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행함과 동역하고,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행함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말씀에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면서 데살로니가교회를 칭찬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째, 행함이 없는 믿음인데 구원받는 경우입니다. 둘째, 믿음이 없는 행함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매일 먹을 양식도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에게 ‘잘 가라.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라’ 고 말하며 육신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15~16절). 말뿐인 평화, 말뿐인 사랑입니다. 모세오경에서 객과 고아와 과부, 가난한 사람들을 반드시 도와야 한다고 하나님이 각별하게 당부하셨는데 그것을 아는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 교인들은 어떨까요?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가 심각합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생명을 잃고,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면 크리스천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도대체 왜 가만히 계시고 침묵하십니까? 왜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고 있는 당신이 움직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기부금을 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나서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크리스천들에게 형제를 도울 마음이 일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들어가지 않을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천국 들어가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교리적 관점에서 보면 행위구원적 관점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사복음서의 관점으로 보면 야고보가 예수님과 똑같은 어조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맞아들였다.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주었다”(마 25:35~36). “왕이 대답할 것이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인격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17절). 많은 사람이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종교활동도 중요하지만 정말 내 안에 참된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넘치는 실천이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서 체험이 되고 그 것이 흘러넘치는 삶이 나타나는가가 더 중요 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당신은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습니다. 당신의 행함 없는 믿음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에게 나의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사실을 믿습니까? 잘하십니다. 귀신들도 믿고 두려워 떱니다’”(18~19절).
‘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가능한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뉠 수 없는 한 분이신 것처럼, 믿음과 행함도 나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적인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느냐?” 는 말씀에서 ‘ 믿는다’ 는 히브리어로 ‘ 아다’ 입니다. ‘ 안다’ 는 뜻입니다. 지식적인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구원을 못받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서 실천으로 나오지 않는 믿음이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여러분, 종교적인 지식이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노력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종교적 당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아, 허망한 사람이여! 당신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압니까?”(20절). 종교적인 실천만 강조하는 율법주의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종교적 지식만 쌓는 영지주의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진지하게 자기성찰을 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정직하게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지 않았습니까?”(21절).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구체적인 행함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의아한 주장입니다. 로마서 4장, 갈라 디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 이신칭의’ 의 대표적인 사례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정반대로 아브라함을 ‘ 이행칭의’ 의 대표적인 사례로 듭니다. 한 인물, 한 사건을 사도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이삭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드리는 실천이 가능했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은 긴 인생 여정에서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이삭을 드림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정점을 찍은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긴 여정입니다. 칭의는 순간이지만, 성화는 평생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행함과 동역합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22절). 첫째, 믿음은 행함과 동역합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반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완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정말 구원의 감격이 있다면, 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하게 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지 믿음으로만은 아닙니다”(24절). 믿음으로도 칭의가 이루어지지만, 행함으로도 칭의가 온전히 이루진다는 것입니다. 행위와 믿음 모두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여러분, 교리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에 익숙해지다 보면 진리를 의아해하거나 부정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마중물로 부어졌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샘물이 솟아나고, 삶 가운데 거룩한 순종의 열매들이 맺혀지기를 축복합니다. 도덕적으로 노력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이 있으면 당연히 그 생명이 스스로 역사합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접붙여 있으면 당연히 열매 맺게 됩니다. 순종하고 실천하라고 압박하면 종교이고, 윤리 도덕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생명수가 우리 안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면 복음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결코 제멋대로 살 수 없습니다.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둘째,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온전해 진다는 것은 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미 주어진 구원은 완성입니다. 구원이 내 삶 가운데 열매 맺도록 물을 주고, 가꾸고, 돌보는 일에 기꺼이 순종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 아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저의 구주로 믿습니다”라는 고백에 대한 순종으로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은 죽음이자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다시금 내 영혼이 깨어나게 하시고, 십자가 은혜의 마중물을 부어 주셔서 내 삶으로 주님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빛과 소금의 결실이 맺히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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