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35 - 해방, 자유, 순명

새벽지기1 2015. 10. 8. 22:55

 

우리는 그동안 구원이 무엇인가를 촘촘히 살펴봤습니다.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창조와 구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의 길을 여셨는지, 구원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통시적인지, 구원의 미래는 어떨 것인지 등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향유하는 구원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구원은 종교적 이론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사후 천국행 티켓이 아닙니다. 땅이나 돈과 같이 소유하거나 쌓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사가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여기서 역사하는 동사입니다. 지금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구원도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향유하는 동사적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향유하는 구원의 실재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해방과 자유입니다. 구원은 영적인 희열로 나타나기도 하고, 신비한 초월경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진리를 깨우치는 각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쁨과 평안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이런 것들이 구원의 실재는 아닙니다. 구원의 실재는 해방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죄로부터의 해방, 어둠으로부터의 해방,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실존은 죄의 실존입니다. 죄 짓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이성에 갇혀 있고, 경험에 갇혀 있고, 세상에 갇혀 있고, 시대에 갇혀 있고, 욕망에 갇혀 있고, 한 쪽으로 치우쳐 있고,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열등감, 과거의 상처, 두려움, 절망, 중독, 군중, 유행, 인정욕구, 탐욕, 권력의지, 돈, 나쁜 습관에 매여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매여 있습니다. 이 시대의 탐욕주의, 업적주의, 개인주의에 매여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좀 있지만 하여튼 예외 없이 뭔가에 사로잡혀 살고, 뭔가에 갇혀 살고, 뭔가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엄청난 착각입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현대인은 거의 대부분 자유를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억압과 갇힘과 지배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성경이 구원을 말할 때마다 구원의 전형으로 제시하는 게 바로 출애굽 사건인데, 출애굽 사건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기 위해 먼저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이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무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3:7-8). 하나님은 이 말씀대로 모세를 통해 당신의 언약 백성을 애굽의 사악한 통치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당신의 언약 백성을 사악한 통치와 억압에서 구출해낸 것이 가장 전형적인 구원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구원도 온통 해방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난 곳 나사렛에 갔을 때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읽으시고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의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곧 자신의 사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4:18).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하고, 눌림에서 해방하고, 귀신에서 해방하고, 유대인의 율법에서 해방하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헛된 우상에서 해방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완전히 해방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각종 억압과 갇힘에서 해방하는 것,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하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었습니다.

바울도 구원을 죄로부터의 해방(롬6:22),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의 해방(롬8:2),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롬8:21)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종의 아들에서 자유의 아들로 해방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갈4:21-31).

 

진실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해방입니다. 자아로부터 해방하고, 욕망으로부터 해방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으로부터 해방하고, 경쟁으로부터 해방하고, 국가 권력 · 언론 권력 · 자본 권력으로부터 해방하고,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식과 편견으로부터 해방하고, 지배욕망으로부터 해방하고, 노예근성으로부터 해방하고, 지난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해방하고, 자기 확신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세상 권세로부터 해방하고, 죄와 어둠과 죽음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구원은 ○○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삶, 하나님을 향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면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무슨 말씀입니까?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출애굽의 최종 목표라는 이야기입니다. 19장에 가면 좀 더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6).

20장에 가면 이보다 더 구체적인 말씀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난 후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애굽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을 요약한 것)을 말씀하시는데, 첫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이고, 둘째 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출20:3-6)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계명이 금지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에게만 옭아매는 매우 불편하고 옹졸한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이 두 계명은 가장 적극적인 인권선언이고, 가장 혁명적인 자유선언이고, 가장 아름다운 휴머니즘입니다. 두 계명이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해방시켰으니 이제부터는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말고 자유의 주인으로 살라’입니다. 이걸 뒤집으면 ‘너희는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섬기면 안 되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고상한 존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위대한 인권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혁명적인 자유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휴머니즘이 어디 있습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계명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권선언이고, 가장 혁명적인 휴머니즘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이 두 계명은 시내 광야에서 처음 주어진 게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하나님 마음속에 있었고, 아담에게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또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버금가는 위대한 존재라는 것, 하나님 외에 그 무엇에도 머리 숙이면 안 되는 영광스런 존재라는 것, 자유의 주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십계명은 이 이야기를 좀 더 분명하게 한 것뿐이에요.

 

사실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의 주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자유의 주인이기를 원하셨고, 모든 인간이 자유를 행사하며 사는 주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주체라고 하니까 뭐 거창한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체란 내가 자유의 주인인 것을 뜻합니다. 내가 자유를 행사할 수 있으면 곧 주체인 것입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절대적 조건입니다. 인간이 주체로 서기 위한 절대적 조건입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패트릭 헨리가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것도 자유가 인간됨의 조건이요 주체됨의 조건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의 주인이 되게 하고, 자유의 주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유의 주인이 되고, 자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것이고, 이끌어 내자말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1). 예수님은 절대 불변의 법칙이 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말이 곧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해방과 자유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향유해야 하는 구원의 실재입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일까요? 자유가 너무 귀한 것이라서였을까요? 자유가 꼭 필요한 것이라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뒤집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했는데 이걸 뒤집으면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가 됩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돈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권력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사람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선거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대통령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내일을 염려하는 사람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외에 무엇인가에 매여 있고, 무엇인가에 굴복하는 사람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만 갖가지 유혹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자유의 주인이 돼야만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만이 자유로써 진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진리가 자유를 낳고, 자유가 진리를 낳습니다.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오직 자유하게 하는 것만이 진리이고, 진리하게 하는 것만이 자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 자신을 봅시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본질상 불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구원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자유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열려있다고 봐야 합니다. 진리의 길과 불의의 길, 순명의 길과 불순종의 길, 두 길이 다 열려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 하나의 길만 열려있으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길만 가도록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자유이겠습니까? 순명의 길과 불순종의 길이 다 열려있어야 비로소 자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과 예수님에게도 두 길이 다 열려있었습니다. 두 길이 다 열려있는 상황에서 아담은 자유로써 불의의 길을 갔고, 예수님은 자유로써 진리의 길을 갔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 앞에도 두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리그도인은 자유로써 순명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자유로써 불순종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바울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권면은 그리스도인 앞에 두 길이 열려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유로써 순명의 길을 가야 하지만 다시 종의 멍에를 멜 수 있다, 자유로써 육체의 소욕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명의 길을 갈 수도 있고, 불순종의 길을 갈 수도 있는 위대한 자유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그리스도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그리스도인이 받은 자유가 그리스도인을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이전에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죄의 종으로만 살면 됐습니다. 고민하고 말 것이 없었어요. 때때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불편할 때도 있지만 눈 딱 감고 죄의 종으로 살면 됐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유인입니다. 순명의 길을 갈 수도 있고, 불순종의 길을 갈 수도 있는 근원적 자유 앞에 선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또한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죄인입니다. 자유로써 불의의 길을 갈 가능성, 자유로써 자기 감정을 따라가고, 자유로써 자기 욕망을 따라가고, 자유로써 세상의 소리를 따라가고, 자유로써 육신의 정욕 · 안목의 정욕 · 이생의 자랑을 추구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또한 죄의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자유로써 진리의 길을 가기에는 턱없이 실력이 부족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유 앞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음성과 불의의 길로 나아가려는 육체의 소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싸움이고 내적 갈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자유로써 순명의 길을 갈 것인가 불순종의 길을 갈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것인가 세상 나라와 자기 의를 구할 것인가, 이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국지전도 아니고 단기전도 아닙니다. 전면전이고 장기전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가 걸린 전면전이고, 죽을 때까지 평생 싸워야 하는 장기전입니다. 참으로 힘겨운 싸움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싸움을 포기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고 슬슬 도망칩니다. 슬슬 자유를 회피합니다. 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율법의 길로 돌아가고, 종교의 길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기도 합니다.

 

예, 충분히 이해됩니다. 너무 힘겨운 싸움이고, 너무 처절한 싸움이다 보니 자유가 부담스러워지고 싸움을 포기하는 것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싸워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얻어터지고 박살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의지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나야 비로소 은혜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의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모든 높아진 것들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만큼, 은혜를 구하는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만큼, 높아진 것들이 낮아지는 것만큼, 내가 죽는 것만큼 자유의 역역이 커지고 깊어집니다. 우리는 자유가 강한 자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는 놀랍게도 자기 약함을 아는 자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날마다 죽는 자의 것입니다. 자유로써 육체의 기회를 삼는 사람은 사실상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유로써 하나님께 순명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진정한 자유는 서로 주인노릇하는 자유가 아니고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입니다.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말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참된 자유인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몸, 삶, 말이 온통 진리이셨기에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인일 수 있었고, 참된 주체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인이요 참된 주체이셨기에 예수님은 참된 인간일 수 있었습니다. 참된 자유인이요 참된 주체이신 예수님, 참된 인간이신 예수님, 이 예수님이 구원의 실재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몸, 삶, 말도 온통 진리가 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유의 주인으로 살 수 있고, 참된 주체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는 진정한 자유인, 참된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바로 이런 인간이 되어가는 동사적 과정입니다. 이미 주어진 자유 앞에서 자유를 살기 위해 싸우는 것,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싸우는 것,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는 주체로 살기 위해 나와 싸우는 동사적 과정입니다. 구원은 종교적 이론이나 환상이 아니에요. 사후 천국행 티켓이 아니에요. 명사가 아니에요. 구원은 지금 여기서 역사하는 동사적 실재입니다. 삶의 매 순간 진리로써 자유를 얻고, 자유로써 진리를 살기 위해 모든 걸림돌과 싸우는 동사적 과정입니다. 이 선한 싸움을 싸우는 동사적 과정 속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