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은 문제입니다. 오늘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행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 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행위란 과연 무엇일까요? 예배드리는 것, 봉사하는 것,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 살인하지 않는 것, 도적질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 등등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도 포함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이런 행위 목록을 행하라는 게 아닙니다. 신앙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내면화되고, 인격화되고, 성품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나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할 때 예배드리는 것, 봉사하는 것,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선교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 살인하지 않는 것, 도적질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 등등 눈에 보이는 외적 행위를 생각했을까요? 이런 것도 생각했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행위까지를 다 포함해서 말했다고 봐야 합니다. 손과 발로 하는 행위뿐 아니라 눈, 입, 귀, 코, 가슴으로 하는 행위도 다 포함하고, 뇌로 하는 행위까지도 다 포함해서 말했다고 봐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우리의 존재 전체, 삶 전체, 인격 전체, 성품 전체가 다 포함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실 성경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행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마음의 열매요 인격의 열매요 성품의 열매이기 때문에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고, 행위가 우리의 삶을 조성하고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행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무(진공)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행동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고, 인격에서 나오고, 성품에서 나옵니다. 또 삶은 곧 행위이고, 행위가 곧 삶입니다. 행위가 삶을 조성하고, 행위가 세계를 구성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지 행위 때문에, 행위를 위해서 행위를 강조하는 것 아닙니다.
2. 그런데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행위 때문에, 행위를 위해서 행위에 매달리는 오류가 발생합니다. 행위로 인해 삶이 소외되고, 믿음이 율법화되고, 구원이 사물화되는 매우 심각한 왜곡과 뒤틀림이 발생합니다.
좀 구체적으로 확인해 봅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애매모호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뭘 하라고 하면 대뜸 구체적인 목록이 뭐냐, 구체적인 매뉴얼(Manual)이 뭐냐,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겠으니 우리가 지켜야 할 구체적인 행위 목록과 매뉴얼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행위 목록과 매뉴얼이 만들어졌습니다. 안식일과 관련된 것만 좀 보겠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지기 18분 전부터 토요일 해지고 1시간 후까지다. 안식일에는 바느질, 농작물을 거두는 일, 빵을 굽는 일, 실을 잣는 일, 건물을 짓고 부수는 일, 망치질,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등 39가지를 하면 안 된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한계는 성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으로 약 1㎞까지다. 안식일에는 돈이나 일과 같은 세속적인 것들을 말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기쁘고 즐거운 날이니만큼 슬퍼하거나 울면 안 된다.]
이렇게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을 때마다 랍비들은 구체적인 행위 목록과 매뉴얼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행위 목록과 매뉴얼이 쌓이고 쌓여서 성경보다 3배 많은 분량이 됐습니다. 이것을 묶은 책이 <술칸 아룩> <타가 노트> <탈무드>인데,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정리한 이 매뉴얼을 전통으로 받아 지켰고, 성경보다 더 가까이했습니다.
자, 랍비들이 정리한 행위 목록과 매뉴얼대로 행하는 것이 과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겠습니까? 구원을 사는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숨이 턱 막히지 않습니까? 심장이 오그라들고 삶이 짓눌리는 압박감이 밀려오지 않습니까? 족쇄에 묶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정말입니다. 이것은 삶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폭력이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만큼 엄격하지는 않지만 몇몇 행위 목록을 행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드리는 것, 봉사하는 것, 기도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 살인하지 않는 것, 도적질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이것이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몇몇 행위 목록을 지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행위 목록에 없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에도 관심이 없어집니다. 오직 행위 목록을 지켰냐, 지키지 않았냐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그 행위를 해야 하니까 하게 됩니다. 행위 때문에, 행위를 위해서 행위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 결과 삶은 소외되고, 믿음은 율법이 되고, 구원은 사물이 됩니다.
프랑스의 법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자크 엘룰은 행위의 위험성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세상은 온전히 행동에 관심이 쏠려 있다. 모든 것이 행동의 면에서 해석되고, 행동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되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동에 대한 표어, 프로그램, 그리고 방법을 찾는다. 실로 우리의 세상은 활동에 사로잡혀서 삶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92쪽)고 경고했습니다. 연이어 “문제는 삶이지 행동이 아니다.”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격렬하게 싸운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눈에 보이는 행위로만 해석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람을 죽이는 행위로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것, 욕하는 것까지 살인의 범주로 해석했습니다. 간음에 대한 것도 유대인들은 행위만을 문제 삼았지만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까지 간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마태복음5장). 예수님은 이처럼 행위를 단지 눈에 보이는 행위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까지도 행위로 보셨습니다. 존재의 차원, 마음의 차원, 인격의 차원, 성품의 차원까지를 다 포괄해서 행위로 보셨습니다.
구체적인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듣는 자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함으로써 구체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마7:24).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눈에 보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외적 행위에 매달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요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시면서 눈에 보이는 행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차원, 마음의 차원, 인격의 차원, 성품의 차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행위보다 삶과 사람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지 않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강변하셨습니다(막2:27).
이처럼 예수님은 행위를 강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관심은 외적인 행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진짜 관심은 삶에 있었고 사람에 있었습니다. 왜냐?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행위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외적인 활동으로 인해 삶이 치이고 억눌리는 소외가 일어난다는 것, 눈에 보이는 행위에만 집착하는 율법주의와 행동주의에 빠진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그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한국교회도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이라는 믿음주의 빠져 있습니다만, 행위를 중시하는 교회를 보면 진보적인 교회는 행동주의에 빠져 있고, 보수적인 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3.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믿음에서 행위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분명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행위에 시선이 묶이면 위험합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들어도 위험합니다. 예수님처럼 눈에 보이는 외적 행위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행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 행위보다 사람과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인 매뉴얼보다 매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주의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매뉴얼이라는 족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행위로 인해 삶이 소외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행하느냐’이지 ‘어떤 행위냐’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온통 ‘어떤 행위냐’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예배를 드리냐 안 드리냐, 성경을 읽느냐 소설을 읽느냐, 전도를 하냐 술을 먹냐, 공부를 하냐 게임을 하냐, 기도를 하냐 잡담을 하냐, 목회를 하냐 장사를 하냐, 이렇게 항상 ‘어떤 행위냐’, 그 행위를 했냐, 안 했냐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어떻게 행했느냐’를 가지고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떻게 행하느냐’를 살피십니다. 예배만 해도 그래요. 하나님은 ‘예배를 드렸냐, 드리지 않았냐’도 살피시지만 ‘어떻게 예배했느냐’를 훨씬 관심 있게 살피십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기도를 했냐, 안 했냐’보다는 ‘어떻게 기도하느냐’를 훨씬 중요하게 살피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를 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라고 자랑스럽게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말만 토해냈습니다(눅18:10-13).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라는 행위를 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사람의 기도를 똑같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면하시고 세리의 기도만 들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세리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행위만 보지 않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행위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행했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십니다. 믿음도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의해 증명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행하느냐’에 의해 증명됩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도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의해 좌우됩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어떤 행위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느냐’에 관심이 있지 ‘어떤 행위냐’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속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날에 말할 것이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했노라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7:22-23).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속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행했느냐’, ‘왜 행했느냐’ 그것 가지고 판단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어떤 행위를 했느냐’로 난리법석 떨지 말고 ‘어떻게 행하느냐’, ‘왜 행하느냐’ 거기에 신경 쓰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정말입니다. ‘어떤 행위를 했느냐’를 내세우지 마십시오. 오직 ‘어떻게 행하느냐’, ‘왜 행하느냐’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믿음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했느냐’가 아닙니다. ‘어떻게 행했느냐’, ‘왜 행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행하느냐’, ‘왜 행했느냐’ 하는 것이 믿음의 관건이고 성화의 관건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행하느냐’, ‘왜 행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원도 ‘어떤 행위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행하느냐’, ‘왜 행하느냐’의 문제입니다.
4.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또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옳은지 매뉴얼을 말해 달라. 하지만 매뉴얼은 없습니다. ‘어떻게’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전부 다르기 때문에 매뉴얼을 만들 수도 없고,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에 대한 매뉴얼을 만드는 순간 믿음은 율법화되고, 구원은 사물화됩니다. 매뉴얼을 만드는 순간 ‘어떻게’라는 물음은 사라지고, ‘어떻게’라는 물음이 사라지면 믿음도 사라집니다. 믿음은 놀랍게도 ‘어떻게’라는 물음 속에 있습니다. 삶의 매 순간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은 행위의 문제인데, 행위는 정작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의 문제요, ‘왜’의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와 ‘왜’라는 물음이 없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매뉴얼을 제시하는 것은 종교의 몫이지 기독교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매뉴얼을 제시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유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날마다 ‘어떻게’를 물으십시오. 스스로에게 묻고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물으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십시오. 뜬구름 같은 이야기 같이 들리겠지만, ‘어떻게’를 물으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길이요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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