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34 - 종말론적 구원의 실재

새벽지기1 2015. 10. 8. 22:54

 

온 세상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구원 또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온 세상이 두 개나 세 개로 나누이지 않은 것처럼 구원도 두 개나 세 개로 나누이지 않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인 구원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에도 과거적 측면의 구원, 현재적 측면의 구원, 종말론적 측면의 구원이 있고,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받은 구원에도 과거적 측면의 구원인 칭의(중생)가 있고, 현재적 측면의 구원인 성화가 있고, 미래적(종말론적) 측면의 구원인 영화가 있습니다. 오늘은 구원의 종말론적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의 종말론적 측면인 영화는 한 마디로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생명의 질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충만하게 실현되는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종말론적 리얼리티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종말론적 리얼리티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성될 구원의 종말론적 리얼리티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성경은 구원의 종말론적 리얼리티를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 다시 죽음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없다고 말합니다(계21:1-4). 밤과 저주가 없다고 말합니다(계22:3-5). 만물이 하나님께 복종하며 화평을 누린다고 말합니다(고전15:28). 참으로 기분 좋은 세계입니다. 듣기만 해도 희망이 솟구치고 가슴이 뜁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손에 잡히는 건 없습니다. 죽음이 없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세계가 가능한 것인지, 정말 생명이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납득이 잘 안 됩니다. 솔직히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쌀이나 밀을 먹어야 살고, 각종 녹색식물과 열매를 먹어야 살고, 고기를 먹어야 삽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먹이사슬이 있는 것입니다. 냉엄한 먹이사슬이 바로 생명이 살아가는 생존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시고서 땅에서 나는 모든 채소와 열매를 먹이로 주신 것도 바로 그래서입니다(창1:29). 이처럼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사는데 어떻게 애통하는 것이나 죽음이 없을 수 있는지 솔직히 납득이 잘 안 됩니다. 또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이고,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도 납득이 잘 안 됩니다. 의문은 또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삶의 역동성 또한 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죽음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계라고 하니까 좋기는 한데 솔직히 이해는 잘 안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과연 어떤 세계일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당연합니다. 종말론적 구원의 세계는 지금 이 세계와 전적으로 다른 세계입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낯선 세계입니다. 그러니 납득이 되겠습니까? 상상이 되겠습니까? 거의 불가능합니다. 천 년 전을 생각해봅시다. 천 년 전 사람들이 21세기 현대 사회를 상상했을까요? 컴퓨터 하나로 세계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는 오늘의 세계를 상상했을까요? 그들에게 오늘의 세계를 설명하면 이해할까요? 지구가 둥글고,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고 말하면 믿을까요? 거의 불가능합니다. 미친놈이라고 매장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사실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인 것은 똑같습니다. 시공간도 똑같고, 생명의 법칙도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천 년 전 사람들이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거나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지금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떻게 상상하겠습니까?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그 세계의 리얼리티를 무슨 수로 이해하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래스는 “사람은 자기의 경험만 믿는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어느 누구의 지식도 자기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종말론적 구원의 리얼리티는 사람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하기가 어렵고, 설명한다 해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였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 딱 한 번 종말론적 구원의 리얼리티가 드러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두 가지 면에서 매우 독특하고 예외적인 사건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금 이 세상의 생명으로 돌아온 사건이 아니고 이 세상의 생명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명,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정복한 생명을 입은 사건입니다. 사실 죽은 자가 다시 이 세상의 생명으로 돌아오는 사건은 예수님 외에도 더러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적이 있고(왕상17:17-24), 엘리사 선지자도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적이 있습니다(왕하4:32-37).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다비다라는 여인을 살린 적이 있고(행9:36-42), 바울도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진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행20:9-12). 예수님께서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살렸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렸고,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살아난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부활이 아닙니다. 단지 죽었다가 다시 이 세상의 생명으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다시 죽어야 하는 생명으로 잠시 돌아온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다시 죽어야 하는 생명으로 잠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생명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명, 죽음의 물리치고 정복한 생명을 입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고전15:42-43).

매우 적절한 설명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반드시 썩습니다.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죽음에 무릎 꿇었습니다. 위대한 영웅호걸들도 예외 없이 죽음에 잡아먹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몸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지 시공간을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영광스럽지도 못하고 강하지도 못합니다. 끝없이 죄에 노출되어 있고, 쉬 늙고 약해집니다. 하지만 부활의 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영원히 죽음에 무릎 꿇지 않는 몸이라고 말합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긴 생명이라고 말합니다(사25:8, 고전15:54).

 

성경이 증언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홀연히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한참을 동행하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다가 또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집니다(13-31절). 요한복음 20장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는데 유대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문이란 문은 꼭꼭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19절). 8일이 지난 후에 또 제자들이 집안에 있으면서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이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26절). 이것은 예수님이 문과 벽을 그대로 통과했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문이나 벽을 통과하듯이 예수님도 아무런 제약 없이 통과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로 변하기라도 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생전의 몸을 입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마주 앉아 대화도 했고, 함께 걷기도 했고,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서 못 박힌 상처도 그대로 있는 걸 보면 생전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몸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시공간에 거하면서도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기도 했습니다(고전15:6). 이것은 예수님이 서로 다른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 곁에 40일을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승천이 뜻하는 게 뭘까요? 승천은 한 마디로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더 이상 시공간 속에 거할 수 없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영원히 썩지 않고, 영원히 죽음에 무릎 꿇지 않는 몸으로의 부활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부활 이전의 몸은 같은 몸이면서 다른 몸이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부활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의 몸과 같은 몸이면서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지금과 같은 몸이면서 다른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한 이후에도 서로를 알아볼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아볼 것이고, 여러분이 저를 알아볼 것입니다. 저의 외모뿐 아니라 저의 인격적 정체성까지도 상당 부분 유지될 것입니다. 칼뱅도 현세에서 입고 있는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톰 라이트도 부활의 몸은 지금의 육체보다 더 실질적이고, 더 견고하고, 더 육체적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부활의 몸은 지금의 몸과는 차원이 다른 몸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엄청난 변화가 있는 몸일 것입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부활의 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며 놀랄 것이고, 다른 사람을 보며 놀랄 것입니다. 너무도 영광스럽게 변한 서로를 보며 모두가 놀랄 것이고,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을 보며 놀랄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부활은 지금과 같은 몸이면서 다른 몸으로의 부활입니다. 알에서 깨어나는 병아리나 씨에서 돋아나는 수박과도 같습니다. 알에는 병아리의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수박씨에도 수박 줄기나 잎이나 수박의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알에서 병아리가 깨어 나옵니다. 뾰족한 부리, 독특하게 생긴 발, 노랗고 하얀 깃털 등 기막힌 생명이 깨어 나옵니다. 수박씨에서도 뿌리가 나오고, 줄기와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고, 단물을 흠뻑 담은 수박이 크게 맺힙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지금의 몸이 죽고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 죽음이 범접할 수 없는 강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부활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때가 되어야 드러나는 구원의 종말론적 실체가 역사적 시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은 이천 년 전 예루살렘 부근의 한정된 시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말씀을 두 귀로 듣고, 손과 옆구리에 난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본 증인들이 많이 있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꼭 역사적 사건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초역사적 사건입니다.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난 적이 없는 종말론적 구원의 리얼리티가 예외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종말의 리얼리티를 역사 속에서 선취한 사건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바울은 부활을 논증하면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했습니다(고전15:26).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는 일은 종말의 때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죽음을 정복한 것인 만큼 종말에 일어날 일이 선취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켜 ‘첫 열매’라고 한 것도 그래서입니다(고전15:20).

 

옳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의 선취입니다.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면서, 종말론적 부활을 보증하는 약속입니다. 온 생명과 온 세계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계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 두 번 다시 죽음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없는 세계(계21:1-4), 밤과 저주가 없는 세계(계22:3-5), 만물이 하나님께 복종하며 평화를 누리는 세계(고전15:28)가 도래할 것이라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자 보증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놀라운 세계, 총체적인 부활의 세계를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분히 창세기 1장의 ‘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창조된 ‘하늘과 땅’이 전혀 다른 차원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부활이 하늘과 땅 전체로 확장될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구원의 선취입니다. ‘하늘과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하는 총체적 변화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종말론적 변화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변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고, ‘하늘과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구원의 리얼리티가 확연히 드러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손에 잡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셨고, 온 생명은 여전히 죽음 앞에 떨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변화의 기운이 보이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구원의 리얼리티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알에 병아리가 감추어져 있듯이, 수박씨에 뿌리와 줄기와 잎과 수박이 감추어져 있듯이, 정자와 난자 속에 사람의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듯이 종말론적 구원의 리얼리티는 전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부활생명도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골3:3).

그 날이 돼야 드러납니다. 그 날이 돼야 내가 누구인지, 생명이 뭔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온 세계가 어떤 곳인지가 총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전까지는 알아도 아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빛으로 인해 믿음으로 알지만 눈곱만큼 압니다. 아니, 거의 알지 못합니다. 온 생명과 온 세계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계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 두 번 다시 죽음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없을 것이라는 것, 밤과 저주가 없을 것이라는 것, 만물이 하나님께 복종하며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것 정도만 막연히 알뿐 그 세계의 리얼리티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나팔 소리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태초에 창조된 ‘하늘과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히 변화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주적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적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구원의 선취이자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생명으로 불러낸 것처럼 너희도 죽음에서 부활생명으로 불러낼 것이다. 아니, 하늘과 땅을 부활의 세계로 불러낼 것이다. 그러니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에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라.’ 예, 이것이 하나님의 진심어린 부탁이고 권면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한스 요아힘 크라우스는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화해의 효력 발생이며, 죽음을 극복하는 자유의 나라의 개벽이고,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부활절 말과 함께 인간의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세계의 형태가 시작된다. 부활절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이제 인간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규정되고 준비되고 파견되었으며 해방되었다. 이 새로운 삶에서 인간은 과거의 짐, 죄, 죽음, 하나님 상실, 그리고 무덤을 앞에 두고 살지 않고 뒤로 하고 산다.”(조직신학. 352쪽). 정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화해의 효력 발생이며, 죽음을 극복하는 자유의 나라의 개벽이고, 새로운 세계의 시작입니다. 이 부활을 믿는 자는 무덤을 앞에 두고 살지 않습니다. 무덤을 뒤로 하고 삽니다. 무덤은 이미 우리 앞에서 우리 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음이 우리를 결코 멸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를 보증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하늘과 땅은 종말의 날에 불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타 없어지는 것은 심판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정화시키는 작업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결단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종내 승리합니다. 마지막 날에 완전히 회복되고 완성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제가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하면서 서두에 ‘창조는 구원의 토대요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열심히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이 헛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지금 내 몸이 거룩한 성전일 수 있는 것도 창조가 구원의 토대이고 구원은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