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온전한 믿음은 혀를 제어한다 (야고보서 3:1~12)

새벽지기1 2022. 3. 20. 07:36

“온전한 믿음은 혀를 제어합니다.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우리의 혀가 용기와 소망을 주는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서 주신 소중한 선물은 말하는 능력입니다. 같은 종류의 동물들도 서로 소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소리나 몸짓, 냄새 등 그들만 아는 소통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적인 언어로 말하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주신 말하는 능력은 우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교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 만물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통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말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을 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합니다. 인간의 존귀한 가치를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말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죄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을 망가뜨렸기 때문입니다. 말이 독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관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 고 있습니다. 말이 가져오는 혼란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말이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지, 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목적은 우리가 온전한 영적 성숙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험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서 온전한 영적 성숙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온전한 영적 성숙과 온전한 믿음의 또 하나의 증거를 3장에서 말씀합니다. 말의 사용입니다. 우리의 혀를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제어할 수 있다면 온전한 믿음에 이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 절제 열매는 분명 우리가 길들이고 제어하기 힘든 언어까지 포함합니다. 만일 말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밖의 모든 영역에서도 온전한 믿음에 이르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혀

 

오늘 본문에서는 온전한 믿음은 혀를 하나님의 뜻대로 제어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혀를 제어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혀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엄청난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말에 실수가 없다면 그는 자기의 온몸도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한 사람입니다”(2절b). 말은 엄청난 영향력이 있습니다. 작은 혀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한마디도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생명으로 향하는 방향이든 죽음으로 향하는 방향이든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영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 달리는 말의 입에 물린 재갈입니다. 로마 시대에 가장 빠르고 편안한 도구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말이 어떻게 제어되는지를 봤을 것입니다. 말의 입에 물릴 작은 재갈을 통해서 그 힘센 말을 제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혀의 기능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말에게 재갈을 물려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 도록 제어하듯이, 우리 혀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큰 배를 움직이는 키입니다. 작든 크든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짓는 것 은 키입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항해사가 키를 붙잡고 배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방향을 혀로 행하는 말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내뱉은 말을 자신이 다시 먹으면서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합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0~21, 개역개 정).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먹고 삽니다. 자신의 말이 독인 줄 모르고 계속 먹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되고, 자신의 말이 약과 같은 사람은 그 말을 먹고 곧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악독한 말을 내뱉습니다.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 방향을 결정하는 말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의 방향도 결정짓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명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귀 기울이는가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죄, 마음, 구원의 필요성 깨닫게 하는 혀

 

둘째, 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 마음이 얼마나 더러운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 중반부에 혀의 부정적 영향을 설명하는 여러 표현이 나옵니다. 첫째, ‘ 불의의 세계’ 입니다. 혀는 불의입니다. 혀는 우리 안에 있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바퀴를 불사르며, 지옥불에 의해 불살라집니다. ‘지옥불’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우리의 혀는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바퀴를 불살라버립니다. 또한 ‘지칠줄 모르는 악’입니다. 악은 쉬지 않습니다. 사탄이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일합니다. 사탄의 도구가 되는 악의 통로가 우리 혀가 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말하는 우리의 말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 이는 독’과 같다고 했습니다. 죄인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말이 독이 되어 사람을 죽입니다. 실험하는 사람들이 물을 가져다 놓고 부정적인 말, 저주하는 말을 쏟아 놓고, 또 다른 물에는 칭찬과 격려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말에 따라서 물의 성분이 바뀐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쌀이나 곡물도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상태가 바뀐다는 기록을 여러 차례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죄악으로 가득한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며 그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이사야 5장을 보면 여섯 차례에 걸쳐 “화 있을진저. 너희들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을 선언합니다. 일곱 번째 재앙 선언은 자기 자신에게 전해졌습니다. “내가 말했다. ‘ 아! 내게 재앙이 있겠구나! 내가 죽게 됐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인데,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사이에 내가 살고 있는데, 내 눈이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보았으니!’”(사 6:5). 하나님 말씀의 통로가 된 이사야가 마지막으로 발견한 재앙은 자신의 입술에 더러움에 내려지는 것이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혀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스랍 중 하나가 재단에서 불붙은 숯불을 이사야 입에 대고 말했습니다. “보아라 이것이 내 입술에 닿았으니 네 죄는 사라졌고 네 허물은 덮어졌다”(사 6:7). 이사야의 입술이 더러운 입술이라면 우리의 입술도 더러운 입술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이 불붙은 숯불로 태워져야 했다면, 우리 모두의 입도 태워져야 합니다. 이사야의 입술로 범한 모든 죄를 사하시고, 허물을 덮어주신다면 우리 모두의 입으로 범한 죄도 사하시고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일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함 받은 사람이 입술로 범한 모든 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학대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을 깎이는 잠잠한 어미 양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사 53:7). 십자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이 입을 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왜 입을 열지 않으셨을까요? 그 고난이 너무 심각해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깊은 의미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고난 속의 침묵은 우리의 모든 입으로 행한 죄를 구속하시는 대속의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옛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고 새 생명으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처럼 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만 입을 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 인식하게 하는 혀

 

셋째, 혀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이후 자신의 입을 다시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스로는 입을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면 내 혀가 주의 의를 노래할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내 입술을 여소서. 그러면 내 입이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시 51:14~15). 죄 가운데 있었던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이 닫혀 있었습니다. 회개하고 주께서 용서하심을 확신했을 때 혀가 다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들은 자신의 입술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열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서도 여전히 옛사람의 영향력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특징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입니다. 앞 뒤가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혀로 주와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그것으 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찬양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오니 내 형제들이여, 그래서는 안 됩니다”(9~10절). 옛사람의 특징입니다. ‘갈라진 혀’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릴 때 어떤 의사들은 진찰할 때 꼭 혀를 내밀어 보라고 했습니다. 혀의 색깔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건강상태를 진단했던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건강도 혀를 통해서 체크 할 수 있지만, 영적인 건강은 우리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로 다른 형제를 저주하는 모습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이 형제를 저주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반드시 혀를 제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에 합당한 새로운 언어 패턴으로 변화됩니다. 혀의 성화가 일어나는 것입 니다. 이사야가 제단 숯불로 입술을 태웠듯이, 거룩한 성령의 불로 태워진 입술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혀를 제어합니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개역개정). ‘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말씀은 우리 입술의 열매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이라면 말한 대로 창조의 능력을 부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는 영혼을 살리는 말을 하면 그 말에 창조의 능력을 주셔서 영혼이 살아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말을 할 때 하나님이 혀의 권세를 사용해서 창조적인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 용기를 북돋워 주는 말을 할 때 창조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소개할 때 쓰신 단어가 ‘ 파라클레토스 ’입니다. 늘 곁에 있으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표현에서는 위로자, 상담자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피조물인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임하실 때 성령님의 역할대로 위로와 격려, 상담과 회복의 말, 살리는 말을 하게 됩니다. 미국 국회에는 고아가 가정위탁 보호를 지나 사회로 나아 갈 때 몇 사람을 인턴으로 세워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합니다. 한 상원의원이 한 젊은이를 인턴으로 채용했습니다. 그 젊은이가 출근해서 우편물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상원의원이 그 젊은이에게 인사하면서 “자넨 참 대단하네. 우편물실이 이렇게 깨끗한 적이 없었는데, 자넨 참 일을 잘하네”라고 했습니다. 몇 분 후 그의원은 젊은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네 괜찮나? 내 말이 거슬린 것이 있었나?”라고 물었더니 젊은이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원이 다시 “그러면 왜 눈물을 흘리나?”라고 물었더니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제 평생 처음으로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어느 중환자실에 두 사람이 한 병실에 있었습니다. 한 환자는 하루에 1시간씩 상반신을 일으키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치료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침대는 병실에 유일한 창가에 있었습니다. 또 다른 환자는 종일 누워만 있는 상태였습니다. 창밖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 몇 시간씩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족과 일, 군대 갔던 이야기, 휴가 갔던 이야기, 삶의 모든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창가에 있었던 환자는 상반신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보이는 세상에 대해 누워 있는 환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창가의 환자에 의하면 창밖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공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오리와 백조 때가 물가에서 노닐었고, 아름답고 거대한 고목들이 멋진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가끔 공원에서 퍼레이드가 있었고 아이들과 많은 젊은 연인들이 노는 등 행복한 모습을 계속 전달해 주었습니다. 누워 있는 환자는 날마다 그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창밖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들으면서 삶을 소망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창가의 환자가 숨을 거둔 것을 간호사가 발견했습니다. 그는 잠자듯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얼마 후 누워 있는 환자가 자신의 자리를 창가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움직이기 힘든 몸이지만 한쪽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고 가까스로 창밖을 내다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벽뿐이었습니다. 놀라서 간호사에게 질문했습니다. “아니, 창가에 있는 환자가 나에게 멋진 창밖 세상을 말해 줬는데 그것이 다 거짓이었습니까? 왜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간호사는 “그분은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벽조차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누워 있는 당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의 혀가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와 소망을 줄 수 있는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혀를 제어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게 합니다. 타락한 마음의 악독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옛사람의 모든 영향력을 끊어 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거룩한 통로로 쓰임 받는 거룩한 입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