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주님은 성막 바깥에 둘 기구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지시하신다. 먼저, 제물을 바치는 제단은 아카시아 나무를 사용하여 가로와 세로 각각 다섯 자(2.25미터), 높이 세 자(1.35미터)의 직육면체로 만들어야 한다(1절). 제단의 네 모퉁이에는 나무로 뿔을 만들어 붙이고 놋쇠를 입혀야 한다(2절).
불을 지피는 도구와 제물로 드린 고기를 다루는 고리와 타고 남은 재를 처리하는 도구들은 모두 놋쇠로 만들어야 한다(3절). 제단 위에는 그물 모양의 석쇠를 두어야 했는데, 이것도 놋쇠로 만들고, 네 귀퉁이에는 고리를 달아 놓아야 한다(4절). 석쇠는 제단 가장자리 밑에 달아놓아야 한다(5절).
제단을 옮길 때에는 채를 이용해야 한다. 채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놋쇠를 입혀야 한다(6절). 이동할 때에는 이 채를 제단 양옆에 있는 고리에 끼워 짊어져야 한다(7절). 제단의 속은 비워 놓아서 이동하기에 용이하게 해야 한다(8절).

묵상:
제단은 예배자들이 속죄제물이나 화목제물을 가져와 태워 바치는(번제) 곳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짐승을 잡기 전에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전가하는 예식을 행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짐승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제사장은 제사 드리는 사람 앞에서 짐승을 도살하고 피를 뿌리고 각을 떠 제단의 석쇠 위에 올려 놓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은 피비릿내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아야 합니다. 또한 제물로 드려진 짐승의 몸이 불타 재가 되는 과정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규정한 이유는 제물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자각하고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제도를 좋지 않은 목적으로 오용하는 일에 뛰어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제 제도를 자신의 죄의식을 해결하는 도구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제단을 “죄를 씻는 목욕통”으로 왜곡시킨 것입니다. 제물을 드린 후에 일어나야 할 삶의 변화가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제단 위의 연기는 그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 가운데 더 깊이 물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제단과 제물은 존재의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십자가는 완전한 제단이었고, 예수님의 몸은 영원한 제물이었습니다. 이제는 짐승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제사를 영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그분이 드린 제사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며 그 영원한 제사를 위해 그분이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안다면, 그분의 보혈로 속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존재일 수 없습니다.
불행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죄를 씻는 목욕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죄를 짓든 보혈로 씻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성을 치유하는 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보혈의 능력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
주님의 보혈이 저희 안에 흐르고 있음을 믿습니다. 저희의 부정한 피를 주님의 정한 피로 바꾸어 주시어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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