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세상의 친구인가 하나님의 친구인가 (야고보서 4:1~12)

새벽지기1 2022. 4. 2. 05:41

“하나님의 친구는 정결함과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세 종류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이방인, 외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단지 우리를 추종자로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친구로 이끄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친구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신앙으로 살고 있습니 까? 예배에 참석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방인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추종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친구처럼 대화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 모세는 진영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보좌하는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출 33: 1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눠 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만 이러한 관계를 맺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라고 한 성경이 이뤄졌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습니다”(약 2:23).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른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 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모세와 아브라함만 그랬겠습니까? 예수님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 로 대해 주시고 불러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너희가 만일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나는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 인의 일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으니 친구라고 부르는 것이다”(요 15:13~15).

 

“우리를 친구로 초청하십니다”

 

종과 친구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종은 주인이 시켰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친구는 친구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초청하십니다. 친구, 우정으로서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실 때 각자를 향한 계획이 있습니다. 청사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면만 강조해서 ‘ 하나님이 계획대로 하시니까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생각에 빠지면 자신의 지혜와 지식, 경험을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는 자신의 지혜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이 어떻게 하나될 수 있습니까? 바로 우정입니다. 하나님과 사귐, 관계, 교통,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획을 알려 주시고,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에 귀 기울여 주셔서 합당하면 들어 주시고, 계획을 바꾸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뜻을 함께 이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십니다. 성경의 여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의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심으로 계획을 열어가시고 이끌어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초대하고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우리를 친구로 대해 주시는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8 절).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정욕입니다. 정욕은 정결함을 거슬러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이끕니다. 정욕은 관계 속에서 싸움과 다툼을 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못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기도할 때조차 정욕으로 구하기에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탄의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멀리 떼어놓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동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할수록 우리도 모르게 사단의 친구, 세상의 친구로서 사단과 동역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 마음에 있는 정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영향력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고 능력임을 모르게 합니다. 시편 73편 2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해 본 경험이 있는 성도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로서의 우정, 친구로서의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고 한 성경 말씀을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5절).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찾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친구로 살아갈 때 성령님이 시기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사탄의 권세와 통치 아래 하나님을 대적하는 친구들이 가득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시기하시기까지 사 랑하셔서 세상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세상과 멀어지도록 양심을 일깨워서 괴롭히십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쓰디쓴 고통이 되게 합니다. 세상과의 우정을 끊어 놓으심으로 불편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꾐에 넘어갔을 때 하나님이 뱀과 우리를 원수 되게 하셨습니다. 뱀으로 대표되는 사단과 이 세상 질서와 원수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친구처럼 동산을 거닐며 대화했던 태초의 인간이 세상과 친구가 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관계를 끊으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4절). ‘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 들이 모두 여자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  민족이 과거 하나님의 신부로 불렸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명사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맥을 영어 성경에서는 ‘adulterous people’ 이라고 번역합니다. 성을 빼고 ‘간음하는 사람들’ 이라고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지 못한 교회는 영적 간음을 하는 것이고, 정결함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정욕을 따라가면 세상의 친구가 되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간음하는 이들’입니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세상 가 운데 찾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고, 믿게 하심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믿는 이들을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은 교제와 연합으로 이끄시고 강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 반드시 성령님의 시기하심이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벗하려고 할 때, 세상과 친구 관계로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시기하시고, 불편해하시는 임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결함 가운데 하나님의 친구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고, 축복된 일인지를 우리가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욕에 이끌려 세상의 친구로 살아갈 것인지,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님의 친구로 살아갈 것인지 두 갈래에 놓여 있습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 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여러분을 피할 것입니다”(6~7절).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는 교만때문입니다. 교만의 끔찍한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속일 뿐만 아 니라 자신도 속습니다. 짐승은 자기가 짐승인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짐승같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겸손이란 교만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 안에 교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죄 가운데 엄청난 교만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사탄이 그 교만을 이용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하고, 세상의 친구가 되게 해서 자기와 한편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의 도구가 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교만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세상의 친구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까? 교만이 자기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하나 님처럼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영혼은 반드시 겸손합니다. “청년들이여,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서로를 향해 겸손으로 옷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서 겸손하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벧전 5:5~6).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가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보면 비슷한 시기 사도들이 강조했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과 흩어진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강조했던 교회의 영적 표어와도 같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영혼은 결코 하나님의 친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교만은 순수한 영적 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들은 사탄이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서 죄를 짓게 하지만, 교만은 순수한 영적인 악이기 때문에 교묘하고 치명적입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유명한 고전 <겸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는 죽음이 겸손의 완전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아의 죽음이라는 꽃에서 맺히는 완전한 열매입니다.” 겸손의 본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 서 “이와 같이 여러분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십시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를 때 겸손을 온전히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가 마지막 단계에 이를 때까지 방해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로 동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우리 영혼에 임할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라”

 

셋째,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이여, 서로 비방하지 마십시오. 형제를 비방하거나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사람은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율법을 판단한다면 당신은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하는 사람입니다”(11절).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않고, 정욕을 따라 행하고, 겸손하 지 못하고 교만할 때 반드시 서로에 대한 비방과 판단, 다툼 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최후의 심판자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행하는 판단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다른 사람의 동기를 최악의 경우로 추정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욥에게 그랬습니다. 사탄이 욥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 어떻게 고소했습니까?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있으니까 경외하는 것 아닙니까?” 축복을 앗아가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땠습니까? 욥은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동기를 최악으로 추정하는 것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 방법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선적입니다. 자신의 무거운 죄는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은 들추어 비방하는 것도 하나님의 친구로서 동행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한 판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와 심판하시는 이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고 멸망시키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판단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12절).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오류와 위선과 악의와 편견 없이 판단하시는 재판장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초 대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초대하십니다. 타락 이전에 아담이 에덴동산을 거닐며 하나님과 대화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친구로 초청을 받습니다. 친구는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고 동행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로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친구로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 나라에 외인이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보혈로 구속하시고

“이제 너희는 내 친구”라고 초청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친구로 살아가는 은혜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정욕, 교만, 판단이 세상의 친구로 살아가도록 이끌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안에 정결함을 주시고, 겸손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친구로 동행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날마다 더 가까이하는 은혜 속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