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고,
성결을 우선으로 하고, 화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신약의 지혜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잠언을 읽는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함으로 믿음의 온전함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지혜를 강조하는 것은 이 둘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는 데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믿음이 지혜를 만나야 온전한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지혜 없는 믿음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많이 봅니다. 지혜 없는 믿음은 자기중심적인 믿음, 광신적인 믿음, 해로운 믿음으로 변화될 위험이 매우 큽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약 1:5). 이 말씀은 시험을 인내하고 이겨내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믿음대로 행하기 위한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오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 분에게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 1:17).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온갖 좋은 선물과 온전한 은사의 핵심은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지혜와 선물을 의지해야 믿음대로 행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깨닫는 것이 지식입니다. 믿음대로 행하는 능력은 지혜의 영역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오늘 본문에서 지혜를 강조하는 것은 야고 시대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시험 때문입니다. 야고보 시대의 성도들은 핍박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떠나 가난한 삶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다툼, 분열, 싸움입니다. 핍박, 가난, 다툼이라는 시험은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습니다. 핍박이 가난을 만들어 냈고, 가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어서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중에서 ‘열심당원’ 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폭력 중심의 대응을 주장했습니다. 혁명을 주창했습니다. A.D. 66~70년경 폭동이 자주 일어났고, 유대는 그 폭동으로 인해 황폐해졌습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결국 멸망했습니다. 당시 야고보는 폭력적인 혁명이 아니라 정반대로 고난을 인내하라고 했습니다. 야고보가 하나님의 말씀을 권면한 것이 열심당원 같은 세속적인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기력하고, 무력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야고보는 핍박과 가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고난 가운데 인내하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권면을 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 속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선한 행실을 통해 지혜에서 나오는 온유함으로 자기의 행위를 보이십시오”(13절).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의 의도는 지혜로운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주어가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을 찾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지극히 없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13절 전반부를 이렇게 바꿔 읽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선한 행실과 온유함으로 자신의 행위를 보이라. 너희의 의견, 선택, 행위가 지혜에 속한 것이라면 선한 행실과 온유함이 나타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18절에서 “행위 없는 너의 믿음을 네게 보이라. 나는 행위로 나의 믿음을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참된 증거가 행위인 것처럼, 지혜의 참된 증거 또한 선한 행실과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 ‘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참된 지혜와 정반대되는 세속적 지혜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땅에 속한, 이 세상적인, 마귀적인 지혜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 속한 지혜 ‘시기’와 ‘야심’ 하나님 지혜‘ 선한 행실’과 ‘온유함’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지독한 시기심과 야심이 있다면 자랑하거나 진리를 대적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이 지혜는 하늘에서 오는게 아니라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입니다. 시기심과 야심이 있는 곳에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14~16절). 세속적인 지혜의 징후 그 중심에 시기와 야심이 있습니다. 시기와 야심도 겉으로는 열심으로 나타납니다. 열심당원들이 폭력적인 방법을 주창했던 것처럼 그 열심 이면에 숨어있는 시기와 야심을 분별하지 못하면 갈등이 증 폭되고, 다툼이 심화합니다. 결국 마귀가 기뻐하는 온갖 악한 행위와 혼란이 찾아오게 됩니다. 시기심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시기심은 사단에게서 나온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의 중심입니다. 인류 최초 살인이 가인의 시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때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가인이 시기심으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의 몰락 원인도 시기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올 때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울의 시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왕으로서의 모든 에너지를 다윗을 제거하는 일에 소모하는 인생으로 몰락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빌라도를 압박하고, 거짓으로 선동하고, 불법으로 재판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동기도 시기였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를 시기해 자기에게 넘겨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마 27:18).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지도자들의 동기 또한 시기였습니다. 시기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 안에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이었고, 그 분열의 원인은 시기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으니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사람의 악한 본성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파다’ ,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파다’ 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까?”(고전 3:3~4). 고린도교회는 열심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다툼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 뒤에 시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열심 뒤에 숨겨진 시기심을 끊어내지 못하면 그 열심에 속아 모두가 마귀에게서 오는 악한 지혜인 시기에 무너집니다.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 권면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에서도 고린도교회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 어디서 오며 다툼이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 속에 있는 싸우는 정욕에서 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욕심을 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투고 싸우지만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약 4:1~2).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그 시대 교회의 또 다른 시험이 다툼과 분열이었기 때문입니다. 극한 핍박과 가난 속에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느냐에 따라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틈을 마귀가 이용하는 것입니다.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열심과 해결책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엄청난 악이 나타납니다.
‘아마데우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음악가 모차르트를 다루지만 실제 중요한 주인공은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입니다. 살리에리도 훌륭하고 성실한 궁정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모차르트의 천재적 재능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시기심이 불타올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차르트를 무너뜨릴까?’ 몰두하면서 자신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살리에리를 위로하고 도우려고 찾아갔던 신부가 그에게 했던 말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 기에 평등하다”입니다. 이 말은 살리에리가 품고 있는 생각과 정반대였습니다. 살리에리는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성 하게 노력하고 애쓰고 철저하게 살아가는 데, 아무렇게나 사는 것 같고, 노력도 안하는 모차르트에게 하나님이 자신은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이 살리에리의 마음에 깔려있었습니다. 그 토양에 시기심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시기심을 어떻게 합리화합니까? ‘하나님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합리화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불타오르는 시기심은 평등에 대한 왜곡되고 잘못된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잘못은 평등에 대한 왜곡된 사상으로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타오르게 하고, 자신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지보다 다른 사람이 잘못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등의 사상을 왜곡하면 사람들의 지배적인 동기가 시기심이 됩니다. 이 땅에 속한 지혜의 중요한 징후의 중심이 시기와 야 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 지혜의 징후는 선한 행실과 온유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이 두 가지 사건을 대조하면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땅에 속한 지혜의 징후가 시기심과 야심이라면, 하늘에서 오는 지혜의 징후는 선한 행실과 온유함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의 중심에는 시기심이 아 니라 온유함이 있습니다.
나를 움직이는 내면의 동기가 시기인지 아니면 온유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온유함은 연약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강인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는 강인함 입니다. 이 땅에 속한 지혜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과 특징이 자랑과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는 지혜의 특징은 성결과 화평입니다. 이 땅에 속한 지혜는 자랑과 거짓말을 반드시 사용합니다. 거짓을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땅에 속한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며, 관용하며, 양순하며, 긍휼하며, 선한 열매가 가득하며, 편견이 없으며 거짓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의 중심 첫째, 성결 둘째, 화평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8가지입니다. 내용을 보면 성령의 9 가지 열매와도 유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내용과 도 유사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하늘의 지혜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지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가 성결, 거룩입니다. 두 번째가 화평, 하나 됨입니다. 순 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화평이 첫 번째가 아니라 성결이 첫 번째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함이 첫째요, 그것을 통해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팔복의 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가 먼저고 화평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결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평은 팽개치고 순결만을 추구할 때 분열이 가속화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하고 화평만 추구합니다. 화평만 추구하고 성결을 팽개칩니다. 그때 혼탁하고, 퇴색한 공동체가 됩니다. 성결과 화평은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 함께 나타납니다. 그 뒤에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등이 나타납니다. 모두 품는 것입니다. 화평의 영역입니다. 뒷부분에 나오는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은 다시 성결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늘에서 오는 지혜의 중심에 성결과 화평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회 역사적으로도 성결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분열이 자주 됩니다. 거룩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분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분리한 사람들끼리 또 분열합니다. 화평만을 강조하면 혼합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섞어버립니다. 때로는 불의까지 말입니다. 옳지 않은 사상까지 섞어서 화평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지혜는 우선 성결하고 그다음에 화평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지켜야 한다. 그 뒤에 나오는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을 비춰서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 살아가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의 결과 ‘의’와 ‘화평’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따를 때 나타나는 결과가 의와 화평입니다. 땅에 속한 지혜는 혼란과 악한 일을 이루지만,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의와 화평을 누립니다. 땅에 속한 지혜는 중심에 지독한 이기심과 야심이 있어서 자랑과 거짓말, 혼란을 만들어 냅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중심에 온유함이 있어서 성결과 화평을 중심으로 의와 화평을 이루어갑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속한 생각에 끌려갈 것인지, 아니면 하늘에 속한 지혜를 이끌어 갈 것인지가 나타납니다. 다툼과 분열로 얼룩진 교회 공동체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이 대조가 나타납니다. 땅에 속한 지혜를 따르는 사람들은 중심에 숨겨진 시기와 야심이 있습니다. 거짓을 사용하고, 비난하고,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고, 혼란과 악한 행위가 공동체를 물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온유함과 선한 행실, 거짓 없고 성결과 화평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결국 의를 이루고, 다시 회복 되고, 새로운 공동체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의 열매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 화평의 씨를 뿌려 거두는 것입니다”(18절). 잠언 말씀에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지혜와 명철을 얻어라. 지혜가 최고”라고 합니다. 때로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엄청난 고난을 겪고 나서야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지혜를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성령을 구하여 얻듯이, 지혜도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기와 야심이 중심에 있는 땅에 속한 마귀적인 지혜로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정파 싸움이나 세속적인 정치의 악한 모습을 보면 여지없이 시기와 야심에 의해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기 마련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때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비참하게 깨어집니다. 그 이면에 시기와 야심에서 비롯된 세속적인 지혜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본회퍼가 쓴 공동체에 관한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공동체 자체보다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의도가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하더라도 공동체의 파괴자가 된다.” 때로 공동체가 깨어지는 것은 꿈 같은 소원, 잘못된 평등 사상을 가지고 자기에게 있는 시기와 야심을 숨기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든, 사회든, 국가든, 참된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중심에 있을 때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성결을 우선으로 하면 화평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야고보는 당시 핍박과 가난이라는 시험 속에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과 똑같이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지 않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가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온누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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