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구원 이야기를 추적해왔습니다. 구원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인류의 화두인지부터 시작해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어떻게 뒤틀리고 왜곡되었는지, 뒤틀리고 왜곡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뜨거운 논쟁점은 무엇인지, 왜 구원이 요청되는지, 창조와 구원의 관계가 무엇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왜 죽어야 했는지, 구원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통시적인지, 구원의 종말론적 실재와 현재적 실재가 무엇인지 등을 추적해왔습니다. 오늘은 구원이 어떻게 교회와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구원의 마지막 종착점이 교회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구원론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구원은 한 마디로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해방하고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해방하고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오직 자유하게 하는 것만이 구원이고, 자유하게 하는 것만이 진리입니다. 물론 인간은 진리로써 자유를 억압해왔습니다. 진리의 이름으로 끝없이 전쟁을 했고, 진리를 앞세워 폭압과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 마디로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한 역사였고, 진리를 내세워 자유 위에 군림한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로 자유를 억압하거나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진리로 우리를 해방하셨고, 진리로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유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집단의 것일 수 없습니다. 자유는 철저하게 개인의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전체가 한 방향으로 가는 자유, 전체가 하나의 사상을 추종하는 자유, 전체가 하나의 틀 속에 들어가는 자유, 과연 가능합니까? 온 국민이 자유롭게 아침 6시에 일어나고 자유롭게 8시에 일하러 가는 집단적 자유, 과연 가능합니까? 집단적 자유는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가능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란 인격적 주체에게만 성립 가능한 것이고, 인격적 주체는 절대로 집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나 돼지는 그저 소면 되고, 돼지이면 됩니다. 원숭이도 그저 원숭이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나여야 합니다. 철수는 철수여야 하고, 영자는 영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철수가 철수이기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철수가 철수일 수 있고, 영자가 영자일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내가 나일 수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비로소 인격적 주체일 수 있습니다.
이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인격적 주체로 대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여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집단으로 대하지 않으세요. 항상 개인으로, 인격적 주체로 대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도 집단적으로 구원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구원하십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구원하셨고, 여러분도 개인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은 분명히 개인적으로 받습니다. 어느 누구도 덤으로 끼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반드시 개인적으로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개인은 더 이상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너와 분리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너를 향한 개인’, ‘너와 연합된 개인’으로 존재합니다. 바꿔 말하면 구원이란 뭐냐, ‘너로부터 자유로운 나’, ‘너와 분리된 나’에서 ‘너를 향한 나’, ‘너와 연합된 나’로 나의 존재양식과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죄란 한 마디로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너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목록을 보십시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배제, 약속 어김, 무정함, 무자비함(롬1:29-31), 고집, 당 지음, 불순종, 각색 정욕, 투기, 미움(딛3:3) 등등 하나같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고 선을 긋는 행위들입니다. 너를 부정하고, 너를 공격하고, 너를 이용하고, 너를 배제하는 행위들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믿는다.”(철학의 책. 187쪽)고 말했는데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많이 알든 적게 알든 좌우지간 자기 시야에 갇혀 삽니다. 자기 지식에 갇혀 살고, 자기 경험에 갇혀 살고, 자기 감정에 갇혀 살고, 자기 생각에 갇혀 삽니다. 적극적으로는 너를 부정하고, 공격하고, 이용하고, 배제하면서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을 추구합니다. 너에게 간섭받는 게 싫고, 묶이는 게 싫고, 매이는 게 싫고, 너라는 존재 때문에 내 자유가 제한받는 게 싫으니까 끊임없이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현대인은 유래가 없을 만큼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개인주의라는 기치 아래 너나없이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을 부러워합니다.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사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고,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사는 사람이 진보적인 사람이고,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사는 것이 성공한 자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사회가 갑질하는 사회가 된 것도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능력 있는 사람이고, 진보적인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죄의 굴fp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라고 믿고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에서 구원하셨고,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고 싶다는 삐뚤어진 욕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증표가 혹시 무엇입니까? 저의 경우는 시야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나는 그저 이 땅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나였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서의 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나자 나를 보는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대단한 존재,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 죄에 완전히 물들었으나 다시 구원받은 존재라는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타인을 보는 눈도 새롭게 열렸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타인은 그저 3인칭 그였는데 2인칭 너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너, 하나님이 사랑하는 너로 새롭게 보였습니다. 우주만물 또한 나와 상관없는 막연한 사물이었는데 구원받고 나니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충만히 깃들어 있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중생의 변화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알게 되면 제일 먼저 시야가 바뀝니다. 나를 바라보는 시야,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내 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바뀝니다. 이전에는 들어오지 않던 창조 세계의 질서가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과 땅이 상부상조하고, 태양과 지구와 달이 상부상조하고, 꽃과 벌이 상부상조하고, 숲과 새가 상부상조하고, 숲과 인간이 상부상조하고, 남자와 여자가 상부상조하고, 대륙과 대륙이 상부상조하고, 밤과 낮이 상부상조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인간이 상부상조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창조 세계의 질서가 눈에 들어옵니다. 모든 존재를 독립적 개체이면서도 상호의존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솜씨가 눈에 들어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제일 먼저 시야가 달라집니다. 내 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야(세계관)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시야가 달라지면 삶의 영역이 넓어지고,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삶의 영역이 넓어지고, 겉으로 드러나는 않는 삶의 깊이까지도 들여다보게 됩니다. 존재의 양식 또한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더 이상 자기 안에 갇혀 살지 않습니다. 너를 부정하고, 너를 공격하고, 너를 이용하고, 너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고 선 긋지 않습니다. 너를 향해 나아갑니다. 존재의 양식과 위치가 달라집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화해와 구원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라(요13:34),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롬13:8), 너희는 서로가 지체이니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롬12:5,10), 서로 받으라(롬15:7), 서로 짐을 지라(갈6:2),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 서로 대접하고 봉사하라(벧전4:9-10), 너희 죄를 서로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피차 기도하라(약5:16), 피차 복종하라(엡5:21),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골3:13),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골3:16), 피차 문안하라(벧전5:14)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13:5).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마25:4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마12:50),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6-27)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참여한 구원의 세계는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독불장군)들의 세계가 아니라 ‘너를 향한 개인’들의 세계다, 다시 말하면 피차 더불어 사는 세계, 서로 함께 하는 세계, 상부상조하는 세계다, 그러니 그 세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본래 자기 시야에 갇힌 왜소한 개인, 너로부터 자유로운 왜곡된 개인이었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시야에 눈뜬 위대한 개인, 너를 향해 나아가는 건강한 개인으로 거듭났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왜소한 개인, 왜곡된 개인으로 살지 말고 위대한 개인, 건강한 개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시야에 갇힌 왜소한 개인, 너로부터 자유로운 왜곡된 개인으로 사는데서 구원받았습니다. 서로 싸우고 죽이는 개인, 서로 경쟁하고 배제하는 개인으로 사는데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시야에 눈뜬 위대한 개인으로 살라고, 너를 향해 나아가는 건강한 개인으로 살라고, 너에게 나아가 너와 손잡고 하나님나라를 닮은 새로운 사회를 이루라고 구원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이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2:40). ‘하나님을 부정하고 너를 부정하는 자기 안에 갇힌 삶의 양식에서 구원받으라.’ 그러자 삼 천 명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고, 함께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행2:44-47). 예, 저들은 더 이상 자기 시야에 갇혀 살지 않았습니다.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지체로서 서로 짐을 졌습니다. 서로 위로하며 선행을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피차 복종했습니다. 피차 가르치고 권면했습니다. 함께 손을 맞잡고 새로운 삶을 살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예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삶으로써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예수사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구원이 교회를 낳았습니다. 교회가 구원을 낳은 게 아니라 구원이 교회를 낳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구원받은 자답게 살고 있습니까? 다 아시는 것처럼 그렇지 못합니다. 다들 구원을 받았다고 하기는 하는데 사는 걸 보면 여전히 자기 안에 갇혀 삽니다. 자기가 아는 것과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절대화하며 삽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니까 너는 안중에 없어요. 오직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잘났다고 자랑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분열하고, 속입니다. 특히 오늘 이 시대는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우상이 된 개인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삽니다. 뭐 고민하고 말 것이 없어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의 개인주의에 물들어 그저 몸에 익은 대로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삽니다. 왜소한 개인, 왜곡된 개인으로 삽니다. 개인들이 모여 예배하다가 개인들로 흩어집니다. 심지어 나 홀로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거부한 채 홀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외형은 교회인데 속은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서 너무 멉니다. 세상보다야 낫지만 세상과 많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에서 ‘너를 향한 개인’으로 구원하셨는데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너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시야에 갇힌 왜소한 개인’에서 ‘하나님의 시야에 눈뜬 위대한 개인’으로 살라고 구원하셨는데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자기 시야에 갇힌 왜소한 개인’으로 삽니다. 한 마디로 교회를 이루는데 실패했습니다. 구원을 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사는 공동체인데 구원을 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구원을 받은 자들이 모인 교회가 왜 구원을 사는 일에 실패한 걸까요? 이유는 자명합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뒤틀리고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구원론 자체가 개인구원론, 영혼구원론, 내세구원론, 만사형통구원론, 성공구원론으로 심히 뒤틀리고 왜곡됐기 때문에 구원을 사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구원론 자체가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있고, 구원론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으로 가득 차있는데, 그런 구원론으로 어떻게 교회가 서겠습니까? 어떻게 구원을 살겠습니까? 구원을 살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교회 안에 구원이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구원이 없는 교회는 빛을 잃고 짠맛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영광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뼈아픈 대목입니다. 한국교회는 바로 여기서 넘어졌습니다. 뒤틀리고 왜곡된 구원론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한국교회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구원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윤리회복을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습니다. 구원론이 바르게 서야 교회가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제가 구원론을 설교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구원론이 바르게 서야만 교회가 바르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샘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을 옹골차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깊고 풍성한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피차 위로하고, 서로 용납하고, 함께 손 맞잡고,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삶과 말이 하나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교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일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구원 이야기가 교회 이야기로 전환되었군요. 옳습니다. 구원론과 교회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론이 구원의 이론적 측면(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행하시는가)을 설명한 것이라면, 교회론은 구원의 실천적 측면(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론은 반드시 교회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반대로 교회론은 구원론에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구원론, 건강한 교회론이 설 수 있습니다. 하여, 언젠가 기회가 되면 교회론 설교를 하려 합니다.
어쨌든 오늘로서 구원론 설교를 마칩니다. 구원 이야기가 교회 이야기로 연결되는 이 지점에서 구원론 설교를 마칩니다. 그동안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길고도 긴 구원론 설교를 끝까지 경청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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