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신앙과 정의로운 삶

새벽지기1 2023. 5. 9. 06:21

5. 신앙과 정의로운 삶

우리가 신앙을 생각할 때 놓치지 않아야 할 원칙이 있다. 신앙은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신앙은 영적 세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신앙은 하나님을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주어진 선물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다. 가장 심원한 신앙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예배와 금식과 관련해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제물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살진 짐승을 바치고,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는데 열심을 다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작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 오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이 마음 다해 드리는 제사가 싫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란다(사1:11-15). 금식도 그렇다. 그들은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아 금식을 했다. 그러나 금식을 하면서도 자기들의 향락을 찾고, 노동을 착취하고, 서로 다투었다. 그러니 그게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 굶주린 자에게 먹거리를 나눠 주며 떠도는 빈민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형제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사58:3-7).
이사야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소위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무조건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약한 자를 배려하고, 함께 나누며,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종교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한 삶이 진짜 금식이요 진짜 예배라고 하신다.

미가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허울을 꼬집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기뻐하실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할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할까를 놓고 머리를 굴렸다. 즉, 종교적인 뇌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은 오직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6-8)을 기뻐하신다고.
여기서 미가 선지자가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세 가지 덕목을 그냥 나열한 건 아니다. 세 가지 덕목은 서로 연결고리로 묶여 있는 하나다. 어떤 덕목도 다른 덕목이 없이는 그 빛을 발할 수 없을 정도로 셋은 하나로 묶여 있다.

 

잠깐 생각해 보자. 공의를 실천하는 것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자비가 없는 정의를 생각해 보라. 얼음처럼 차갑고 짐승처럼 냉혹한 정의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비가 없는 정의는 때로 내편이 아닌 것을 무차별 공격하고 사살하는 불의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무서운 인종청소(독일 나치의 유대인학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계의 무슬림학살)는 자비가 없는 정의가 저지른 인류 최대의 죄악이었다. 세상에 자비 없는 정의보다 더 무서운 칼은 없을 것이다. 또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데서만 그 힘이 주어진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는 자가 자비와 공의를 행할 수는 없다. 한편 공의가 없는 자비는 어떤가? 공의가 없는 자비는 감상적이고 나약한 것이 되기 쉽다. 착취적인 경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서 착취적인 경제 구조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없다. 남녀를 차별하는 사회 구조를 방치하면서 여성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도 진정한 자비라고 할 수 없다. 자비에는 언제나 공의가 동반해야 한다.
이처럼 각각의 덕은 서로를 통해서만 고유의 덕을 실천할 수 있고, 덕이 오용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다.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셋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같은 말씀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했다(마5:13-14).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형제와 불화한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고 했다(마5:24). 보복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마5:44). 사도 바울은 피차 돌아보라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주님을 사랑하라고, 덕을 세우라고 했다(롬12장).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다(요일4:20).

 

이처럼 신약이나 구약의 모든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자매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리가 일관되게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눈에 보이는 모습은 달라도 실상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결국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을 품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결코 세상과 분리되거나 세상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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