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과 나인성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병든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것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사건의 공통점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한 백부장의 신하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장로를 비롯한 몇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들은 이 일을 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 합당하다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유를 말합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인을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에 가서 고쳐주고자 하였으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오심을 감당할 수 없기에 말씀만 하여 고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십니다. 보지않고 믿는 자가 복있습니다. (요 20:29). 그리고 치유하여 주십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백부장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이적입니다. 관에 메고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가고 있는 나인성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합니다(12절). 이 모습에서 나인성 과부의 삶을 짐작하게 합니다. 사랑과 선을 행하는 삶이 장례의 현장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아름다움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위대한 선지가가 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능력이 사라진 시대는 말씀이 작아지고 사람의 소리가 커진 시대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지배하면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소리가 지배하면 욕망만 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과 나인 성 과부의 삶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과 선을 행하는 일에 진심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백부장과 나인성 과부와 함께하였던 공동체의 사랑과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과 사랑을 기쁘게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권자이며 장차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부실해지는 시대에 다시금 말씀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를 다시금 돌아봅니다. 내 자신이 공동체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돌아봅니다. 오늘도 말씀의 능력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좋은 말씀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가 누구이기에 (눅 7:36-50) / 신동식 목사 (0) | 2025.03.01 |
---|---|
모든 자녀로 말미암아 옳다함을 얻는 지혜 (눅 7:18-35) / 신동식 목사 (0) | 2025.02.28 |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 (눅 6:39-49) / 신동식 목사 (0) | 2025.02.26 |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눅 6:27-38) / 신동식 목사 (0) | 2025.02.25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눅 6:1-11) / 신동식 목사 (0) | 2025.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