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회선교와 영성의 상관관계
우리가 사회선교적 삶을 살고자 할 때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은 직장이나 친구들이나 세상의 체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도 모두 싸워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월터 윙크는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방대한 책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에 대해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권세들이란 가시적인 동시에 불가시적이고, 땅의 것인 동시에 하늘의 것이며, 영적인 동시에 제도적인 혹은 구조적인 것이다. 권세들은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표현을 갖고 있기도 하고, 또 내적인 영성, 회사의 문화, 집단적 인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진실을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다. 내 안에 있는 성공에 대한 욕망, 빨리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과 싸워야 하는 이 내적 싸움이야말로 날마다 직면해야 하는 진정한 싸움이다. 우리의 진짜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엡6:12).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과의 싸움이요, 어둠의 영들과의 싸움이다. 보이지 않는 싸움이 진짜 싸움이다.
만일 보이지 않는 내적 욕망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사회선교란 허상이 되고 말 것이다. 자기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회선교적인 삶을 순전하게 살 수 있겠는가? 또 하나의 ‘경건사업’, 또 하나의 ‘사회사업’이 되지 않겠는가? ‘사회선교’가 진정한 ‘사회선교’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사회사업’의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과의 내적 싸움에서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를 풀어주는 힘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올까?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만이 욕망의 사슬을 끊고 자유케 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함을 보아야만 그 부요함으로 인해 세상 욕망을 끊을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에게 베푸신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고 누리는 자라야(엡1:18) 자기 이익에 굶주리지 않는 자가 될 수 있고, 자기 이익에 굶주리지 않는 자라야 욕망에 붙잡히지 않고 사회선교에 매진할 수 있다.
사회선교와 영성의 상관관계를 바라보는 입장을 정리해 보자.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영성을 사회선교의 추동력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회 선교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과 충실한 교회생활을 통해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고, 강한 비전과 영성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뜨거운 영성이 사회 선교적인 삶을 이끌고 가는 추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약점이 있다.
(1) 영성 우선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영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우선순위에서 영성에 밀려 사회선교적인 삶은 뒷북을 치고 영성의 확보에만 전전긍긍 매달리는 형국을 면치 못하게 될 염려가 있다. 물론 영성이 사회선교의 추동력이 되어야 하고, 영성이 사회선교의 토대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영성이 사회 선교의 토대라는 것과 영성이 사회선교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다. 영성 우선주의는 영성을 훈련하고 영성을 확보하는 데만 매달리는 영성 환원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영성에 발목이 잡혀서 영성 외에는 다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
(2) 신앙을 심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하는 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많다.
사회선교적 삶을 위해 신앙을 뜨겁게 하고, 사명감과 헌신의 강도를 높이는 쪽에 신앙훈련을 집중하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신앙적 열정과 다이나믹을 이끌어내고, 헌신의 강도를 높이는 데는 신앙을 강화하는 것이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러나 참 묘한 것은 신앙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사회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더라는 것이다. 특히 함께 일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불같은 사명감으로 열심을 다하는 것도 좋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좋은데, 이런 신앙은 자칫 일 자체에 지나치게 선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사명이라는 굵은 띠로 자기를 꽁꽁 묶어 일에 임하는 자세가 경직되거나 필요 이상의 짐으로 스스로를 짓누르는 경우가 많다. 또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지나치면 자기 독선에 빠질 수도 있다. 이처럼 지나친 사명감과 지나친 열정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게 눈을 가로막아 사회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거칠고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기 쉽다. 뜨거운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본 나머지 사람을 보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사람을 돌보아야 할 사회선교적 삶의 과정에서 사람을 해치고 상처를 가하는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강화하는 ‘영성 우선주의’가 아니라 신앙을 심화시키는 ‘영성 토대주의’에 굳건히 서야 한다.
둘째, 영성을 사회 선교의 태도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회 선교에 접근하는 자세와 동기를 중시한다. 사회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때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를 영성의 중요한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에 덤비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태도로 일을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일 자체에 있지 않다. 일에 참여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것이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또한 일에 임하는 자세, 일하는 태도, 일을 하는 과정도 역시 일보다 더 영적인 의미가 있다. 이처럼 영성을 사회선교에 임하는 동기와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관점은 다음의 진실을 잊지 않는다. 최고의 영적 증언은 '일'이 아니라 일을 하는 '나'라는 진실을.
앞에서 말한 두 관점은 사실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두 관점이 다 필요하다. 내면세계의 동기와 태도를 중시하지 않으면서 외면적인 행동에만 집중하는 것도 문제고, 또 외면적인 행동 없이 내면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문제다.
열정적인 사회 선교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뜨거운 헌신의 열정이 뒷받침 돼야 하고, 사회선교적 삶이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건강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의 동기와 일에 임하는 태도를 돌아보는 영적인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결국, 첫 번째 관점은 두 번째 관점으로 보완되어야 하고, 두 번째 관점은 첫 번째 관점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그럴 때 사회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도 바른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사회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깨우침을 준 영성의 사람 중 한 사람인 헨리 나웬은 일에 쫓겨 삶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경계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한적한 곳을 모르는 삶, 고요가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쉽게 파괴된다. 우리가 자아의식을 오직 활동의 결과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소유욕만 커지고 늘 방어 태세가 되어 언제나 이웃을 멀리 두고 경계해야 할 적으로만 간주할 뿐, 삶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나누어 갖는 친구로 여길 줄 모르게 된다. 우리가 홀로일 때 소유욕이라는 환상의 탈을 벗고, 우리 내면에서 삶이란 우리가 정복한 결과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헨리 나웬의 이 목소리는 사회선교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명상이 없이는 충분히 행동적일 수 없고, 어느 정도의 행동 없이는 충분히 명상적일 수 없다.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과 함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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