맞으면 위로가 됩니다. 나 혼자 비 맞는 것 아니구나, 그래서 비를 맞으며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담론). 언뜻 생각하면 함께 비를 맞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함께 비를 맞는 것이 우산을 들어주는 것보다 훨씬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진짜로 사람을 돕는 길입니다. 하나님도 그러셨습니다. 죄와 죽음이라는 비를 맞으며 인생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비에 젖지 않은 옷차림으로 다가와 우산을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산 없이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우리와 함께 비를 맞으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빗속을 걸으셨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비를 맞았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3. 물론 내려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비를 맞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내려오신 예수님을 끌어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3일 만에 부활시키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엡1:20-22).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위해서였을까요?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이 너무 기특해서 끌어올리신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기 위해서 예수를 무덤에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엡2:5-6).

 

바로 이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은전을 베푸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죄를 깨끗이 지우는 것이 아니에요. 용서는 죄 지은 자에게 내려가서 죄 지은 자를 죄 짓기 이전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짓기 이전의 아담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던 종말론적인 아담, 즉 제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과 대리 통치자로서의 권세를 다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4. 하나님의 용서와 관련해서 생각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마구잡이’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묻지마’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죄를 묻지도 않고, 죄값을 치르지도 않고 ‘용서한다’는 말 한 마디로 다 때우는 그런 ‘값싼’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값을 물었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우리에게 묻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에게 우리의 죄값을 지불했습니다. 눈곱만큼의 에누리도 없이 죽음이라는 죄값을 100% 완전하게 지불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용서는 매우 의로운 용서였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값비싼 용서였습니다.

물론 인간 편에서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곱만큼의 에누리도 없이 100% 완전하게 죄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사람이 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인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그야말로 무상으로 받기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용서의 본질입니다. 용서하는 자가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용서받는 자는 아무 것도 짊어지지 않는 것,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받는 것, 아무 것도 주고받은 것 없이 무상으로 받는 것이 용서의 본질입니다. 만일 용서받기 위해 털끝만큼이라도 뭘 한다면, 돈으로든 · 몸으로든 · 물건으로든 좌우지간 눈곱만큼이라도 뭘 지불한다면 그 순간 용서는 와르르 무너집니다. 용서가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무상이 아닌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무상이어야 하고, 무상이어야만 진정한 용서입니다.

 

결국, 용서가 용서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성립돼야 합니다. 첫째로 용서하는 자가 용서받는 자의 자리에게 내려와야 합니다. 둘째로 용서하는 자가 용서받는 자를 죄 없음의 자리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셋째로 용서받는 자가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만족돼야 진정한 용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켰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당신이 당신에게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무상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완전한 용서를 하셨고, 우리는 완전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5. 그런데 사람은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합니다. ‘나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거 받아도 되나’ 하면서 때때로 불안해하고, 때때로 염치없어 하고, 때때로 의심합니다. 우주만물을 공짜로 받아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진실은 보지 않고, 눈곱만큼의 공짜도 없는 세상살이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용서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공짜로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중에도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적 강박에 시달리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넓고 깊은지도 잘 모르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염치없어 하는 것이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적 강박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행한 것, 자기가 성취한 것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 하고, 자기를 확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행한 모든 것, 내가 성취한 모든 것이 나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취해온 것뿐 아니라 수많은 실패 역시 하나님 앞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내가 행하고 성취해온 모든 것이 실로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게 쉽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쪽팔리는 일인데,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는 일인데 그게 쉽겠습니까? 죽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 굴욕적인 일이기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에 매달려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믿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6.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믿음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 내가 성취한 것, 내가 아는 것, 내가 쌓은 것이 실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단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 죄악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겸허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길, 가장 천한 길, 가장 비루한 길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는 가장 쪽팔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어리석고 낮고 비루하고 쪽팔리는 이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정복하는 방식, 승리하는 방식, 교양이 넘치는 방식, 누가 봐도 정말 그럴듯한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용서만을 붙잡아야 하는 비루한 방식, 용서 외에는 그 무엇도 내놓아서는 안 되는 천하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어리석고 천하고 비루하고 쪽팔리는 용서의 방식으로 구원하셨을까요? 용서하는 것만이 가장 완전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통해서만 원수 된 관계를 화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통해서만 인간의 인간됨을 회복시키고 진정한 주체로 복권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것만이 가장 완전한 화해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고 비루해하는 용서의 방식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루하고 쪽팔리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비루하고 쪽팔리는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해 의롭다 함을 얻고(롬3:24),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고(엡3:12, 히10:19),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사람(요1:12)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 행위 · 업적 · 지혜 · 지식 · 종교적 경건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용서 하나 내세우는 사람, 하나님의 용서 외에는 그 무엇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행위입니다. 거역하고 도망치는 아들, 배신하고 등 돌린 애인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결국 어떻게 합니까? 절대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을 때 결국 용서하게 됩니다. 무조건 돌아와, 라고 호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용서는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값을 완전하게 치른 용서입니다. 완전한 용서입니다. 이 용서 하나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용서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갖고 나아가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래하자고 덤비는 것입니다. 오직 용서 하나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거래하는 것으로는 결코 온전한 관계회복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